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취재하던 기자, 한의대에 들어가다-'나사'에 들어갔습니다
전국 한의대에는 각 학교별로 '나사'라는 모임이 있다. 미국항공우주국(NASA, National Aeronautics and Space Administration)이 아니다. 나사는 '나이 많은 사람들'의 줄임말이다.
나사 : 나이 많은 사람들
90년대생인 나는 입학하자마자 자연스럽게 나사에 자동 가입됐다. 동아리에 들어가긴 어려웠지만, 나사는 그냥 들어가졌다. 가입을 피하고 싶어도 이래나 저래나 피할 수 없는 나이었다. 각 학교별로 나사의 기준은 다르지만, 내가 다닌 학교의 나사기준은 '5수 이상'이었다. 5수를 한 동기들도 나보다야 한참 어렸지만, 현역 친구들에겐 다섯 살이나 많으니 대학사회에선 나사가 될 자격이 충분했다.
(참고로, 2026년 기준으로 보면 정규 교육과정을 밟고 재수 없이 대학교에 입학한 스무 살들은 2006년생이다. 간혹 2007년생도 있고, 삼수를 했다고 쳐도 2004년생. 2005년엔 SG워너비 노래가 유행했던 게 아직도 눈에 선한데, 요즘 SG워너비 노래가 '엄마아빠세대 노래'라는 말이 실감이 났다. 하...)
예과 1학년부터 본과 4학년까지 여섯 개 학년을 통틀어 합치면, 나사에 속하는 학생은 100명이 넘는다. 나이대도 20대 중반부터 40대까지 폭넓다. 전적대를 졸업하고 취업고민을 하다 온 사람, 고시를 장기간 준비하다 온 사람, 성과급이 높은 걸로 유명한 대기업을 다니다 온 사람, 사회에 자리잡지 못하고 망망대해를 떠돌다 온 사람, 이미 결혼도 하고 아이까지 키우는 사람 등 나사에는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속해있었다. 금융업계, 교육계, 공직 등 웬만한 직군은 나사에서 다 찾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간혹 같은 업계에서 일하다온 사람을 만나기도 한다. 내가 언론계에서 일했던 걸 들은 한 친구는 자기도 언론인이 되는게 꿈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K대학교 방송국에서 일을 했다고 했다. 'K대학교 방송국...누가있더라?' 머리를 굴려보니 나와 함께 잠시 일을 했던 인턴학생이 대학방송국에서 일을 했던게 기억이 났다. 혹시나 싶어 인턴학생의 이름을 던져보니, 이게 웬걸! 인턴학생과 나의 한의대 동기가 친구였다! 이렇게나 좁은 세상이라니...
나사에 모인 동기들은 대부분 '대졸'로 전적대가 있어서 동문을 찾는 것도 나사의 재미 중 하나였다. 사실, 나사들의 전적대는 그리 다양하지 않다. 그닥 반갑진 않지만 여기서도 서연고 출신, 즉 스카이가 주류를 이룬다. (나사에서는 S대 모임을 별도로 만들어서 진행하기도 한다. 참고로, 나는 S대출신이 아니다.) 어쨌거나 각자 살아온 길이 비슷한듯 조금씩 다르기도 하지만, 나사라는 이유만으로 우리는 서로 의지할 수 있었다. 아, 굉장히 특이하게도 내가 다닌 학교 나사모임엔 '부부나사'가 있었다. 아내가 먼저 한의대에 들어온 뒤, 남편에게도 추천해서 부부가 함께 뒤늦게 한의대생활을 하는 케이스였다. 참으로 대단한 부부다.
사실 나사에선 특별한 활동을 하진 않는다. 그저 한 학기를 시작하거나 마무리할 때 함께 모여 밥을 먹으면서 서로 고충을 나누고 살아가는 이야기를 주고받곤 한다. 대화주제로 재테크, 결혼, 건강 등 대학생치곤 다소 묵직한 것들이 오고 간다는 점이 다른 대학 내 모임들과 다르다면 다른 점이다.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20대 후반 혹은 30대라면 결혼이나 내 집마련 계획을 세우고 있는 경우가 많다 보니(혹은 이미 실행에 옮겼을 수도),
학교 안에 있는 나사들은 공부 말고도 고민할 게 많았다. 서로 이야기를 나눈다고 답이 나오는 건 아니지만, 어쨌거나 고민거리를 나눌 수 있는 동지의 존재는 소중하지 않나. 나사는 나이로 눈치 보지 않아도 되는 그런 곳이었다.
왜 한의대에 들어오게 됐는지 이야기를 나눌 때도 "50대 직장상사의 모습을 보고 미래가 그려지지 않았다"거나 "팀장 성격이 더러웠다" 등 공감 가는 이야기들이 쏟아졌다. "메디컬 열풍에 휩쓸려서 고점 잡혀 온건 아닌지 걱정된다"는 솔직한 심정도 들을 수 있었다. 아, 가끔 나사에선 서로 조건이 꽤나 좋은 아르바이트 자리를 알음알음 소개해주기도 한다.
그리고, 청춘이 모인 곳엔 어디서나 사랑이 꽃피운다 했던가. '나사 커플'이 종종 탄생하기도 한다. 물론 헤어지면 둘 중 한 명이 자연스레 나사 모임에 나오지 않는다. 뒷감당은 본인들이 알아서 할 것이고... 어쨌거나 나사는 여러모로 만학도에게 너무나도 소중한 모임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