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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ya Jan 19. 2022

어떤 이름에게

박선아



산책하다가 산 책


하필과 마침으로 이루어지는 일들이 있다. 우연이라고 말하기는 자연스럽고 일상이라고 하긴 특별한. 

내가 아빠한테 편지를 쓴 날이 그랬던 것 같다.


마침 제주도에 가져간 책을 다 읽었다. 하필 비가 쏟아지고 숙소 안에는 마땅한 책상이 없었다. 혼자 산책을 하다가 서점을 들어갔다. 분명 생각이 없었는데 책을 들고 나와 카페에 앉았다. 비 오는 날 창가에 앉아서 서간집을 읽으니 누구라도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엽서집까지 들어있으니 벗어날 재간이 없었다.


아빠한테 편지를 써야 할 것 같았다. 책 표지 안쪽에 작가가 아빠한테 쓴 편지가 들어있어서 그랬을까 엄마랑 며칠 지내면서 아빠 얘기가 오고 가서였을까?



어떤 이름에게


모임에서 정말 누구인지 모르는 '어떤 이름에게' 편지를 쓸 일이 생겼다. 그 이름에게도 내가 하필과 마침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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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제주도를 가게 됐는데 하필이면 폭우가 와서 숙소 주변 서점에서 책 하나를 사고 카페에서 읽었어요. ‘어떤 이름에게’라는 책이었는데 작가가 실제로 가족이나 지인에게 쓴 편지들이 묶인 서간집이었어요. 특이하게 책 표지 안쪽에는 아빠한테 쓴 편지가 적혀있었는데, 그것 때문인지 아니면 비가 와서였는지 저도 몇 년 만에 아빠한테 편지를 썼습니다. 


같이 들어있던 엽서 하나를 뜯어서 편지를 쓰기 시작하는데 오랜만에 써서 그런지 그 작은 엽서가 꽤 크게 느껴졌어요. 편지에는 대충 제가 어렸을 땐 분명 엄마를 닮았다 생각했는데 크면서 아빠를 닮아 간다는 얘기, 나중에 둘이 여행을 가자는 얘기, 민망해도 서로 표현하고 살자는 얘기들을 썼습니다. 몹쓸 말을 쓴 것도 과장되게 쓴 내용도 없는데 아빠한테 그 엽서 한 장 건네는 게 참 어려웠어요. 편지를 주기 전에 몇 번이나 다시 읽어봤는지 모르겠어요. 결국 오다 주웠다는 식으로 툭 엽서를 아빠 책상에 올려두고 집을 나왔는데 그 순간이 참 길고 긴장됐습니다. 고백 편지도 아니고 아빠한테 쓴 편지인데... 아빠한테는 감동했다는 연락을 받았고 슬슬 연락을 주고받다가 이제는 둘이 밥도, 운동도 하고 있습니다. 곧 등산도 같이 갈 것 같아요. 


가끔은 굳게 마음먹을 때보다 자연스럽게 일상이 흘러가면서 풀리는 일들도 많은 것 같아요. 저도 어쩌다 보니 이런 모임에 들어오게 되었고 또 익명으로 편지를 적고 있네요. 편지봉투에 엽서 한 장을 넣어두었습니다. 제 편지를 읽으시는 분도 자연스럽게 주변 ‘어떤 이름에게’ 편지를 쓰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익명도 좋지만 정작 주변에 못 챙기고 있는 사람들도 많으니까요. 그리고 혹시라도 그 책을 읽고 싶으시면 저한테 말씀해 주세요 :) 


편지 쓰는 일은 항상 설레고 긴장됩니다. 편지를 전해줄 때뿐만 아니라 내용에 대해 생각할 때, 그 내용을 옮겨 적고 편지봉투에 정성스럽게 담을 때, 또 그 사람에게 전해지고 그 사람의 표정을 보기까지 가 참 긴 것 같습니다. 이번 책을 읽으면서 ‘짧으면 기다림이 아니다. 기다림은 기다랗다.’라는 구절이 와 닿아서 적어두었는데 저도 기다랗게 기다려보겠습니다.


어떤 이름에게.





나이가 들면 나에게도 친구가 몇 남지 않는 걸까. 그땐 이렇게 편지를 쓰고 싶어도 쓸 사람이 떠오르지 않을까. 미안해. 엄마의 현재를 두고 나의 미래를 생각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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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그런 생각을 해. 우리는 원하든 원치 않든 서로에게 유리병을 던졌던 게 아닐까 … 마주하는 모든 사람은 서로에게 한없이 병을 던지는 것 같아 … 이전에 내가 "나는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지 않을 거야. 그냥 생긴 대로 살래"라고 말했던 기억이 나. 그때 오빠가 "그래도 조금은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말해줬었는데 그 유리병이 오늘 내 근처에 와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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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어린 시절 어딘가에 데려간 얘기를 하며 "기억도 못 할 것을 왜 그렇게 열심히 데리고 다녔나 몰라" 말하곤 하는데, 나는 어딘가에 그 시간이 새겨져 있을 거라 믿어. 그 아이의 유년에도 오늘의 바다가 남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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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행복을 기다리는 모습이 귀여워서 그 얘기를 듣고 행복했다. 자신을 사랑하고 어떻게 해야 사랑하는 '나'를 행복하게 해 줄지 알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즐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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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고양이별로 돌아가기 전에 꼭 마당이 있는 집을 구할게. 그때가 오면 네 마음대로 떠나고 돌아와. 그때는 내가 그 집에서 가만히 앉아 너를 기다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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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이란 뭘까. 우리는 이름으로 만난다. 세상에는 수많은 '선아'가 있겠지만, 몇 번이고 나를 보며 내 이름을 부르다 보면 누군가에게 선아는 나로 기억될 수 있을 거다.



<어떤 이름에게 - 박선아> 20.08.14 완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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