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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청로 로데 Nov 29. 2021

자기 몫의 부끄러움을 몸속 어딘가에 품고 있나



어게인 동주


윤동주의 시들을 처음 접했던 고등학생 시절. 그의 시가 내 가슴속을 뚫고 지나갔는데 잔상이 오래 남았다.

눈으로만 그의 시를 읽고 끝내기가 아쉬워서 필사를 시작했었다. 늦은 저녁 집으로 돌아오면 다락방에 올라가서 현대문학 시집에서 윤동주의 글을 읽고 썼었다.

일기장에 볼펜으로 한 편의 시를 필사할 때마다 그의 글은 나의 것이 되어 깨어났다. 다양하고 다채로운 감정들과 장면들이 눈앞에 그려졌었다.

내 일기장이 온통 그의 시로 채워지는 동안 나도 시인이 된 것 마냥 착각에 빠져 헛된 몽상가가 되기도 했다.

 철이 덜든 고등학생이라서 우물 속에 비친 동주의 자화상을 필사할 때는 '우물은 절대 밤에 들여다보는 게 아닌데... 윤동주 그는 참 겁이 없는 사람이구나.'  '난... 절대 밤에 우물 근처에 안 가지.' 하고 살짝 겁먹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는 <참회록> 에도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 속"에서 자신의 얼굴을 바로 쳐다보았다. 그의 글에서 자주 등장하는 '자신의 얼굴을 쳐다본다.'는 행동이 나를 자꾸 끌어당겼던 것 같다.


동주 부끄러움을 고백하기 전에 자신의 얼굴을 쳐다본 날들을 펜으로 꾹꾹 눌러썼다. 정말 자기가 부끄러웠으니까 펜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겠지. 부끄러운 자신의 모습이 언제나 다른 사물에 투영되어 나타나니 부끄러워 할 줄 안다는건 값비싼 보배지만, 유물처럼 소유할 물건은 아닌 걸 알았을 거다. 자기 몫의 부끄러움을 감추면 자기 몸속 어딘가에 한 개 세포로 조직으로 장기에 한 덩어리 부끄럼이 붙어있는 걸 찾았을 거다. 

나는 그럴 용기가 없었다. 그래서 대신 나는 끊임없이 성찰하고 고뇌했던 동주의 글을 필사하면서 그의 아픔에 다가가 보려고 시도했다.


그렇게 청년 동주를 동경했던 세월이 수십 년이 흐르고, 2016년 영화 <동주>가 극장가에 나왔고 나는 다시 동주를 만나러 갔다. (러 가는 게 당연했다.)  2016년 2월에 영화 '동주'가 개봉되었을 때, 일주일 동안 두 번 <동주>를 관람하고, 영화 속 동주의 흑백 사진들을 컴퓨터 바탕화면에 깔아놓고 작업을 할 때마다 쳐다봤었다. 사진은 마치 강변 수면 위로 오르는 희뿌연 안개처럼, 비 내린 뒤 산허리를 시원 운무처럼 내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참회록>에서 언급했던 그의 얼굴을 어느 왕조의 유물처럼 화면에 펼쳐놓 나는 몇 개월을 동주와 함께 업무를 시작하고 마쳤었다.

윤동주의 시작과 끝으로 남겨진 그의 시와 사진으로 마음이 위로받았다. 험악한 세월을 살다 간 동주가 안락하고 편리한 지금 세상을 걷고 있는 나를 위로했다. 

그가 자신을 드러내 놓고 부끄럽다 하고 자꾸 자신을 성찰했던 고백 때문에, 나도 나의 부끄럼에 솔직하게 다가갈 용기를 얻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윤동주  <서시>-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告白)을 했던가.   
    -<참회록>-


산모퉁이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 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자화상>-





부끄러운 마음에 드리웠던 자기 정죄


버스 한 대가 마을 정거장에 멈춰 섰다. 유치원생들이 소풍을 다녀오는지 한 명씩 차에서 내렸다. 내 동생이 누나가 온다고 정거장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몇 분간의 장면이 블랙아웃되어 기억나지 않는다. 동생의 발이 버스 바퀴에 깔렸고 정거장 건너편 가게에서 아버지가 급하게 뛰어오셔서 동생을 빼냈다.

 '내가 그때 동생을 밀쳤었나?'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시간이 흘렀는지?) 발에 깁스를 한 동생은 입에 과자를 물고 천진난만 얼굴로 나를 반겼다.  버스사고가 났던 그 순간부터 성인이 되어서까지 나는 누나 이면서 '죄인'이었다. 버스 바퀴가 동생의 오른쪽 발을 넘어가던 순간에 동네 사람들이 '애가 깔렸다'라고 고함지르고 모여들어서 버스 기사는 차를 후진한 뒤 멈춰 섰다. 

아버지는 동생이 발을 절단하지 않게 된 것을 '단단한 구두' 덕이라고 말씀하셨다. 그 구두 때문에 오른쪽 두 번째 발가락 뼈가 절단됐지만 아들의 발은 온전하니 얼마나 다행이냐고...

*그날 부모님은 얼마나 힘드셨을까. 딸이 자책감에 겁먹지 않도록 안아주고 동시에, 발가락 하나 잘린 것으로 다행이라며 아들을 안아 주셔했을 그 맘이  힘드셨겠다.



 (나의 기억에서) 아무래도 내가 버스에서 내리면서 동생을 보자마자 밀쳤던 것 같다. 왜곡된 기억인 건지, 왜곡된 사건인 건지...

 일곱 살 된 유치원생이 느끼는 부끄럼에는 잘못을 했다는 사실에 대한 충격, 그다음에 두려움이 밀려왔다. 아이에게도 자기 몫의 부끄럼이 가슴속 어딘가에 보관되기 때문에 그냥 두면 스스로를 정죄하는 마음이 생기는 걸 느꼈다. 나의 잘못으로 동생의 발가락 하나가 잘려 나갔다는 사실에 대해 무엇으로든 보상하려는 마음이 강하게 들었다. 어른이 되어서도 동생에게 일어났던 교통사고 현장을 떠올리면 나는 자꾸 어디로 숨고 싶은 부끄러운 마음이 있었다. 동생을 지켜주지 못한 누나여서 부끄러웠고,  여름에도 발가락을 내놓는 걸 꺼려서 양말을 신는 동생의 부끄러움도 내 몫으로 생각했다.


그렇게 한참의 세월이 지났고 동생이 결혼하고, 조카들이 아빠의 발가락이 이상하다며 물었던 날. 처음으로 동생에게 그 사고가 다 나 때문이었다고 하자. 동생이 "누나, 그게 아니거든. 내가 급하게 버스 정거장으로 뛰어들다가 넘어져서 사고가 난 거야."라고 대답했다. "그랬어? 아닌데..."

 블랙아웃된 기억. 블랙박스도 없던 어린 시절의 사고 앞에서 늘 미안하고 부끄러웠던 마음이 스르르 족쇄가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의도적인 부끄럼은 없다.

:어떤 일이 언제 어떻게 일어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부끄럽기로 작정해서 행동하사람은 없을거다. 부끄러워하는 것 자체가  의도적인 표현인게 더 큰 수치가 되니까.


사람으로 하지 말아야 할 짓을 저지른 사건 사고를 접할 때, 그리고 비정상적이고 코미디 같은 행동과 말을 하는 것을 접할 때, 흔히들 "부끄러움은 나의 몫"이라고들 한 소리 다. 그 상대방의 부끄러움이 나의 몫이 되는 이유는, 바라던 기대치의 이상이 허무하게 무너질 때 느끼는 상대방의 양심이지 않을까.  언제나 마음이 한번 무너지는 걸 겪어보면 알수 있다. 그 마음속 양심이 반응하는 갖가지 '부끄럼'에 수량으로 측정되는  분명한 수준이 있음을 알게 된다. 아니, 측량할 수 있다고 해야겠다.


그런데... 누구도 부끄러움을 의도적으로 표현할 수는 없. 혹시 의도적으로 그렇게 한다면 자신을 먼저 속이는 편을 택하는 것과 같다. 실수와 죄에 의해 나타나는 이차적 도덕 감정이 부끄럼이라 할 수 있기에 의도적으로 부끄러워하는 일을 하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다. 그러기에, 부끄럼이 도덕적 울타리 안에서는 언제나 자유할 수 있다. 그리고 언제든 실수할 가능성이 열려 있는 사람 사는 세상에서 부끄럼의 역할은 정상적 회복을 위한 기회 것 같다. 부끄러움에 대해 다 풀지 못한 숙제가 있다면 자유가 있는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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