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타이페이스토리>(1985) 리뷰
변화의 바람은 많은 것을 바꿔 놓는다. 대만에 불어온 도시화의 바람은 사람들의 현재와 미래를 뒤흔들었다. 모든 것이 급변하던 1980년대의 대만에서 에드워드 양 감독은 한 연인을 불러온다. 방직 사업을 하지만 소년 야구단 시절의 추억에 젖어 있는 아룽(허우 샤오시엔)과 삶을 개척해 나가려는 진취적인 슈첸(채금)이다. 업무상 미국 LA에 나가 있던 아룽이 타이페이로 돌아온다. 재회하게 된 두 사람은 변화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서 어긋나고 충돌한다.
아룽의 마음은 어린 시절 야구를 즐기던 시기에 머물러 있다. 사업도, 결혼도, 이민도 확실한 결단을 내리지 못한다. 반면 슈첸은 회사를 그만두는 것도, 독립하는 것도 자신의 의지대로 망설임 없이 움직인다. 슈첸은 아룽과 결혼하고 미국으로 이민을 꿈꾸지만, 아룽은 끝내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 한 때 같은 방향을 보던 두 사람은 이제 다른 방향으로 향한다.
에드워드 양 감독은 두 인물을 중심으로 변화하는 도시의 모습을 차분히 지켜본다. <타이페이 스토리>는 타이페이의 변화하고, 흩어지고, 남겨지는 순간들을 조금은 체념한 듯 담아내며 어쩌면 희망적일지도 모를 미래를 기대한다.
도시에 변화의 바람이 불어오듯 인생에도 변화의 바람은 불어온다. 영화는 슈첸의 독립과 이사에서 시작한다. 슈첸의 독립은 권위적이며 가부장적인 아버지에게서의 탈출이다. 아버지는 슈첸보다 친구의 아들이며 미국에서 사업을 하는 매형을 둔 아룽에게 각별한 애정을 보이며 신뢰한다. 결혼도 하지 않고 호적을 옮기는 딸이 못마땅한 아버지는 아룽에게 결혼을 재촉한다. 그러나 아룽은 결정을 내리는 사람이 아니다. 슈첸은 독립도, 이사할 집도, 인테리어도 스스로 결정한다. 슈첸의 취향으로 가득 찬 집만큼 그의 독립적인 면을 보여주는 것은 없다. 하지만 슈첸도 처음으로 혼자가 된 밤은 외롭고 무섭다. 이는 변화와 자유에 동반되는 혼란과 불안이다.
슈첸은 어둠 속에서 자연스레 어린 시절을 떠올린다. 슈첸이 떠올리며 위안받은 기억은 집 창문에서 야구배트와 도시락통을 짤랑거리며 노을 속으로 걸어가던 아룽의 모습이다.
슈첸과 같은 추억을 간직하고 있던 아쥐안은 고바야시와 결혼해 일본에 살고 있다. 아룽은 아쥐안에게 선택받지 못했고, 슈첸과 헤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만남은 이어지고 있었다. 모든 선택권을 타인에게 넘긴 결과로 살고 있다. 아룽이 결정을 망설이지 않는 유일한 일은 타인을 돕는 것이다. 이혼을 준비하는 아쥐안을 찾아 일본을 방문하고, 빚더미에 앉은 슈첸의 아버지에게 돈을 빌려주고, 가난한 친구의 도박하는 아내를 혼내서 집에 불러오는 일 등. 그러나 아룽이 돕고자 한 일들은 모두 좋지 않은 결말을 맞는다. 자신의 "연민만이 남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는 아룽은 그 누구도, 심지어 자신조차 구원하는 데 실패한다.
슈첸의 아버지를 닮아가는 아룽은 기성세대의 삶에 머물러 있고자 하는 사람이다. 아룽은 모두를 도우려 하지만, 아무도 돕지 못한다. 결정을 내리는 주체의 자리에서 물러난 아룽이 지키고 있는 추억과 과거는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주변의 모든 것이 변하고 있지만 그는 그대로 자신만의 세상에 있다. 죽기 직전 아룽이 보게 되는 것은 가족도 연인도 아닌 1969년 대만의 소년 야구단이 우승하는 환상이다. '지나간 일은 모두 잊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아룽은 지나간 과거에서 한걸음도 내딛지 못한 채 남겨져 있다. 그러므로 아룽에게 미국이든 타이페이든, 결혼을 하든 하지 않든 모두 무의미한 일일 뿐이다.
대만의 급격한 도시화는 슈첸의 직장에도 영향을 미친다. 슈첸의 회사는 10cm의 측정 오류로 법정 분쟁에 휘말리게 됐고, '궈성'에 인수된다. 메이 씨의 특별 보좌관으로 승진을 기대하고 있던 슈첸은 직장을 잃게 된다. 슈첸의 직장 동료는 건물들을 보며 '무엇이 내가 디자인한 건지 모르겠다'라고 한다. 비슷한 규격의 획일적인 건물들, 모두 안경을 끼고 있어 누가 누구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회사원의 모습은 개성을 잃어가는 현대 사회의 현주소다. "내가 있든 없든 점점 더 무의미한 것 같다"는 동료의 말처럼 개인이 지워지고 하나의 도구가 되어야 하는 것이 노동자의 현실이다. 하지만 슈첸은 비관적인 태도에 반대한다. 슈첸의 화장대에 어지러이 놓여 있는 각양각색의 안경들은 몰개성 속에서도 자신을 드러내겠다는 의지와도 같다.
아룽과 슈첸은 다른 시공간을 살아가는 사람들처럼 엇갈린 채 서로를 비껴간다. 한 공간에 있을 때조차 무거운 공기가 둘 사이를 메우고 있다. 이들이 솔직한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은 어둠 속뿐이다. 시간도 공간도 파악되지 않는 캄캄함 속에서 불안과 혼란, 비관적인 마음을 쏟아낸다. 슈첸은 그래서 자신의 슬픔을 위해 선글라스를 쓴다.
아룽은 결국 자신보다 어린 젊은 세대에 의해 죽음을 맞이한다. 버려진 낡은 물건들 옆에서 아룽은 낡고 버려진 것들과 함께 스러져간다. 아룽은 결혼과 이민이 환상이며 잠깐의 희망일 뿐이라고 하지만, 지나간 과거는 잠깐의 희망조차 될 수 없다.
반면 슈첸은 그의 아버지와 같은 기성세대보다 동생 이랑과 친구들 같은 젊은 세대와 더 가까이 지낸다. 물론 이들과 어울리면서도 문득문득 혼란과 불안이 슈첸을 덮쳐오지만, 그럼에도 새로운 시대와 맞닿아 있는 인물이다. 미국 기업의 타이페이 지점에서 메이와 다시 일하게 되는 순간에도 슈첸은 아룽을 생각한다. 어떤 결정도 내리지 못한 아룽에 대한 안타까움과 슬픔 그리고 미련이 담긴 얼굴 위로 선글라스가 드리운다. 슈첸은 지나간 감정들과 함께 계속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도로 위를 내달리는 차들 사이를 위태롭게 건너는 슈첸은 이 혼란한 시대 역시 위태롭지만 결국에 건너갈 것이다.
에드워드 양은 지나가 버리는 것, 남겨지는 것 그래서 버려지는 것들을 담담하게 관조한다. 흩어지는 연기처럼 사라져 버린 누군가의 삶에 애도를 표하지도 않는다. 다만 새로운 흐름을 따라간다. 이것이 좋은지 나쁜지는 알 수 없으나 어쩔 수 없다. 따를 수밖에. 감독은 서사나 대사보다는 이미지와 분위기로 지나가고, 남겨지고, 찾아오는 것들을 관객에게 하나하나 각인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