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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채 Dec 13. 2020

한나, 한백희, 박혜정_②

80대 한나, 50대 한백희,  20대 박혜정

박혜정(25), Woman, South Korea


 한백희가 죽은 뒤, 서울에서 대학생활을 하던 한백희의 딸들은 자연히 엄마가 전담했던 본가의 집안일을 어떻게 분담할 것인가를 두고 내내 고민했다. 결론은, 서울에서 취업준비를 하고 있던 첫째딸 혜정은 격주로 고향에 내려오고, 아직 대학생인 혜인이 틈틈이 고향과 서울을 오가며 집안일을 처리하는 거였다. 사실 둘째딸 혜인은 언니가 더 자주 고향에 내려오기를 바랐다. 온 가족이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키웠던 혜인으로서는 갑자기 떠맡게 된 상황이 버거웠다. 하지만 혜정은 격주로 고향에 내려가는 것 자체가 부담이었다. 혜정에게 남은 가족은 지키고 보살펴야할 존재였다. 그래서 가족이 아닌 친구들에게 의지하고, 친구들에게 보살핌을 받았다. 마음놓고 무너질 수 있는 것도 가족들 앞이 아닌 친구들 앞이었으므로, 최대한 고향을 피하고 싶었다.


*


 자매에겐 '아빠가 알아서 집안일을 한다'는 선택지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아빠는 일을 하고 있었으니, 당연히 혼자 집안일을 처리할 수 없을 거였다. 혼자 남겨진 아빠를 모르쇠 하는 건 도리가 아니었다. 남는 시간만큼은 푹 쉬어야 하니까. 한백희가 빠진 가족은 이빨이 맞지 않는 톱니바퀴였다. 그래서 톱니바퀴 하나가 섣불리 구르기 시작하면 다른 톱니바퀴들은 이가 깨지거나 갈려나갔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바퀴 하나가 움직이면 별 수 없이 함께 굴러가야했다. 생계를 위해 일을 나간 아빠에게 맞춰 여기저기 생채기를 내며 어거지로 굴러가는 혜인과 혜정을 보며, 명절날 만난 친척어른 한 명은 말했다. 


"그래도 다행이야. OO이에게 아들이 아니라 딸들이 있어서."

  

 그 분의 눈빛은, 뭐랄까, 수학경시대회에서 1등을 한 손자를 대견하게 바라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필요 이상으로 다정한 그 눈빛 앞에, 혜정은 머쓱해졌다.


 백희의 죽음은 혜정에게 닥친 가장 큰 재앙이었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평생 단단할 거라 생각했던 땅바닥이 맥없이 푹 꺼져버린 기분이었다. 그렇게 무너져 내린 세상에서, 혜정이 가장 먼저 일으키기로 한 건 아빠와 혜인이었다. 백희를 잃은 적 없는 사람처럼 혜정은 씩씩하고 밝게 행동했다. 혜정은 남겨진 세 명이 상판 하나를 떠받치고 있는 탁자 다리라고 생각했다. 다리가 하나라도 무너지면 절대 탁자가 서있을 수 없으므로, 아빠와 혜인이 주저앉지 않도록 꽉 움켜쥐고 있어야 한다고. 혜정이 무너진 세상을 수습하는 방법이었다. 붕괴해버린 지반을 다시 다질 순 없어도, 아직 무너지지 않은 하늘만큼은 제대로 떠받치고 있어야 했다. 혜정은 백희를 잃은 후, 매일을 투쟁하는 마음으로 살았다. 망국을 일으켜보려 애쓰는 왕처럼, 빼앗긴 조국을 한 평이라도 되찾으려는 투사처럼. 그런데 친척어른의 말은, 지옥같은 투쟁을 한 순간에 죽은 백희의 역할을 고스란히 물려받는 것으로 단촐하게 정리해버렸다.


 한나에게 전한 나의 이야기는 여기까지였다. 한나에게 내 인생의 극히 일부만을 떼어 보여준 셈이었다. 하지만 내심, 고작 그 몇 개월에 잠식당해 이 도시까지 도망쳐온 자신을 한나가 알아봐주기를 바랐다. 한나가 내준 차 한 잔을 거의 다 마셔갈 때 ,쯤 한나가 외출복 차림으로 제시를 불렀다. 언젠가부터 전용소파에서 내려와 내 발 밑에 앉아있던 제시는 주인에게 꼬리를 흔들며 달려간다.


"프랑크푸르트에 한 일주일 갔다와야 할 거 같다."

"이바나 보러 가시는 거에요?"

"응, 이바나가 이번주 주말에 특강을 하게 되서 손주들을 봐줘야 할 것 같다.
여기서 프랑크푸르트까지 한참 걸리니까 지금 출발해야 할 거 같아."


 이바나는 한나의 둘째 딸이다. 전해 듣기로 이바나 역시 영화감독으로 일하고 있다고 했다. 가끔 대학 연극영화과에서 특강을 하곤 하는데, 이번 주말에 갑자기 특강이 잡힌 모양이었다. 이바나에게는 이제 막 유치원생이 된 딸 하나, 초등학교에 갓 입학한 아들 하나가 있었다. 이바나의 남편도 비슷한 업계에서 일을 하다보니 주말에도 일정이 있는 경우가 많은데다가, 베이비시터를 구하지 못해 한나에게 연락이 온 모양이었다. 그간 한나의 집을 들락거리며 지켜보니 못해도 두 달에 한 번은 프랑크푸르트에서 연락이 오는 것 같았다. 한국이나 유럽이나 맞벌이 부부가 자식 둘을 부모 도움없이 키우기는 힘든 모양이었다. 주인이 없는 집에 계속 남아있을 순 없어 한나를 따라 집을 나온다. 이젠 80살이 넘어버린 한나가 제시를 태우고 골목을 빠져나가는 걸 배웅한 뒤, 아침에 걸어왔던 길을 따라 고스란히 되돌아간다.


*


 3층에 있는 집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갑자기 핸드폰이 울린다. 모르는 번호라 조금 찝찝했지만, 궁금증을 이기지 못해 전화를 받아보기로 한다.


"여보세요? 죄송하지만 누구신가요?"
"오랜만이다. 나야, 김대환."


 그동안 먼저 전화를 한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용기내어 걸었던 무수한 전화들에 한 번도 대답해주지 않았던 사람이었는데, 왜 연락을 해온건지 알 길이 없었다. 심지어 국제전화가 아니었다. 당황스러웠지만, 굳이 감정을 드러내고 싶지 않아 최대한 태연하게 대해야겠다고 생각한다.


"정말 오랜만이네. 무슨 일로 전화했어?"
"지금 OO에 살고 있다는 소식 들었어. 사실 지금 OO에 출장을 나와있거든. 내일모레 한국에 돌아가는데, 혹시 시간되면 잠깐 얼굴이라도 볼 수 있을까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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