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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채 Sep 26. 2020

그 순간은 오롯이 자신의 것이 된다

재훈에게 부고 문자를 받았다.

부고 문자를 받았다


 퇴근하고 나니 공기가 푸르스름하다. 물먹은 구름이 얄갑게 깔린 초저녁 하늘이 공포영화처럼 시퍼렇게 물들어 있다. 발목까지 내려오는 카키색 트렌치 코트 앞섶을 움켜쥐고, 잰 걸음으로 집으로 향한다.

 커피포트에 물을 채운다. 바싹 마른 낙엽처럼 건조한 날씨때문에 집에 돌아오자마자 차를 끓여먹는 습관이 생겼다. 끊여낸 물을 머그잔에 옮겨담고, 레몬진저티 티백을 가볍게 담가 2층으로 올라간다. 2층 다락엔 손님용 침대가 하나 있다. 창문을 마주하고 있는 침대 끝자락에 걸터앉으면 선로 위로 화물을 잔뜩 실은 기차가 다리를 건너고, 족히 20년은 되어 보이는 나이트 클럽과 허름한 모텔이 보인다. 안에 사람이 있으면 더 무서울 것 같은 나이트 클럽은, 일년에 사나흘 정도 불이 들어오고 쿵쿵거리는 음악소리도 새어나온다. 저 나이트클럽을 운영하는 사람은 엄청난 부자거나, 아니면 잃을 게 없는 사람일거라 생각한다. 호텔인지 모텔인지 모를 다른 건물엔 과연 투숙객이 있기나 할까 싶지만, 매일 서로 다른 두 세개의 방에는 불이 들어온다. 그렇다고 저 안에 들어가보고 싶진 않지만.


 이렇게 스러져가는 건물들을 내다본지도 3년이 넘어가지만, 아직도 정확한 운영시간은 알지 못한다. 사실 딱히 알고 싶지도 않다. 무언가에 대해, 혹은 누군가에 대해 깊게 알고 싶지 않아 한국을 떠나왔다. 물건을 사는 법이나 세탁기를 돌리는 법처럼, 오롯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것들만 알고 싶었다. 한국엔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속사정을 알아버린 것들이 너무 많았다.


 차를 다 마셔갈 때 쯤, 진동이 울려 핸드폰을 열어보니 문자 한 통이 와있다. 재훈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부고 문자다. 한국까지 10시간도 넘게 걸리는 이 나라에서 당장 부산에서 열리는 장례식에 가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재훈도 모를리 없다. 그럼에도 재훈이 부고문자를 보낸건, 자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내가 남의 입을 통해 들으면 노발대발 하리라는 걸 너무 잘 알기 때문일 거였다.



재훈의 '그' 순간


 엄마를 화장시킨 날, 재훈을 비롯한 대학 동기 다섯이 서울에서 입관을 도와주러 내려왔다. 화장터 건물 안에 휴게실이 있었지만 그곳에 있고 싶지는 않았다. 거기엔 내가 감당하기엔 너무 많은 소리들이 있었다. 외삼촌의 울음소리부터 동생이 흐느끼는 소리, 외할아버지의 한탄소리, 친인척들이 수군대는 소리, 사촌동생들이 뛰노는 소리, 나를 찾는 소리, 다른 누군가가 화장터에 도착하는 소리, 그 지인들의 울음소리, 그 집안의 또 다른 아이들의 웃음소리, 누군가의 화장이 끝났다는 안내방송, 엄마의 화장이 몇 분 남았다는 안내방송, 곧 누군가의 화장이 시작될 거라는 안내방송.


 대신 화장터 주차장 옆에 설치된 작은 정자로 향했다. 화장터와 꽤 거리가 멀어 곡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상주에게 무수한 소리로부터 피신할 장소가 필요하다는 걸 화장터 직원들은 알고 있었던 게 아닐까 생각했다. 초여름 아침 7시, 쨍한 햇볕과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동기들과 레쓰비를 나누어 마셨다. 밤새 술을 퍼마시고 첫차를 기다리는 신입생처럼, 우리는 실없는 소리를 내뱉기 시작했다. 나도 덩달아 실없는 소리를 했고, 피식피식 웃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웃음이 난다는 사실이 경멸스러웠지만, 경멸스럽더라도 조금 웃고 싶었다. 그러다 재훈이 말했다.


"나 시험공부 하다가 밤새서 운전해 내려온 거 알지? 나한테 잘해라."
"저 새끼는 꼭 생색을 내야 직성이 풀리나보다."
"아냐, 생색내도 돼. 너희들 경조사엔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꼭 갈게."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재훈의 능글맞음에 동기들이 눈을 흘기며 한 마디씩 던졌다. 그럼에도 재훈은 꿋꿋이 생색을 냈고, 나는 그런 생색이 사랑스러웠다. 엄마가 돌아가신지 한 달 쯤 되었을까, 입관식 날 내려왔던 유일한 여자 동기 은서와 대화를 하다 재훈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


"걘 변하지도 않아. 그런 상황에서도 생색을 내고. 덕분에 웃었지 뭐."
"그 때 재훈이가 너 납골당가는 버스 태워 보내고 서울 올라오는 길에 그러더라.
이렇게 자기가 생색을 내야, 나중에 니가 덜 미안해 한다고."


 언젠가 꼭 그의 생색에 보답해주고 싶었는데, 부고 문자에 답신을 할 용기조차 나지 않는다. 고인이 되신 아버지의 명복을 빈다는 말을 담기에, 약속을 지키지 못해 미안하다는 마음을 담기에 문자는 너무 빠르다. 때로는 그 속도가, 속도를 타고 가는 말을 가벼워보이게 한다.

 그 대신 재훈에게 오늘은 어떤 날이었을지 상상한다. 아버지가 작고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그 순간, 재훈이 무엇을 하고 있었을지, 재훈의 기분이 어땠을지 상상하며 함께 아프기로 한다. 평생 곱씹게 될 그 순간, 곱씹을 때마다 아찔해질 그 순간 만큼은 어떤 위로의 말을 듣더라도 결국은 혼자 견뎌내야 하니까.


 

나의 '그' 순간


 한 학기 내내 골머리를 앓던 전공 논문을 제출하는 날이었다. 논문 하나는 써야  전공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어ㅡ라는 치기어린 마음에 신청한 이 강의때문에 한 학기를 빚쟁이에 쫓기는 기분으로 살았다. 논문을 제출하면 비로소 빚을 청산한 기분이 들 것 같았다. 동생의 생일이기도 했다, 그 날은. 대학이 가깝다는 이유로 좁아터진 원룸에서 복닥거리며 산 지도 3년이 넘어가고 있었다. 개같이 싸우다가도 둘 사이에만 통하는 농담을 주고 받는 흔한 자매 사이. 그런 진부한 사이가 난 항상 좋았다.


 학교에 도착해 여느 때와 같이 노트북을 펼치고, 가져온 텀블러를 꺼내두고 자세를 잡았다. 논문을 한 페이지쯤 읽었을까, 동생에게 전화가 왔다. 보통 동생은 쓸데없는 일들로 전화를 걸었다. 자신의 카톡을 빨리 확인해달라는 경우가 많았는데, 막상 카톡을 보면 웃긴 사진, 사고 싶은 옷가지, 혹은 자신의 셀카 따위가 와있었다. 방금 막 엉덩이를 붙이고 앉은 참이라 전화를 받기 귀찮았지만 이번엔 또 무슨 허망한 얘기일까 싶어 전화를 받았다. 동생은 울고 있었다. 삐죽삐죽 울먹이는 목소리가 아니라,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겁에 질린 채 울음이 터진 말투였다.


"언니 엄마가 쓰러졌대."


 놀랍지 않았다. 살면서 엄마가 쓰러진 적은 없었지만, 쓰러진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과로한 상태였다. 외할머니의 장례가 며칠 전이었다. 잠이 많은 사람이 밤을 새며 상주 노릇을 했으니 일주일을 쉬었다 해도 지칠만 했다. 과로가 아니라면, 심해봤자 뇌출혈일 거였다. 고혈압이 집안 내력이고, 외할머니도 뇌출혈로 쓰러지셨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아직 확실한 게 아무것도 없었다. 여기까지 생각을 마치고 나니 짜증이 났다.


"왜 누가 죽은 것도 아닌데 그렇게 울고 그래? 누구 죽으면 그 때 가서 그렇게 울어. 지금 갈테니까 같이 집에 내려가보자."

 그 말은, 사실 내가 울 때마다 엄마가 했던 말이었다. 그런 순간들이 있다. 그 사람의 말과 행동들이 내 속에 고스란히 남아있음을 깨닫게 되는 순간들. 그래서 아무리 발버둥쳐도, 별 수 없이 그들의 딸이라는 사실 앞에 무릎꿇게 되는 순간들.


 자취방이 있는 빌라 앞에 다다랐을 때, 동생에게 또 전화가 왔다. 15분 거리를 걸어오는데 전화만 몇 번째인지 몰랐다. 지긋지긋한 기분으로 전화를 받았다.

"왜 또."
"언니, 엄마가 죽었대."

 오후 6시쯤, 엄마의 핸드폰에 저장된 번호를 내 핸드폰으로 하나하나 옮겨가며 엄마의 지인들에게 부고 문자를 보냈다. 생각보다 오래 걸리지 않았다. 가족을 빼면 지인이라고 부를만한 사람들이 스무 명도 채 되지 않았다. 엄마의 세상은 그만큼 단촐했다.


그 중 몇 명에게는 전화가 걸려왔다.

어떤 분은 점잖게 물었다.

"얼마 전에 백희 어머님이 돌아가셨다는 부고 문자를 받았는데 비슷한 문자가 또 와서요. 문자가 잘못 온 거 같아요."

 

어떤 분은 다짜고짜 귀청이 떨어지게 소리를 질렀다.

"우리 백희가 왜 죽어요 도대체?"


그 때 마다 나는 같은 말을 반복해야했다.


"저희 엄마 부고가 맞습니다. 얼마 전에 외할머니가 돌아가셨고, 이번에 보내드린 문자는 저희 어머니 한백희씨 부고 문자에요."


 그 뒤로도 몇 명 더 전화를 걸어왔다. 각자 다른 말투와 다른 감정으로 통화를 시작했다. 하지만 하나같이 자신이 누구인지 밝히지 않아 지금도 내가 누구와 통화를 했었던 건지 알지 못한다. 그들도 많이 놀라서 그랬을 거다. 그들과 내가 생판 모르는 남이라는 걸 미처 인지하지 못할만큼. 눈코입이 그려지지 않는 이들의 질문에 하나하나 답해가며,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엄마는 죽었다. 그건 이해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어떤 현실은 이해할 필요도, 이해가 가능하지도 않다. 그냥 그렇게 된 거였다.


*


 외할머니 장례식이 끝난지 열 흘 째 되는 날이었다. 외할머니의 장례식 날, 장례식장 사무실에서 수의를 갈아입으며 유골함, 수의, 상복, 영정사진을 넣는 액자, 그리고 그것들의 가격표를 찬찬히 훑어봤었다. 알아두면 언젠가 쓸모가 있겠지 싶어서. 이렇게 빨리 써먹게 될 줄은 꿈에도 물랐지만.


*


 장례식장이 결혼식장만큼이나 자본주의적인 곳이라는 걸 그 때 알았다. 휴지 한 장, 나무젓가락 하나 쉽게 내어주지 않았다. 조문객들 식사 준비를 도와주는 아주머니들은 나만 보면 상냥한 미소와 함께 음식이 부족할테니 좀 더 주문해야 한다고 속삭였다. 그 때마다 어물쩡 넘어가며 속으로 생각했다. '아마 부족하지 않을 거에요. 우리 엄마는 친구라곤 가족밖에 없는 사람이에요. 취미생활 하나 없었던 사람이니, 올 사람이 많이 없습니다.'


*


 장례식장에 장례비용을 모두 지불하지 않으면 엄마를 데려갈 수 없었다. 3일째 되는 날 일찌감치 화장터로 가려면 그보다 더 일찍 조문객들이 두고 간 조의금을 세고, 장례비용을 계산하고, 환불해야 할 물건들의 목록을 정리해야했다. 언젠가 특수청소부가 쓴 에세이에서, 자살현장 처리 비용이 얼마나 되는지 문의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이 있었다는 글을 읽었던 게 떠올랐다. 죽는 데도 돈이 필요한 세상이다. 문자를 받았다.


 결국 재훈의 그 순간을, 단 1%도 상상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재훈이나 다른 동기들에게 연락을 해서 그의 아버지가 어떤 이유로 세상을 떠나셨는지, 그래서 재훈이 임종은 지키기라도 했는지, 나서서 들춰볼 자신이 없었다. 결국, 그 순간은 오롯이 자신의 것이 되는구나.


 해가 선로 뒤로 넘어가자 오래된 호텔에 불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오늘은 2층에 1개, 3층에 2개 창문에서 불빛이 새어나왔다. 호텔에 불이 들어오자, 저녁을 먹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몇 모금 마시지 못한 차를 들고 다시 주방이 있는 1층으로 내려간다.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 공부도 일도 때려치고 한 달음에 달려와준 친구들을 보며 생각했다. 언젠가 별 수 없이 겪게 될 이 일을, 친구들만큼은 그들이 최대한 늙었을 때 겪었으면 좋겠다고. 그리고 그들만큼은 부모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넬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조금이나마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이유로 부모님의 마지막 순간이 다가왔으면 좋겠다고. 하지만 재훈은 겨우 30대였다. 그러니, 세 가지 바람 중 두 가지만이라도 이루어졌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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