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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bok Jan 30. 2020

얼마 전,  삼성전자 정기 인사 발표가 있었다

모순형용이 상식으로 받아들여지는 사회

50대 젊은 리더라구요?


지금의 20, 30대라면 대부분 중고등학교 국어 시간에 유치환의 ‘깃발’이라는 시를 배운 적이 있다. 그게 무슨 내용인데?하는 사람도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이라는 그 첫 문장 정도는 기억할 것이다. 또 이 문장 아래 밑줄을 쭉 긋고 ‘모순형용’이란 용어를 받아적은 기억도 새록새록 날 거다(난다 치고 넘어가자). 이 문장을 통해 우린 모순형용이란 용어를 배웠다. 모순형용이란, ‘소리 없는’ + ‘아우성’처럼, 의미상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말을 함께 사용하는 표현을 뜻한다.

불가피하게 대표사례로 인용하였으나, 이 분을 비하할 의도는 없다

얼마 전, 다시 들을 일이 없을 줄 알았던 이 모순형용이란 말이 10여 년 만에 문득 떠오르는 일이 있었다. 1월 20일, 삼성전자 정기 인사 발표가 있었다. 노태문이라는 분이 사장(무선사업부장) 자리에 오르셨다고 한다. 새로 사장이 된 건 축하드릴 일이나, 그 앞에 붙은 수식어가 문제였다.

'삼성 스마트폰 새 사령탑에 52세 젊은 리더 노태문 사장'

50대 젊은 리더? 50대면 젊은 건가? 30대만 돼도 아재라고 놀리고, 40, 50대부터는 스마트폰 사용법을 가르쳐야 하는 대상으로 바라보는 20대의 시선으로는 이해 불가한 표현이다. 이런 50대가 젊다는 모순형용이 우리 사회에선 상식이란 말인가?


물론 기사에서의 맥락은 ‘기존 리더들이 대부분 60대였으니, 새로 승진한 분은 리더 중엔 젊은 축이다’라는 상대적인 젊음을 뜻한 것이지 않을까 한다. 또한, 낮은 연차의 20, 30대보다 업계에서 30년씩 근무해온 장년층의 경영 능력이 좀 더 뛰어날 것이라는 예상 반론에도 어느 정도는 동의한다. 하지만 무슨 말인지 알겠어도 그냥 까고 싶다. 리더는 꼭 60대가 되어야 잘할 수 있는 직책인 걸까? 어린 사람은 나이든 사람보다 무조건 경험이나 지혜가 부족할까? 나이는 극복할 수 없는 장애물일까?



낭중지추는 불편하다


물론 나이와 경영 능력이 어느 정도 상관관계가 있다는 과학적 근거가 있긴 하다. 현재 20, 30대의 젊은 나이에 성공을 이룬 주커버그, 잡스 같은 창업자들과 달리, 중년 창업자들이 더 성공적이라는 연구 결과가 있다. 이 연구에 따르면, 40대가 20대보다 창업성공률이 높으며, 상위 0.1% 창업자의 평균 연령이 45세라고 한다.

청년들이 더 성공적일 거란 내 가설을 처참히 무너뜨렸다

하지만 내가 지적하고 싶은 건, 젊은 이들의 능력과 성장 가능성을 대하는 우리 사회의 태도다(40, 50대가 아닌 진짜 젊은이를 말한다). 젊은 이들의 능력이 절대 연장자들보다 우세할 수 없다고 깔고 들어가고, 성장의 기회조차 차단해버리는 문화가 여기저기 만연해 있다.

‘들어온지 얼마 되지도 않은 네가 뭘 알겠어?’
‘시간 없으니까 묻지 말고 그냥 시키는 대로 해’

대한민국에서 일 잘하는 주니어들은, 아직까지 말 잘 듣고 시키는 일 빨리 처리하는 사람들이다. 일의 방향을 정하고 인사이트를 발휘하는 일은 시니어들의 몫이기 때문에, 주니어들의 의견을 궁금해하지조차 않는다. 간혹 낭중지추격으로 시니어급 퍼포먼스를 보이는 이들이 있다면, ‘오버하는 놈’이 되기 십상이다. 주니어는 직급에 맞게 주니어 역할만 제대로 수행하면 된다. 임원이야 후배가 선배 대신 달 수도 있다지만, 저연차 레벨에서 승진은 대부분 짬 순서로 이뤄진다. (모두 알다시피 후배의 임원승진은 무언의 퇴사 압박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유리병에 갇힌 벼룩은, 그 밖으로 나와서도 유리병 높이만큼만 뛴다고 하지 않던가. 처음부터 기대치가 낮은 문화에 길들여지다 보면, 딱 그 낮은 기대치만큼만 성장하게 된다. 사원은 사원에게 주어진 기대치만큼, 대리는 대리에게 주어진 기대치만큼만 생각하고 판단하게 된다. 그렇게 현실과 타협하는 것이 당사자 입장에서도 편하다. 이차방정식 풀 줄 아는 사람이 구구단만 외우고 있으면 얼마나 현타가 오겠는가? 차라리 처음부터 ‘나는 구구단만 외울 줄 알면 돼~’하고 자기 합리화 하는 게 속 편하다. 물론 이렇게 합리화 못하는 능력자들은 퇴사해서 자신만의 길을 찾는다.



모순이 모순으로 받아들여지는 사회를 꿈꾸며


한번은, 내가 존경하는 한 임원분께서 이런 말씀을 해주신 적이 있다. “비록 지금은 본인의 능력에 비해 하찮아 보이는 실무를 하더라도, 20년 뒤에는 직접 회사를 대표해 고객과 딜을 하고 사업을 개척해볼 기회가 올 거니까 낙담하지 마세요.” 주니어들을 격려하기 위해 해주신 좋은 말씀이지만, 지금 아무리 노력해도 20, 30여 년 후에나 리더가 되는 상상을 하니 아득했다. 그 때 내가 살아는 있을까?


2020년 현재. 큰 조직에 몸담을수록, 진짜 젊은 나이에 리더가 되긴 쉽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먼 훗날 21세기 역사를 공부할 학생들은 ‘50대 젊은 리더’라는 표현 사례를 통해 모순형용이란 용어를 공부할 수 있게 되길 바란다. 모순형용을 배우고도 이를 지각하지 못하는 우리와 달리, 모순이 모순으로 받아들여지는 사회가 되었으면 한다. 좀 더 많은 젊은 리더들을 볼 수 있는 사회가 되길.



쿠키: 정치에서도 청년들의 목소리는 배제됐다

* 한국 대통령 취임 당시 나이
이승만-74세
윤보선-64세
박정희-47세
최규하-61세
전두환-50세
노태우-57세
김영삼-67세
김대중-75세
노무현-58세
이명박-68세
박근혜-62세
문재인-65세

탱크 몰고 청와대 들어간 분들을 제외하곤 60대가 대부분인걸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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