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란 나를 받아들이기
어렸을 때의 나는 뭐든 곧잘 해냈다. 공부나 운동이나 속해 있는 집단 중에서는 잘하는 편이었고, 그림도 잘 그렸다. 하지만 해가 지나고, 인식의 범위가 넓어질수록 나는 평범하고 심지어 서투른 인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한번 높아진 스스로에 대한 기대감은 쉽게 낮아지지 않았고, 현재의 나는 언제나 그 기대 수준을 밑돌았다.
그렇게 나의 멍청함과 허술함에 좌절하는 순간이 많아졌고, '난 왜 이것밖에 못하지?'라는 생각에 포기해 버리곤 했다. '나는 원래 이런 애가 아닌데..'라며 이상과 현실의 격차를 외면한 채 환상 속으로 도망쳤다. 현실에서의 작디작고 형편없는 내 모습은 나에게 너무 가혹했고, 그 환상만이 나의 안전지대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생각만 하면서 내 적성에 맞는 일을 찾지 못하겠다며 징징거리는 것도 지쳤다. 어떤 일을 잘 해내려면 당연하게도 미숙한 기간을 거쳐야 한다. 그리고 무엇이든 계속하지 않으면 실력은 무뎌진다. 처음부터 '이것은 나의 적성이며 천직이다'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일이 세상에 얼마나 있을까.
재능이 뚜렷하게 존재하며 운명처럼 마주할 수 있다는 환상은 나를 조급하게 만들었다. 미숙한 나의 상태를 지각하는 순간 그 일은 흥미나 관심과는 상관없이 시간낭비가 되었다. 재능과 적성을 찾지 못했다는 조바심은 무능력한 나에 대한 끝없는 자책감으로 이어진다. 인생은 정해진 답을 찾아 공략해야 하는 게임이 아닌데도 나는 내게 딱 맞는 천직과 이에 필요한 최적의 스킬 트리를 찾고 있었다.
학생은 공부가 우선이니 다른 일은 뒤로 미루고, 대학생은 취업 준비가 우선이니 그 외의 일들은 더욱 뒤로 미뤄야 한다. 그렇게 뒤로 밀려나 버린 일들은 삶에서 점점 멀어진다. 그런데 그 가치와 유의미함은 누가, 어떻게 정하는 거지? 나는 어떤 일이 얼마나 가치가 있고 유의미 한 지 알고 있다는 오만한 착각을 하고 있었다. 남들이 떠드는 가치와 의미를 게으르게 따랐다.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삶의 길이 있다. 나에게 뭐가 맞는지는 나만 알 수 있고, 나 역시 해봐야 안다. 나의 길은 나 스스로 살펴보고 걸어봐야 한다.
언젠가는 능숙한 솜씨로 일을 해내거나, 세상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할 수 있을까? 지금은 절대 모른다. 그런 날은 영영 안 올지도 모른다. 그러니 지금은 완벽하지 않고, 가치 없는 일을 해야만 한다. 그럴 수밖에 없다. 나는 완벽하지 않고, 엄청난 능력도 없다. 이 무능하고 평범하고 한없이 초라한 나를 받아들이는 게 쉽지는 않다. 무의미한 일을 해나가고, 완벽하지 않은 것을 계속해나가는 것은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과정이기도 하다.
내 미숙한 솜씨를 드러내면 누군가 날 비웃을 거라는 두려움도 있다. 하지만 모두가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창구를 가지고 있는 지금 이 시대에는 아무리 날 드러내도 눈길을 받는 것조차 어렵다. 그래서 오히려 부담 없이 나를 내보일 수 있다. 나는 눈에 띄고 싶지 않아 하는 아이였는데, 지금은 오히려 누군가의 눈에 띄길 원한다. 아무도 나를 모르기에 오히려 더 마음이 가볍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숨어있을 수는 없다. 완벽해지면 그때 모습을 드러내겠다는 생각을 하다가는 영원히 숨어있어야 한다. 내가 멋진 모습으로 짠! 하고 나타나면 누군가 박수 쳐주며 환호해 줄 거라는 기대 역시 접어야 한다. 긴 시간 동안 숨어있던 누군가를 기다렸다는 듯이 스포트라이트를 비춰주고 환영해 줄 이가 어디에 있겠는가. 혼자만의 고독한 시간이 되겠지만, 그래도 괜찮다. 내가 나아갈 길 위에 바위가 있으면 치우고, 나무가 무성하면 가지도 치고 하면서 넓은 길을 만들어나가는 과정은 절대 헛된 시간이 아니다.
이 글도 마찬가지다. 나는 글로 아무런 금전적 가치를 창출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계속 뭔가를 써보고자 한다.
나는 이렇게 무의미하고 허술한 일들을 계속해나가며 그 과정을 즐기는 내가 대견하다. 인생이 무의미하기에 우리는 의미를 찾지만, 결국은 그 '의미 없음' 또한 하나의 이미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의 마음이 달라진다면 무의미한 일에서도 가치를 찾을 수 있다.
이렇게 구멍 투성이인 나를 받아들이고, 끊임없이 드러내는 일을 계속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