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로스의 종말> 책 읽고 <달팽이의 별> 다큐멘터리 보고
이번 주 수요일부터 핫하다는 독서모임 <트레바리>에서 두 개의 독서 클럽에 참여한다.
하나는 책 읽고 다큐멘터리 보며 감상을 논하는 <북큐멘터리>
하나는 IT 종사자로 너무 무뇌아가 되어가는 것 같은 자기반성 측면으로 <넥스랩101>
오랜만에 독후감이라는 것을 써 보았다. 기승전결을 고민하며.
사실 블로그에 끄적이는 글은 기승전결보다는 첫 문장을 일단 골라 쓰고 나머지는 그냥 끄적끄적 생각나는 대로 남기고 휙 닫다 보니 글 안에 생각은 난무하나 명확한 주제가 없는 경우가 많은데 (마치 지금처럼)
그런 주제를 고민하며 쓰다 보니 좀 더 딱딱하게 써지는 것 같고 동시에 힘이 더 들어가는 것 같기도 하다.
게다가 MS 워드를 여는 순간, 내 감상들을 정리하는 공간이 아닌 리포트를 쓰는 느낌으로 돌변~~...결과는 맨 아래와 같이 딱딱한 글이 탄생하게 되었다. (딱딱한 글은 맨 마지막에..)
이 공간은 일단 내 공간이니 느낀 점들을 끄적여보고 딱딱한 글은 밑에 붙여보려 한다...
이번 북 큐멘 터리는 두 가지 다른 형식의 같은 주제의 콘텐츠를 보고 독후감을 쓰는 것이었다.
책 <에로스의 종말 >by 한병철 + 다큐멘터리 <달팽이의 별> by 이승준
<에로스의 종말> 은 <피로사회>의 저자 한병철님이 쓴 사랑에 관한 책이다. 하지만 이 책은 사랑에 관한 책이 아니라 분노하지 않고, 저항하지 않는 사회 구성원들을 정신 차리라고 얘기하는 책에 더 가깝지 않나 싶다. "에로스"는 욕구에 의한 사랑이라고 아가페 VS 에로스 이런 이분법적 관점의 "에로스"를 윤리 책에서 먼저 접했다 보니 "에로스"하면 "욕구"부터 떠오르는 부분이 있는데, 이 책에서 에로스란 "타인을 내 마음대로 소유할 수 없음이자 이해할 수 없고 조종할 수 없는 완전히 분리된 대상, 그대로 존재해야 할 대상"으로 인지하고 내 자리를 내어주는 것, 자아를 버리는 것은 아니지만 이기심을 죽이고 그 자리에 타인에게 자리를 주는 것으로 오히려 나의 자리를 인지하는 것"이라 소개한다. (어려운 책이라 이렇게 이해하고 있는데.. 맞겠지...)
에로스를 잃은 사람은 나르시시즘에 의해 우울증을 겪는 사람이다. 자기에 대한 과도한 인지, 자기 확장으로 타인과의 관계를 상실한 사람. 이 것은 타인의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으로 연결되고 결국 사회는 동일자의 지옥으로 변해가며 궁극적으로 "분노"를 잃은 사회, 기존 체제를 엎지 못하고 답습하는 닫힌 사회로 귀결된다.
처음에 사랑에 대한 정의로 시작하지만 결국에는 사회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진다.
<달팽이의 별>은 시청각 장애인 남자와 척추장애를 앓고 있는 한 여자의 결혼 생활을 조용히 관찰한 다큐멘터리이다. 두 사람이 한 사람은 눈이 되어주고, 한 사람은 긴 다리와 손이 되어 주어 서로 의자하고 소박하게 한 편으론 치열하게 사는 모습을 보여준다.
남자는 눈과 귀가 제 기능을 상실했지만 일단 글을 쓰고 말을 할 수 있으며 점자로 책을 읽고 공부할 수 있다. 화면 중간중간 그가 쓴 시가 그의 목소리와 함께 낭송이 되는데 정말 인상적인 글귀들이 많다. 그는 자신을 "우주인"이라고 표현하는데 정말 우주 한가운데 있듯이 눈과 귀가 고요한 상태에 머무른 느낌을 답답한 상실을 토로하지 않고 담담히 비유하고 있었다.
그의 친구들이 왁자지껄 떠들며 "형은 어떻게 결혼했어?"라고 묻자 "나는 준비가 되어 있었지" "나는 외로웠어"라고 얘기할 때 이 다큐멘터리의 주제가 나왔는지도 모르겠다. 그 이후 이어지는 그의 시가 참 좋다.
외로울 땐 외롭다고 하여라
피하여 달아나지 말고
돌이켜 뛰어들지 말고
그저 외롭다고만 하여라
어둠은 짙어야 별이 빛나고
밤은 깊어야 먼동이 튼다
이 두 콘텐츠는 동시에 사랑이란 "내"가 아니라 "너"를 바라보고 "내 일부"라도 내어주는 것이라 말한다. 외로운 빈자리를 서로 인지해주고 보듬어주는 것.
이런 고민을 쉬이 할 기회가 없었는데 다가올 수요일에 다른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지, 어떤 이야기가 오고 갈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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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
사랑을 잃어가는 시대에서 사랑의 정의를 되짚어보기
30대 직장인에게 사랑은 하나의 중요한 테마로 많은 대화가 이뤄진다. 그리고 그 담화 속에서 내가 상대방을 어떻게 인정하고 바라보고 사랑하느냐 보다 어떤 “스펙”의 사람을 만나 어떻게 나의 밟아온 인생이 흐트러지지 않게 존속될 수 있느냐를 더 고민하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에로스의 종말>을 읽고 나면, 면접 보듯 기준에 맞춰 배우자를 고르는 과정이 만연하게 된 지금 “사랑”의 진짜 의미를 되짚어보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작업이라 볼 수 있다. 그것은 책에 나오듯 죽음, 상실을 두려워한 채 현상 유지에 급급한 삶을 살 것인지 아니면 나를 나답게 살아갈 수 있게 바라보고 인정해줄 타인과 함께 죽음 속에서 생동감을 갖고 살 것인지를 결정한다. 나아가 사회의 관점에서 기존의 틀에 갇혀 불평만 내뿜는 단계에 머무를 것인지, 아니면 “에로스”의 원동력으로 분노로서 기존의 틀을 엎을 것인지의 문제로까지 나아간다.
다큐멘터리 <달팽이의 별>의 주인공의 삶은 에로스가 살아있을 때를 보여주는 예시와 같다.
남자는 앞을 보지 못한다. 여자는 키가 작다. 앞을 보지 못하는 그에게 눈이 되어 밥을 차려주고, 길이 되어준다. 남자는 키가 작은 그에게 긴 손과 다리가 되어준다. 남자와 여자는 서로가 같이 사는 순간 이전의 삶의 방식과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에로스가 이끈 혁명과도 같다. 나의 부족함이 타인의 역할을 자연스레 인정하고 받아들여 육체적, 정신적인 고통이 수반되지만, 동시에 그것이 상대방에게는 구원과 같다. 책에서 표현하 듯 내가 죽고, 타인의 자리에서 나를 발견하는 선물을 누리고 있다. 둘 사이의 에로스의 원동력은 주변 친구들에게 전파된다. 더 나아가 역설적으로 그들은 오히려 눈이 보이는 “비"장애인 배우들에게 시각 장애인의 행동을 연기하기 위한 자문 역할을 하듯, 이 다큐를 보고 있는 관객들에게 사랑을 가르쳐준다.
안타깝게도 소위 장애인이 아닌 일반인들에게 에로스는 더 실현되기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눈과 귀는 많은 데이터에 노출되어 타인을 수수께끼의 존재로 보기보다 확인하기 쉬운 배경 그대로 이해해버린다. 매체와 포르노에 노출되어 사랑에 왜곡된 생각을 하기도 하고 나아가 에로스가 우리의 충동, 이성, 용기를 지배할 수 있는 “사유의 시간”을 확보하기도 녹록지 않다. 혹은 생각할 의지가 부족하다. 그리고 타인이 내 외로움의 존재를 그대로 봐주기 원하는 동시에 내 외로움이 노출되는 것을 꺼려한다. 이 것 또한 저자가 말하는 나르시시즘의 문제일 수 있다.
저자가 말하는 혁명적 에로스를 이 사회에서 실현하자니 그것은 너무 멀게만 느껴지니 내 개인의 에로스라도 지켜보면 어떨까 한다. 일단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이 제안하듯 우주인이 되어보는 시간을 가져볼까 한다. 사유의 시간에서 나의 외로움은 어디쯤 자리 잡고 있는지 그리고 나와 다른 타인을 이해할 수 있음의 없음부터 연습부터 시작해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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