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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ya Jan 25. 2022

시와 산책

한정원





같은 책을 다시 읽는 걸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다시 생각나는 책들이 있다. 책을 다시 읽기 위해서는 적당한 시간이 필요한데, 그 시간은 나한테 1년 정도다. 너무 일찍 읽으면 방금 들었던 말을 또 들어야 하는 것처럼 지루해지고 너무 늦게 읽으면 내용을 모두 잊어 초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책을 다시 읽는 것은 사람을 다시 만나는 것과도 비슷하다. 안에는 같은 내용을 담고 있지만 어느 상황에 만나느냐, 어느 주기로 만나느냐에 따라 다가오는 울림이 다르다. 사람도 너무 자주 만나면 힘겹고 오랫동안 안 만나면 어색한 것처럼.     

알고 지내던 사람한테 느낄 수 있는 편안함이 있듯이 읽었던 책에서 느낄 수 있는 편안함이 있다. 어떤 말을 할지 알아서 지루한 것이 아닌 어떤 말을 할지 알아서 편안해지는. 또 그 똑같은 말을 듣기 위해 서재 앞을 서성거린다. 나는 위로받고 싶었고 나다워지고 싶어서 시와 산책을 꺼냈다. 1년 전과 똑같은 이야기가 쓰여있었지만 그때는 줄 쳐놓은 문장의 배경처럼 보이던 글자들이 새롭게 떠올라 있었다. 몇 년 후에 다시 이 책을 만나면 어떤 글자들이 떠올라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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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마음 같은 길


“어느 책에서 봤는지 기억나지 않는 이야기 하나. 겨울에 말을 타고 언 강 위를 지나간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듬해 봄에 강이 풀리고 나자 그곳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강이 얼어갈 때 소리도 같이 얼어 봉인되었다가, 강이 풀릴 때 되살아난 것이다. 말도 사람도 진작에 사라졌지만, 그들이 있었음을 증명하는 소리가 남는 것.”


언 강이 소리를 봉인하듯 산책로는 감정을 간직한다. 나의 행복, 사랑, 고통, 외로움이 골고루, 그리고 구석구석 담겨있다. 그래서 난 산책을 늘 같은 곳으로 간다. 슬픔만 담기지 않게, 다른 마음에도 같은 산책로를 걷는다. 괴로움만 떠오르지 않도록. 같은 언덕을 봐도 벤치에 앉아서 나누었던 이야기가, 강아지와 산책했던 기억이, 혼자 책 읽던 날의 바람이 떠오를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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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네모난 이야기책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게 창문은 내 곁에, 네모난 이야기책 같은 것으로 있었다. 나는 눈을 반짝이며 창문이 들려주는 구연(口演)에 귀를 기울이는 아이였다. 내게도 진짜 책이 몇 권쯤 있었겠지만, 더 흥미진진한 건 늘 창밖에서 넘어오는 이야기였다.”


나에게도 창문은 많은 구연(口演)을 들려줬다. 뚝뚝 끊겨 이야기가 되지 못한 사람들의 소리부터 지금의 날씨에 대해, 계절에 대해 들려주기도 했다. 눈을 감고 그 이야기에 집중할 때도, 그림책을 보듯이 창에 걸린 구름들을 한참 바라보기도 했다. 그래서 따뜻한 계절에는 창문을 항상 열어두고 그 앞에서 시간을 보내는 걸 좋아한다. 하지만 겨울에만은 창문이 아닌 조금 더 작은 네모난 이야기책을 펼친다. 


추위를 유독 싫어해서 겨울에는 창문을 여는 일도 천천히 산책하는 일도 없어서 계절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을 일이 통 없다. 그럴 때 다른 계절에 담아두었던 이야기들을 내 네모난 휴대폰에서 꺼낸다. 봄에 담아둔 철없음을, 여름의 낙천을, 가을의 바삭거림을. 그래서 늘 산책을 하면 휴대폰을 챙기는 편인데 사진을 찍거나 녹음을 하다가 자칫 화면에 정신이 팔리는 위험도 있다. 하지만 그 작은 위협을 감수하면서도 그 계절을 꾹꾹 눌러 담는다. 그러다 그렇게 부지런히 주워 담은 것을 다른 계절에 펼쳐보면, 단지 어떤 계절이 아닌 그 순간의 나에게 데려다 주기도 한다.





사랑하는 것을 잃었을 때, 사람의 마음은 가장 커진다. 너무 커서 거기에는 바다도 있고 벼랑도 있고 낮과 밤이 동시에 있다. 어디인지 도무지 알 수 없어서, 아무 데도 아니라고 여기게 된다. 거대해서 오히려 하찮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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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을 겨울의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이 당연한 듯해도, 돌이켜보면 그런 시선을 갖지 못한 적이 더 많다. 봄의 마음으로 겨울을 보면, 겨울은 춥고 비참하고 공허하며 어서 사라져야 할 계절이다. 그러나 조급 해한 들, 겨울은 겨울의 시간을 다 채우고서야 한동안 떠날 것이다. 고통이 그런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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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엇도 하찮지 않다고 말하는 마음이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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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그렇게 빤하고 획일적이지 않다. 눈에 보이지 않고 설명하기도 어려우며 저마다 손금처럼 달라야 한다. 행복을 말하는 것은 서로에게 손바닥을 보여주는 일처럼 은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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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우월함을 드러내는 연민이 아니라, 서로에게 원하는 것이 있어 바치는 아부가 아니라, 나에게도 있고 타인에게도 있는 외로움의 가능성을 보살피려는 마음이 있어 우리는 작은 원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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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이 가장 뜨거운 달이 되어버린 것은 이처럼 절정과 쇠락을 모두 가졌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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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불처럼 일어서는 마음이었고, 이별은 불 때문에 끝내 사그라드는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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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다리가 나무처럼 굳어가고, 호흡이 가빠지고, 덜 보이고 덜 들리게 될 때, 나는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게 될까. 아껴 움직이고, 아껴 말을 하고, 아껴 보고 듣게 될까. 아껴 사랑하게 될까 아니면 사랑을 아끼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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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은 지나가지만 바다는 지나가고도 머문다. 바로 이렇게 변함없으면서도 덧없이 사랑해야 한다. 나는 바다와 결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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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방의 마음이라는 건 도대체 아침에도 낮에도 '저녁'같기만 하고, 나는 '저녁' 앞에서 노인처럼 어두운 눈을 비비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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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때는 창문을 닫고 두려워했고, 또 어느 때는 활짝 열어 지나가는 모든 행인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러니까 창문을 나의 마음처럼, 나의 말처럼 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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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어린 고양이들을 떠올려보기도 한다. 벌이 되었을까, 꽃이 되었을까, 중간이 되었을까. 무엇이든 아름답지 않은 것이 되었을 리 없을 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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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다가 죽어가는 벌레 곁에 있어주고, 창을 내다보는 개에게 인사하고, 고양이의 코딱지를 파주며 탕진하는 시간이 나는 부끄럽지 않다. 그 시간의 나는 진짜 '나'와 가장 일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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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차가운 돌 위에 올리는 꽃을, 사실 우리 자신에게도 주어야 한다. 꽃에서 서서히 물기가 마르고, 꽃잎이 열 장에서 두 장, 한 장이 될 때까지 바라보는 일을  우울하거나 쓸데없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시와 산책-한정원> 22.01.12 완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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