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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청로 로데 Dec 18. 2021

 겨울이라는 기분

"12월 17일. 이런 추위가 왔으면 다."


매일 아침. 잠을 깨며 실눈을 떠서 하루를 시작하는 와중에도 본능적으로 핸드폰 화면에 시간과 날씨를 체크한다. 우리 집은 동남향으로 놓여있어서 위성에서 전송된 데이터상의 기온과 실제 체감 온도차가 꽤 벌어진다. 아침마다 기온차를 몸으로 알아보는 차원에서 나는 7시쯤에 베란다로 나간다.


바이올렛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고, 잎이 고 꽃이 고'

베란다에서 '지난밤 찬 공기로 긴장하고 아침을 맞이하는 화분들 흙이 말라 있는지 들여다보면서 물조리로 식물들에게 물을 제공해준다. 큰 나무 화분 옆에 3단 화분대를 차지한 바이올렛 이번 가을을 보내면서 열세 개가 늘어서 기존에 있던 거랑 합쳐 열일곱 개가 되었다. 네 개 화분에 있는 바이올렛은 이미 한 두 번 꽃을 피워서 나를 기쁘게 해 주고 사라졌지만, 늘어난 13개의 화분은 꺾꽂이한 잎에서 아름아름 잎을 올리고 있으니 내년이 되어서야 꽃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미 친구들에게 분양한 바이올렛이 여섯 개 정도 되는데 '보라색 꽃을 피웠다'는 문자와 사진을 받아보기도 했다.


� 아보카도 나무

9월에 아보카도를 먹고 남은 씨앗을 화분에 심은 것이 이제 20센티미터 정도 자랐다. '내 손이 금손이 되어가는 증거인가?' 바이올렛이나 아보카도 나무가 자라는 걸 보면서 사람들도 나를 칭찬하기에 이르렀다. ^^


그리고 우리 집 우세 종인 장미허브는 그동안 자잘한 화분에 따로 있던 걸 다 모아서 한 화분에다 촘촘하게 심었다. 장미허브는 물주는 사람이 무심하게 가끔씩 물을 주면 된다. 지나친 관심으로 물을 붓다 가는 며칠 안에 뿌리부터 죽어가는 걸 보게 된다.  


참, 고무나무 내가 휘두른 칼날에 가지가 잘린 후 꺾꽂이되었고 사람 키보다 길게 자라던 나무는 성장을 미루고 종족을 번식한 상황이다. 꺾꽂이한 고무나무 가지 아래로 강인한 뿌리를 내리고 하나의 독립된 개체가 되면 내년에 이 나무를 원하는 사람에게 분양하고 싶다. '


화분을 보고 나서 베란다 바깥 난간에 놔둔 수국이랑 워터 코인 흙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상체를 밖으로 내밀면서 안으로 밀려 들어오는 겨울 공기의 정도를 추측한다. '오늘은 가볍게 입고 나가도 되겠네~, 이 정도는 좀 쌀쌀하겠는데~' 아파트 보도블록 위를 걸어가는 초등학생. 중학생. 고등학생 아이들이 학교향해 걸어가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흐뭇해진다. 옆 동에 사는지, 앞동, 우리 동에 사는지 알 수 없는 집에서 살고 있는 아이들은 아침마다 각기 다른 통로에서 나와 한 방향을 향해 걷다가 흩어지는 작은 가지들의 행렬을 이룬다.


아이들이 택한 그날 옷차림에 그날의 날씨가 묻어 있어 등교하는 아이들이 어떤 옷을 입었는지 살펴보고 내가 입고 나갈 옷을 결정한다. 옷을 껴입다가 갑자기 훅하고 열기가 올라 더워지면 재빨리 가벼운 옷으로 갈아입으면 된다.


이번 주는 월. 화 이틀은 약간 쌀쌀했고, 수요일은 밤조차 봄날 같이 포근했다. 평상시 입는 패딩 점퍼와 코트는 바뀔 게 없으니 코트 안에 입는 옷가지만 날씨에 맞춰서 선택하면 된다. 외출에 필수적으로 마스크를 쓴 뒤로는 화장도 대충 하고, 입고 다니는 옷에도 신경을 덜 쓰다 보니 새 옷에 대한 구매욕마저 사라졌다. 옷에 보플이 몽글몽글 올라와도 괜찮아졌다. *C.S. 루이스가 즐겨있었던 옷은 터지고 기운 자국 투성이었던 카디건을 오래도록 입었다니까.. 나도 나이 들면서 그렇게 옷에 너무 신경 쓰지 않고 싶기도 하다.





분주함 없이 맘이 통하는 기분


어제(12.16)는 아침부터 비가 내렸고, 포근한 하루가 될 거라는 일기 예상 정보가 뜬 걸 확인했지만, '아니겠지... 겨울에 비 오는데~ 비 오고 나면 기온 떨어지던데.'라고 혼잣말을 했다.

아침 일찍부터 엄마는  솥 가득 소고기 미역국을 끓여서 가스레인지 위에 올려놓고 외출하셨다. 작년부터 복용하기 시작한 당뇨약을 삼킬 때는 아침  끼부터 먹을거리가 있는지 냉장고 지도를 그려본다. 국물류는 좋지 않지만 날 위해 끓여놓은 미역국. '내 생일을 기억하는 미역국' 물 마시듯 후루룩 먹고 출근했다. 물론, 외출 복장은 겨울비 오는 날씨에 맞서기 위해 스웨터 위에 패딩 조끼를 입은 뒤, 목도리를 두르고, 마지막으로 두툼한 오리털 롱 패딩을 걸쳐 입었다. 게다가 K94-마스크로 입을 가리고 외풍을 완벽하게 차단하고 말이다. '과연~ 내 판단이 옳았구나!' 싶었다.


일주일 전부터 약속했던 만남이 있어서 집으로 전화해서 저녁식사 먼저 드시라 말씀드리고, 이것저것 한해 마감할 일정들을 체크하고 이사님이 뽑아 놓으라던 재정 보고서를 정리해놓고 사무실을 나섰다.

비가 그쳤는데 포근한 오후.

구. 시가지에 밀크티 전문점 '사브낫 바네아'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아침. 점심 두 끼를 샐러드만 먹었더니 너무 허기져서 근처 카페로 들어갔는데. 메뉴 가운데 내가 먹을만한 건 샐러드였다. '닭가슴살 샐러드를 먹으면 허기는 가시겠지'

집에서 먹는 수제 샐러드는 베지테리언 식사인데, 저녁 한 끼로 주문한 샐러드는 너무 화려하고 고급져 보였다. 양도 넉넉했다.

닭가슴살 샐러드 in 읍천리 카페

다시 사적 모임 인원 제한한다는 뉴스가 나온 뒤여서인지 길거리를 걸어 다니는 사람이 열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다.

밀크티를 마시며, 석 달만에 만난 후배는 시월에 후두염 수술 이후 새 직장에 들어가게 된 우여곡절을 털어놓았다. 3년 전에 처음 봤었던 철없고 불안해 보엤모습이 지금은 단단해지고 깊어져 가는 게 보였다.

이보다 값진 선물이 어디있을까 싶다. '사람이 바뀌고 있는 것. 자신의 변화에 내가 기여했다고 하니... 그랬구나. '

'다행이다. 이제 노심초사하며 내가 챙기지 않아도 되겠다.'

인적 드문 거리와 손님은 우리 둘 뿐인 한적한 카페 안에 주고 받는 이야기들. 이런 겨울의 기분으로 가벼워지는 하루가 되었다.

*겨울비가 그친다 해서 기온이 쌀쌀해지진 않았다. 패딩 지퍼를 열고 걸어도 마스크에 가려진 콧잔등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이런 날은 날씨에 대한 경험이 고역이 되기도 한다.   




간절함이 하늘에 닿는다는 기분


울산에 폭설이 내렸던 횟수가 몇 번이었을까? '90년 중반 서울에서 내려와서 눈이 실종된 마른 겨울을 보내다가 '이곳에도 폭설을 주시라'고 눈이 내리길 간절히 기도했고, 삼사일 후에 울산시 교통이 마비될 정도로 폭설이 내렸다. 다들 기상이변 이라고들 말했지만 난 그 폭설이 기도에 대한 응답이라고 이해했다.


폭설에 대한 간절함이 한번 더 있었던 게 1996년 상해대학에서 중국어 공부하던 때. 상해가 남쪽 해안도시이기 때문에 겨울에 눈 보기가 힘든 지역이다. 방학으로 유학생들이 본국으로 들어가고 기숙사에 남아 있던 친구들이 각자 방학을 보내던 그때. 겨울 눈이 간절해진 나는 하얀 눈을 밟는 꿈을 꾸다 일어났는데.. 한방을 쓰던 친구가 밖에 폭설이 내렸다는 소식에 나가보니 좀 전에 꿈에서 봤던 장면이 눈앞에 펼쳐진 걸 확인했다.

'간절함이 하늘에 닿는다는 걸 두 번의 겨울을 지내며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봐서.. 간절함이라는 기분이 겨울과 조금 더 가까이 맞닿아있다.




*역에 서 있는 기분*


12월 17일(금) 한파가 몰아쳤다.

최근 겨울 답지 않은 12월의 포근함에 불만과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추워지니 안심이 되었다.  겨울 추위로 논두렁에 벌레들도 죽고, 땅이 얼었다가 풀려야 땅 속 생명들이 강해 질 테고, 대기와 해양 순환으로 지구도 살아갈 겨울이 필요하다.

발은 나름 서두르며 걷는데 강풍이 빨리빨리 속도 좀 내라고 등 떠밀려 집으로 왔다. 오랫동안 기억에서 지워진 장면들이 추위를 타고 불어왔다. 그 겨울의 기분은 소멸된 지 오래고 엇비슷한 분위기만 풍기니 예전 일을 떠올려본다.


'90년 중반까지 내가 소속해 있던 단체가 서빙고역 근처에 있어서 매일 그곳을 지나가야 다. 2호선 강변역에서 왕십리까지 가서 국철로 환승해서 서빙고역까지 다녔던 춥고 삭막하고 분주했던 겨울. 일을 끝내고 집으로 가기 위해 서빙고역 승강장에 서 있으면 추위로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 같았다.

그때는 그곳을 더는 안 지나다녔음 했는데 그것도 다 지나갔다.

행복했던 날들이 더 길었기에 힘듦을 견딜 수 있었던 것 같다. 겨울 말고 다른 계절에도 할 말이 많지만, 오래간만에 찾아온 강추위로 지나간 일을 추억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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