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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청로 로데 May 20. 2021

1.3  '발효숙성 36+' on&off

음식에 녹아 있는 사계절의 흐름과 자연스러움을 누리는 일상


3초간 터치


1.3 발효숙성 36+     

   

36h+로 표기했어도 해독하지는 못했을 ‘발효숙성 36+’ 의미를 뒤늦게 이해하면서, 아삭하고 시원한 김치를 먹고사는 사람의 생활 이야기



* 36+의 비밀은 암호가 아니다. 


    우리 집 김치냉장고 전면에는 이 제품에서 세팅 가능한 내용들이 표기되어 있다.


장독 그림 안에 ‘발효과학 36+’이라고 표기한 의미를 완전히 습득한 원년이 2020년이었다.

십 년 넘는 세월이 지나는 동안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설명서를 읽어보지 않고 김치냉장고를 이용했다.

설명서를 읽긴 읽었을지도 모르겠다.


 약식으로 세팅을 해제하거나 잠그는 정도, 즉 3초 동안 지그시 버튼을 눌러서 ‘띵동’ 소리와 함께 자물쇠가 열린 그림에 불이 켜지면 김치류, 보관 선택의 강. 표준. 약의 이것저것 눌러보고 선택하고서, 다시 3초간 누름 버튼을 눌러 자물쇠를 잠그면 냉장고가 세팅된다.    


    가전제품을 구입하면 며칠 뒤 설치 기사들이 물건을 싣고 와서 집에서 지정한 위치에 그 제품을 배치하고 설치를 마무리한다.

기사들이 돌아가고 난 뒤 나는 사용설명서를 눈대중으로 대충 읽은 뒤 곧바로 각종 제품들의 설명서가 쌓여 있는 파일 서랍에 보관한다. 그리고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물건이 오작동으로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면 제품 설명서는 서랍에서 꽤 긴 세월을 보낼 수 있다.

어쩌면 평생 광명한 세상을 못 보는 경우도 생긴다.         



*제품마다 사용설명서 한 장


사용설명서에 드는 학습 비용은 얼마일까? 본격적인 학습은 기사들이 떠나고 나서부터다.


   제품은 젊은이가 사는 숙소로 혹은 노인들의 집으로, 도시 혹은 시골로, 바다 아니면 산으로, 혼자 사는 곳으로 혹은 대가족들 집으로 배달된다.

그렇게 물건주문한 소비자에게 배달되어 자기 구역이 확보되면 자신의 사용 수명을 다할 때까지 사용자와 함께 같은 공간을 공유한다. 사용자가 제품을 사용하고 있는 사용료는 매달 지불하는 전기료에 청구된다.     


   사실, 팔순의 노부모는 잡다한 설명서를 보고도 무슨 말인지 한글을 해독하는데 애를 먹는다.


나도 점점 설명서 읽기가 귀찮아서 ‘쓰다 보면 알겠지’라며 알려고 애쓰지 않는다. 전원을 꽂아 작동되는 기기들이라 제품에 친절을 베풀 이유는 없지만, 가전제품들을 생산하는 기업에서 일사천리로 찍어내는 물건을 사용할 소비자가 기계가 아닌 인간이라는 기본적인 사실을 알고 있겠지.


하지만,

설명서는 그냥 사람의 정서에 호소하려는 목적으로 작성된 글이 아니다.


목적은 ‘사용’ 하기 위함이지 정서적 감흥의 여부로 이해하고 말고 할 내용이 아니어서, 내가 냉장고랑 대화를 나눈다면 말동무가 필요하거나 굉장히 다정한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사용설명서 

1. “3초간 누름” 버튼을 지그시 눌러서 자물쇠를 연다. (자물쇠 그림이 열렸는지 확인해야 함)    


2. 김치류(무. 배추. 물)는 익힘, 맛보기, 추가 기능을 선택할 수 있다. 여기에서 만들 수 있는 조합의 수는 3 곱하기 3인가. 대략 아홉 가지 경우의 수에서 선택하면 된다.    


3.‘보관 선택’ 기능에는 야채/과일, 김치류, 생동 세 가지에서 냉장의 정도 강. 표준. 약에서 원하는 세기를 선택한다. 여기서도 경우의 수는 아홉 가지 정도이다.


(다행이다. 더 많은 선택권을 주었다면 난 아마도 냉장고를 다른 제품으로 바꿨을지 모른다. 맛있는 김치 한번 먹겠다고 이렇게 복잡한 기능을 터치! 터치! 해야 한다는 건 정말 번거롭다. 하지만, 이런 가전제품을 만들어 내는 사람들에게 저마다의 뜻과 큰 그림이 있지 않았을까?)    


4.1부터 3까지는 누구나 원하는 세팅을 할 수 있는데, 김치냉장고에만 탑재된 기능으로 다른 냉장고와 차별성을 갖는 것이 바로 “발효과학 36+”일 것이다.         


(기억하자. 36+는 36시간 실온에 둘 때 발효숙성이 가장 알맞다는 표시다.)




*‘김치냉장고’ 한국에만 있는 것 맞죠?!


-공기도 공간을 차지한다.

그리고 질량을 지닌 물질이 ‘있음’의 상태를 확인할 수 있는 차원이 ‘공간’이다.


 김치냉장고의 탄생과 영토와 그의 능력에 관해서 들여다보았다.


(단, 이 관찰은 객관적인 데이터와 정보에 의하지 않고 지극히 개인적 주관적인 생각이다.)     




-그 탄생 혹은 출시-


이 문명의 가전제품은 제 용도에 적합한 이름인 ‘김치냉장고’로 명명했고,  포용력이 얼마나 넓은지 각종 김치류 뿐만 아니라 야채와 과일, 얼린 고기나 생선도 보관이 가능하다. 그런 그의 포용성에도 불구하고 ‘김치냉장고’(방점은 김치에 있다)는 김치가 주 메인으로 좌우 모든 곳을 김치가 차지하는 영역(영토)이다. 김치는 이곳에서 갑의 갑이라 할 수 있어서 일반 냉장고에 아무리 공간이 넓어도 이곳에서 자신의 능력을 보여준다.     




-호시절, 김치 성수기-


그리고

 김장 김치로 모든 통들이 가득 채워지는 매년 12월 김장철이 돌아오면 김치 외에 다른 식품들은 김치냉장고에서 퇴출된다.


 김치를 제외한 나머지 식품들은 모두 퇴출 정리 대상이 되어 일반 냉장고로 옮겨지게 된다. 일단 일반 냉장고로 옮겨진 식품들이 다시 김치냉장고로 되돌아갈 확률은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한 동안 수백 번 김치냉장고를 열고 닫아도 거기에서 나오는 건 ‘오직 김치’ 뿐이다. 삼시 세끼. 두 끼나 한 끼. 끼니마다 ‘김치’는 메인 반찬으로 밥상을 오르락내리락하는 동안 저장용 통은 점점 비어 간다.     




-그곳에서 사계절을 보내며 익어가는 김치-


그렇게 가벼워진 통에 있는 김치 속 재료들의 상태는 어떤가.  

김치 국물 안에 잠겨 붉은 무, 붉으면서 진초록색인 파, 싱싱하고 통통했지만 삼투압에 눌려 쭈글쭈글 늙어버린 굴, 주황색 당근까지 모든게 붉게 물들어 있다. 이렇게 붉게 염색된 김치 통 속 재료들이 김치 국물 속에 잠겨 있는 걸 발견할 즈음엔 그 통들을 비워야 한다.


 ‘시간을 끄집어내는 시기가 돌아왔다.’

한 통씩 비워지는 통들이 늘어가며, 김치 외에 다른 음식들이 들락날락하면서, 김치냉장고 안에서도 봄. 여름. 가을. 겨울 네 계절이 있음을 깨닫는다.  




-음식의 세대교체-


아무리 맛난 김치라도  잘 먹히지 않는 시기가 도래한다.


그때가 바로 ‘봄’이다.


들판과 비닐하우스에서 지런한 농부들이 뜯은 봄나물이 시장의 판도를 뒤집어 놓는다. 


시장판이 뒤집히면 밥상머리 반찬들부터 냉장고 저장 식품들까지 줄줄이 변화가 일어난다.


그래서 해마다 찾아오는 봄은 가볍지 않다.


 봄이 변화인 건지, 변화의 이름이 봄인 건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봄과 변화는 만물이 살아 꿈틀거리도록 엄청난 에너지를 발산하여 생명 공동체 모두를 일으키는 게 분명하다.

그렇게 봄나물이 시장 안팎을 점령하면, 어제까지 바짝 건조했다가 푹 삶아낸 겨울 시래기와 늙은 호박, 무말랭이가 슬슬 사라진다. 그것들은 한 겨울 먹거리가 부족했던 시절 조상들의 음식 문화를 보여주는 관습과도 같은 음식들이다.     


사담: 아버지께서 김장 김치에 젓가락이 안 간다고 하신다. 그 이유도 설명해 주시는데, “봄배추가 나오면 김장 김치가 맛이 없어지는 시절이라서~.”라고 그러신다. 에너지와 활기를 줄 건강한 나물들이 겨울 먹거리를 밀어냈겠지.     





-묵은지 맛을 맛깔나게 만들어낸 김치냉장고-


얼마 전 둘째 동생 가족이 주말에 집으로 찾아와서 저녁 식사를 했다.


아버지는 외식하는 것을 즐겨하지 않으시니 어버이날이라도 우리는 집에서 음식을 만들고 함께 식사를 한다. 여간 번거롭고 귀찮은 일이 아니지만 이젠 집에서 음식을 차려 먹는 일이 더 안전한 상황이다.

아버지는 돼지고기도 바싹 굽는 것을 싫어하시지만, 손주가 바싹 구운 고기를 좋아하니 동생네가 오면 돼지고기는 오래간만에 썬텐을 하듯 프라이팬에서 노릇노릇 구워진다.      


그렇게 구운 고기를 둘째 올케에게 김장 김치에 싸서 한번 먹어보라고 권했다. 정말 아삭하고 시원한 김치 맛을 보여주면 그 비결이 궁금해서 질문할 거라 생각에서 적극적으로 먹으라고 했더니.


먹고 난 뒤 바로 반응이 왔다.

“형님, 김치가 정말 맛있네요. 우리 친정 김치는 이런 아삭한 식감이 안 나던데.”라고 대답했다.


미리 준비해둔 대답: 

“김치냉장고에 발효숙성 코스가 있거든. 그게 숫자가 36+라고 써졌잖아. 36시간 실온 상태로 둔다는 의미라네? 그 버튼을 누르면 김치 냉장고 속 김치들이 실온에 있는 놔둔 것처럼 되거든. 그 시간이 끝나면 장기보관 코스로 세팅하면 김치가 이렇게 아삭하고 맛깔나게 되더라고~”     


김치가 저장공간에서 일정한 기온시간을 보내면 묵은지가 만들어져 몸값이 올라가고, 가끔씩 집에 오는 출가한 자식들한테 n분의 1로 배분할 때는 숨겨둔 금붙이라도 주는 것처럼 엄마는 설명을 장황하게 늘어놓으신다.


 “이거 재작년에 담근 건데~ 맛이 정말 제대로더라. 김장할 때, 갈치속젓, 각종 액젓, 새우젓에 마늘이랑 생강을 또 얼마나 뚜드려 넣었는지 양념에 들어간 게 어마어마하다. 양이 얼마 없어도 우리 사랑하는 아들 며느리 손주 먹으라고 주는 거다. ^^.”


엄마의 생색에 옆에 있던 나는 (너무 과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엄마, 다 알아들었으니까 그냥 줘라~ 뭐 그렇게 묵은지 찬을 하셔?!”


 나는 속으로 은근히 이런 생각을 한다.


‘너무 다 줄 생각하지 말고 적당히 좀 주시지...’

(이것이 시누이의 정체성을 갖게 된 나의 꽁한 맘이다.)    




나는 2020년이 돼서야 김치냉장고에 ‘발효 36+’의 기능을 알았다.


김치는 발효되기까지 기다리는 ’ 기다림의 미학‘을 배우는 한국의 전통 저장식품이다. 김장을 마치고 36시간의 발효 숙성기간을 위해, 잠금 버튼에 손을 대고 약 3초 정도 지나면 ‘띵동’하고 경쾌한 알람과 동시에 자물쇠 그림에 불이 들어온다. 그리고 발효숙성 36+을 터치한다. 그 다음 다시 자물쇠를 잠근다.    


봄이 와서 냉장고 속 음식들에 일대 변화가 일어나도 그건 너무 자연스럽다.


 음식의 변화를 위해 억지로 인위적인 외압으로 음식을 만들 이유가 없다. 


김치가 차지했던 공간이라고 영원무궁토록 김치 한 가지 아이템을 위한 공간이 되지 않는다. 


김치의 공간인 ‘김치냉장고’ 속 사계절 변하는 음식을 통해 모든 게 바뀌고 순환하는 평범한 내 일상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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