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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청로 로데 May 06. 2021

0.1 '어제 살던 나'

성찰일지

한 순간이거나 한 장면이거나,

되살아나는 기억들 가운데 바꾸고 싶은 것이 생기지 않으면 다행이겠습니다. 


기분 좋은 장면. 말. 사람. 날씨들은 그냥 씩~ 웃어줘도 보상이 되니까. 평균 이상의 일들까지 바꿀 이유는 없지만.


 기억은 거울로 보지 않아도 보여서 기억에 눌려 버거워하는 사람들이 종종 정신과를 가네 마네 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내게 일어난 사실을 포장하고 싶은 유혹을 받을 때가 종종 있는데,

 혹시라도 '어제'가 된 사실을 메이크업해서 덮어질 수 있는 기억이 있다면, 그 상황이 갖고 있는 위험성은 '본질 혹은 사실이 왜곡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위험의 대가를 감수해야 하는 맨 앞자리에 누가 있나?

 '나 자신'이 아닐까요. 


'아~ 괜찮아 혼자 편하게 생각하지 뭐~' 이런 마음을 가졌어도, 친구와 얘기하다 보면 부지불식간에 자신에 대해서 솔직해지지 않는 경우가 자주 벌어집니다. '왜 내게 좋은 일은 부풀리고 해가 되는 일에 대해서는 축소하려고 하는 걸까?'

 그 이유는 아마도 '평가되는 것으로부터의 부자유'에서 비롯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나 자신에 대한 정직한 평가를 타인에게 듣는 일은 나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에 대해서는 미풍처럼 후한 점수를 주는 인간적인 속성 때문에라도 외부에서 평가받는 일이 필요합니다. 사회가 나를 평가하니까 정직하게 나를 전달하는데 부자유함을 느낀다면서 '나의 말과 행동의 결과에 대한 '탓'을 외부로 돌리려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나 자신을 좋게 보이고 싶을 때, 재고하는 깨달음은 '정직함을 배울 수 있는 첫걸음은 늘 나 자신에서부터 시작해라' 사실을 기억하면서 말해야겠구나 하는 것입니다.



케케묵은 옛 이야기가 된 일 가운데...

 

내가 속했던 모임의 리더와 상해~서울 간 국제통화로 고집스레 '당신의 결정이 틀렸다'라고 주장했던 일을 되짚어 보았습니다. 한국으로 들어와서도 나의 자화상에게, '그때는 그렇게 말하는 게 최선이었다'라고 말해주었지만, 덧붙여 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나의 최선이 언제나 옳은 건 아니잖아.' 이런 말이었죠.


이틀 전 구약성경 시편 85편을 읽다가 10절 주변에서 마음이 맴돌았습니다.


10절 '인애와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 맞추었으며' 


(성경 내용의 압축 파일을 풀고 이해할 때마다 철학적 사고를 도구로 사용해요)


나는 이 구절이 '불완전함'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완전함'을 이루기 위해 어떤 일이 선행되어야 하는지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인애(자비) 없는 진리 혹은 진리가 없는 인애이거나, 의로우나 화평이 없든지 혹은  화평하지만 의롭지 못한 상황들은, 둘 중 어느 하나가 결핍되어 있거나 과잉이 되어 균형이 깨진채 기울어져 있으니 그대로 지나치거나 무심하게 놔두지 말라' 훈계들립니다.


그러면, 인애와 진리가 만나는 지점과, 의와 화평이 서로 만나야하는 지점에서 발생하는 시너지는 무엇일까요?



"인애와 진리, 의와 화평"


이들 가치의 균형을 잡으려는 노력이 왜 필요한지에 관해 설명하자면, 이야기가 산으로 갈수도 있겠습니다만

간단하게 설명한다면,

#이들 도덕적 가치들은 충돌하지 않는다.  

#사람이기에 균형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역으로, 사람이라 만들지 않을 수도 있지만)

라는 두 가지 정도를 들 수 있습니다.


시너지ㅡ

 가지 가치가 만나면 온전한 좋음이르게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또 하나의 일

육 년 정도 해묵은 이야기는 어쩌면 '의와 화평'이 서로 등졌기 때문에 생겼던 '깨어진 관계'에 대한 사건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마지막 문자 폭탄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파편 한 조각이 지금까지 내 몸 어느 구석에 박혀있는데 '언니는 게으른 사람'이라는 입니다.


 그 문자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고 말고를 떠나, 그 친구가 최후에 내게 던졌던 '게으른 사람'이라는 말이 나를 제대로 평가한 말이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화평이 실종된 사실만 남은 관계로는 친구관계가 어려웠고 나와 그 친구를 적(혹은 제삼자)으로 돌려버렸다고 봅니다.  



'화평을 없앤 자리에 사실들을 가득채워 내가 정신차리길 기대했던건가?'


 가끔 묻고 싶은 충동을 느끼지만... 지금은 그 복잡하고 시끌시끌했던 불통의 시간들이 내게 큰 의미가 없습니다.


그렇게 6년의 세월이 지났는데...



정말 그 사건이 '어제'여서 아쉽습니다.


단절된 관계를 잇기에는 추구하는 비전의 간극이 너무 넓어서 내 노력으로는 도달하기 힘들 것 같습니다.


하지만, 바꿀 수 있다면 그 상황까지 가지 않고 격려하고 웃으며 마무리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질문이 가끔 찾아옵니다.


 천만다행인 일은, 내가 게으른 사람이라는 그 친구의 평가를 수용하면서 생활의 루틴을 새로 정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정말이지 나는 나 자신에게 미풍만을 보내주고 싶었나 봅니다.




최근 나는 '어제 살던 나'와 마주하게 될 때마다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잘했다거나 못했다는 어떤 평가 때문이 아니라 내가 보지 않았던 또 다른 길이 요즘엔 보여서입니다.

 거울이 없어도 너무 잘 보이는 기억 속에서 나는 무수한 문장의 말을 쏟아내고.


자신을 높이는 말. 자책하는 말. 상대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말. 저주스러운 말까지


 그것이 덩어리가 되어 지금의 나란 존재를 빚어냈다고 생각하면 식은땀이 날 정도로 아찔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나로 내일의 나를 빚어갈 수 있는 오늘이 와서 다행입니다.


감정적 생활리듬을 심하게 흔들었던 4월이 물러나고 5월이 찾아왔다는 것 자체로 이젠 좋습니다.


오늘을 살아봐야 알겠지만 흔들려도 옳은 길을 화평함을 이루며 걷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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