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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채 Nov 29. 2020

한나, 한백희, 박혜정_①

80대 한나, 50대 한백희, 20대 박혜정

Hanna's House


 도시라는 말을 가져다 붙이기에 이 도시는 너무 작다. 도시라는 말에 가려 정작 이 도시가 보이지 않을 만큼. 관광객들이 이곳을 찾는 이유도 도심에서 1시간 반 거리에 있는 호수, 호수 위에 성당 하나를 이고 떠 있는 아주 작은 섬때문이다. 시내 관광과 근교까지 거리를 감안해 4일 정도는 머물러야 하지 않을까ㅡ라는 생각으로 호기롭게 이 도시를 찾은 관광객들은 보통 비슷한 여정을 보낸다. 정말 섬 하나뿐인 호수에 실망한 채 하루, 볼 거리를 찾아 시가지를 서성이다 하루, 지루함에 지쳐 찌뿌둥한 몸뚱아리를 배배 꼬다 하루. 이렇게 3일을 보내고 난 뒤 떠나는 날이면, 체크아웃 시간이 채 되기도 전에 '숙소비가 싼 데는 다 이유가 있었어'라고 읊조리며 서둘러 기차에 올라탄다. 하지만 대학생이었던 나는, 이 작고 별 볼 일 없는 도시에 반 년을 머무르면서도 시간이 가는 게 아쉬웠다. 예나 지금이나 한 손에 잡히는 이 정도 크기의 공간을 선호한다. 이 정도 크기의 도시가 나만한 크기의 사람에게 딱 적당하다.


 집을 나와 내 보폭으로 스무 발자국 정도 지름을 가진 원형 광장으로 향한다. 어린 아이가 동그란 태양 가장자리에 그린 머리털처럼, 수 십개의 다리들이 광장에서부터 쭈뼛쭈뼛 뻗어나간다. 길이도, 폭도, 간격도 전부 다른 다리들 중 남서쪽으로 난 가장 큰 다리를 건너 골목으로 들어선다. 십자수 가게와 음반 가게, 비탈길에 찻주전자를 진열해둔 그릇 가게를 지난다. 가게와 가게 사이에는 실핏줄처럼 가느다란 공간이 있고, 그 사이로는 방금 지나온 다리와 그 밑으로 흐르는 강이 보인다. 비좁은 공간을 통과하느라 빛이 한 줄기로 뭉쳐져 비좁은 골목이 유난히 밝다. 

 지날 때마다 한 번씩 바라보는 골목들을 지나, 성 밑자락에 자리한 빌라 앞에 선다. 내 키의 두 배쯤 되는, 막막하리만치 높은 문을 간신히 열고 들어서, 하얀 시멘트칠이 된 나선형 계단을 올라간다. 빌라 꼭대기에 있는 이층집 앞에 멈춰 현관문을 연다. 여느 때처럼 이 집 다섯 번째 반려견인 제시가 달려들어 이곳저곳을 핥아댄다 30년 된 소파 위로 돌아간다. 그리고 그 옆엔, 한나가 앉아있다.


"한나, 나 왔어요. 현관문은 위험하게 왜 맨날 열어둬요? 좀 잠그라니까."
"오랜만에 왔구나. 여기 앉아라."


 테라스가 보이는 창문 앞. 그곳이 한나의 고정석이다. 한나는 자신만큼 나이를 먹은 나무의자에 앉아 나무의자와 세트인 게 뻔한 나무식탁에서 가계부를 쓰거나, 유투브를 보곤 한다. 한나는 이 도시에서 사적으로 관계를 이어가는 유일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녀와 많은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 한나는 알았다. 내가 당신의 집에 들르는 건 견디기 힘들 만큼 외로워서라는 걸. 하지만 그게 누군가와 게임을 하거나 수다를 떨며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뜻은 아니라는 걸. 그저 한 공간에서 같은 공기를 마시고, 서로가 내뱉은 이산화탄소를 삼키며 달그락, 부스럭, 백색소음을 내줄 사람이 필요해서라는 걸. 한나는 이토록 이기적인 침입자에게 여느 때처럼 큼직한 찻잔에 물을 한 가득 담고, 히비스커스-체리 티백을 넣어 가져다 준다.


"고마워요, 한나."
"나는 잠깐 낮잠을 잘테니 있을 만큼 있다 가라."


 한나는 집 안 어딘가에 있는 방으로 들어가 거실을 온전히 내게 맡긴다. 이 집에는 현관문이 3개, 방이 10개다. 그래서 아직도 이 집이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완전히 알지 못한다.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공간은 거실, 주방, 화장실, 현관문, 그리고 가끔 자고 가는 손님방 하나뿐이다. 아직도 이 집에 모르는 공간이 있다는 사실이 되레 안정감을 준다. 한국을 떠났던 이유가 너무 잘 아는 것들로부터 벗어나기 위함이었으므로, 이 곳에서 또 다시 너무 잘 아는 것들을 만든다는 건 모순적이었다. 한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나는 한나에 대해 10%도 알지 못한다. 그리고 그게 한나와 친구가 될 수 있는 이유다.


Hanna(80), Woman, Poland


 이 도시에서 지낼 셋방을 구하기 전, 잠시 머물던 에어비앤비의 호스트로 한나를 처음 만났다. 호스트와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며 정을 쌓는 건 당시 뚜벅이 여행자들의 로망이었다. 하지만 고국을 버린 이방인의 마음으로 이 도시를 찾은 내게는 발화 자체가 에너지 소모였다. 당시의 나는 지금보다 몇 배는 더, 지쳐있었기에. 하지만 영어가 잘 통하지 않는 나라에서 영어로 집을 구하러 다니는 젊은 동양인 여자를 끌어다 앉혀놓고 차를 권하는 할머니를 매몰차게 거절할 순 없었다. 나의 조부모와 마찬가지로 80세를 바라보던 한나는, 저예산으로 집을 구하느라 온종일 발품을 팔다 들어온 내게 매일밤 당신의 지나온 인생을 이야기했다. 


 대략 일주일 동안 들은 그녀의 삶을 요약하자면 이랬다. 폴란드 태생인 그녀는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태어나 20세기 후반 보기 드문 여성 음악감독이었다. 유럽 전역을 돌며 탄탄하게 커리어를 쌓아가다, 느즈막히 만난 남편과 이 도시에 정착했다. 그 때부터 살기 시작한 이 집에서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낳았고, 아이들이 학교를 졸업하고 결혼을 하는 모습을 이 집과 함께 지켜보았다. 12년 전 먼저 생을 마감한 남편의 죽음까지도. 한나의 인생사를 줄줄이 듣고 난 뒤 은은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한나 앞에서, 나는 항복하듯이 엄마의 이야기를 꺼내 놓을 수밖에 없었다.


한백희(55), Woman, South Korea


 한백희는 남자형제만 셋이었다. 위로 한 명, 아래로 두 명. 그러니 3남에게는 잔인하리만치 엄했던 아버지도 한백희에게는 한없이 다정하고 연했다. 오빠동생 할 거없이 온 가족이 백희를 챙겼다. 밤 늦게 집에 돌아오는 날이면 가족들 중 꼭 한 명은 한참 떨어진 버스정류장까지 기꺼이 백희를 마중나갔다. 넉넉치 못한 형편에 가끔 닭볶음탕이나 갈치조림이라도 식탁에 올라오면, 아버지는 항상 살이 가장 통통하게 오른 갈치 몸통, 닭다리를 백희의 밥그릇에 얹어주었다. 그런데도 남자형제들은 백희를 시샘하지 않았다. 백희는 사랑받는 홍일점이었으니까. 하지만 사실 백희는 홍일점이 아니었다. 백희의 엄마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자고로 홍일점이라고 불리려면 나이가 젊어야하는 법이었다.


 백희의 엄마는 본인이 백희 이름을 지어놓고도 백희를 백희가 아닌 '온갖 년들'로 명명했다. 쉬는 날 나물 다듬는 일 하나 돕지 않는 못된년, 출근길에 급히 벗어둔 빨랫감을 주말이 되어서야 몰아서 내놓는 망할년.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욕을 하면서 백희가 부엌 근처라도 가면 그렇게 성을 냈다. 어차피 시집가면 할 일을 뭣하러 빨리 배우려고 하냐며. 그러니 백희는 집안일을 돕지도, 편히 쉬지도 못하고 엄마가 하는 욕을 고스란히 들어야만 했다. 덕분에 백희는 29살, 당시로서는 늦은 나이에 시집을 갈 때까지 라면끊이는 법조차 몰랐다. 백희에게는 사랑을 넘치게 받은 사람에게서만 풍기는 햇살 냄새가 났다. 따듯하고 깨끗한 냄새. 백희는 화장을 하지 않아도 낯빛이 화사했고, 165cm가 넘는 키에 타고나기를 날씬한 체질 덕에 거적떼기를 걸쳐도 옷태가 났다. 백희는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호방하게 웃을 줄 알았고, 너무 맞는 말이라 듣기 싫은 말도 기분 나쁘지 않게 할 줄 알았다.

 

*


 1994년, 백희는 4남 1녀의 장남과 결혼을 했다. 남편의 나이는 32살, 선으로 만난 두 사람은 처음 만난지 6개월 만에 '번갯불에 콩 구어먹듯이' 식을 올렸다. 그 때부터 백희는 밥을 앉히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백희는 그동안 해본 적도, 할 필요도 없었던 것들을 하나씩 해 나가기 시작했다. 시장에서 흥정해 사온 나물들을 깨끗이 씻어내 다듬었다. 엄마를 괴롭혀 김치찌개 끓이는 법을 알아내 수첩에 적어놓고, 엄마의 손맛을 상상하며 순서대로 돼지고기 김치찌개를 끓여냈다. 딸들도 둘이나 낳았다. 회사원에서 전업주부로 이직을 했으니, 아이는 당연히 낳아야하는 거였다. 백희는 두 딸들을 살뜰히 키워냈다. 이직한 직장이 잘 맞아서 다행이었다. 주변엔 산후 우울증으로 고생하는 지인들도 많았지만 백희는 아이들이 너무 예뻤다. 엉금엉금 기어와 자신의 품에 폭-하고 안기는 첫째딸을 바라보며 백희는 다짐했다. 이 아이가 언젠가 아이를 낳으면, 반드시 자신의 손으로 키워줘야겠다고.


 백희는 아이들을 키우며 남편과 함께 마트를 운영했다. 대부분의 자영업이 그렇듯이 남들이 쉴 때는 일해야 했고 남들이 일할 때 쉴 수 있었다. 특히 명절은 대목이라, 시댁에 미리 가서 음식을 준비할 수 없었다. 시댁에 가면 백희는 밥 한 그릇을 다 먹지 못했다. 눈칫밥을 먹어 이미 배가 잔뜩 불렀으므로. 친정과 달리 시댁은 남녀가 겸상을 하지 않았다. 넓고 음식이 가득한 상에는 남편의 형제들과 시부모, 그리고 '손자'들이 앉아식사를 했다. 큰 상에 앉은 식구들이 음식을 찾는 소리가 차츰 잦아들기 시작하면, 남은 음식들을 중구난방으로 쌓아올린 작은 상에서 여자들이 '여자아이'들을 옆구리 낀 채 엉겨붙어 식사를 했다. 인기가 많은 불고기는 한 접시였고, 인기가 없는 도토리묵은 세 접시였다. 작은 상에 앉은 사람 숫자가 훨씬 많았지만, 누가 식사를 하는 상인가에 따라 반찬 구성이 달랐다. 백희는 큰 상에서 식사를 하는 유일한 여자인 시어머니를 보며 생각했다. 내 자식의 자식이 세상에 나와야 나도 저 자리에서 편하게 밥을 먹을 수 있는 거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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