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을 충분히 받아주는 이가 없는 시기가 있었다. 그때는 누가 톡 건드리면 시도때도 없이 닭똥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나는 사랑이 너무 과한 사람이구나. 이런 나를 감당하는 건 고된 일이겠지, 하고 생각했다. 그렇게 푸념할 때마다 상담선생님은 내게 말했다.
- 채영씨는 바나나 나무예요. 바나나 나무는 자라는데 물이 아주 많이 필요하죠. 그런데, 물을 많이 필요로 한다고 바나나 나무가 부끄러워 할까요? 그냥 물을 많이 먹고, 달콤한 열매를 많이 만들 뿐이죠. 그냥 그렇게 태어난 거에요. 채영씨는.
사랑을 듬뿍 받고 그만큼 한없이 돌려줄 수 있는 사람이 나라고 했다. 그런 말을 들어도 기분이 나아질 리 없으니, 바나나 나무가 참 싫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어떡하랴. 팔자를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없는 것을. 차츰 ‘나는 바나나 나무….’를 되새겼고,, 애정을 충분히 돌려주지 않는 사람들을 차츰 정리해 나갔다. 의지를 갖고 절연을 할 때도 있었고, 그냥 일어날 일이 일어나듯 멀어지기도 했다.
그중 가장 힘겨웠던 이별은 근 18년정도 만난 단짝친구와의 이별이었다. 그 이별만큼은 우리 중 누구도 정말로 예상치 못했다. 우리에게 고질적인 문제가 있긴 했다. 내가 그녀와의 관계에서 항상 모자람을 느낀다는 것. 나는 그애를 더 알고 싶었다. 나에게 더 속마음을 터놓고 기대주길 바랬고, 나도 바라는 만큼 기댈 수 있길 원했다. 친구는 날 정말정말 사랑했지만 내가 바라는 거리감이 너무 가까워서 버거워했다. 우린 참 힘든 시간을 많이 보냈다. 그래도 사랑하는 마음으로 늘 이겨냈기에 우리의 우정은 막연히 영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더이상 서로를 견딜 수 없는 시점에 이르렀다. 나는 진짜 피가 마르는 연애를 하고 있었다. 그럴수록 친구에게 기대는 날이 많아졌다. 친구는 힘들어했고 그러나 친구로써의 도리를 다하려 애썼다. 그러던 중, 남자친구와의 관계가 끝나는 날, 친구에게 한번 더 도움을 요청했다. 늘 미안했지만 특히나 그날은 염치라는 걸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들었다. 혼자 집에서 공황을 겪으며 연락을 한 나는 친구의 차가운 거절의 대답을 들었다. 어떤 긴 설명도 없었고, 전화 한 통 없었다. 그애가 지쳤다는 걸 알았지만, 너무나 냉담한 거절에 나도 간신히 버티고 있던 마음이 완전히 쏟아지는 것 같았다. 그애가 엄청나게 미웠다. 이별보다 견딜 수 없을 만큼.
친구와 나는 그 일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다. 친구는 네가 납득하지 못할 것 같지만, 그저 너무 힘들었다고 했다. 너의 이야기를 듣는 것을 견딜 에너지가 없을 것 같았고, 그렇게 거절해서 면목 없는 와중에 살갑게 달래는 게 이상하게 느껴졌다고 했다. 나는 그걸 듣고, 이해는 되는데 네 말대로 납득할 수 없다고 했다. 나는 그냥 울었다. 걔에게서 서운한 것은 고사하고 애인과 헤어져서 넝마가 된 마음이 숨길 수 없이 흘러 넘쳤다. 친구는 나를 가여워하며 꼭 안아주었다. ‘우릴 진짜 어쩌면 좋니.’. 안겨있는 나도, 안아주는 친구도 어찌 해야하는지 알지 못했다. 얼마나 사랑하던간에, 그리고 얼마나 서로를 존중하며 대화를 하던 간에 좁힐 수 없는 간극을 느낄때면 숨이 턱 막혔다.
우리는 그 거리를 결국 해결하지 못했다. 정확히는, 내가 그랬다. 나는 그 뒤로 걔가 견딜 수 없어졌다. 지쳐있던 친구의 방어적인 태도가 사과로 느껴지지 않았다. 친구는 사과를 했는데도 마음을 풀 줄 모르는 나에게 서운해했다. 우리는 더이상 대화를 할 수 없었다. 그 친구를 떠올리면 계속 나의 결핍만 보였다. 관계에서 매달리는 내 모습, 원하는 걸 얻지 못하는 내 모습, 무언가 늘 부족한 내 모습…. 그애와 있는 내 모습이 참 초라하고 싫다는 걸 깨닫고, 인연이 다했음을 알게 되었다. 많이 사랑해도 헤어질 수 있다는 것또한 알게 되었다.
내가 그 누구보다 사랑했던 인물이 그렇게 내 삶에서 떠났다. 마지막은 그렇게도 허무할 수 없었다. 걔가 없는 내 삶은 상상할 수 없었는데, 버젓이 하루하루 살아졌다. 조금 슬펐던 것은, 그녀가 떠난 내 삶이 더 나아졌다는 것이다. 어떻게 죽으라는 법은 없는지, 그애와 멀어지던 즈음 새로운 친구들과 많이 가까워졌다. 그들은 내가 정말로 바라 마지않던 사람이었다. 마음이 통하고, 나만큼이나 외로움을 아는 사람. 나를 계속 보고싶어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하고, 그렇지 못하면 서운해하는 사람. 친구들은 보고싶다고 말해주고 기쁨과 슬픔과 불안을 나눠주어서 고맙다고 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듣고 싶다고 했다. 나는 이런 관계가 가능하다는 것을 믿지 못했다. 믿으면 실망할 일 밖에 없다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 관계가 있었다.
사실은 잘 모르겠다. 지금 나를 나만큼 사랑해주는 바나나 나무 친구들. 이 친구들도 내가 가장 밑바닥일때의 모습을 보여줬다면 지쳐 떨어졌을까? 이들의 의지가 어떠하든 난 부담인 존재인 게 아닐까? 그 물음에 정답을 알수는 없다. 그러나 그냥 이 관계에서의 내가 좋다. 기대는 만큼 품을 내어줄 수 있는 내 모습이 뿌듯하다. 충분히 돌봄을 받는 만큼, 돌봄을 줄 기회가 내게 있다. 나는 생각보다 품이 넓은 사람이었다는 걸 발견하는 일이 행복하다.
내가 사랑한 단짝친구는 정말 좋은 사람이다. 나또한 그렇게 구리기만 한 사람은 아니다. 그냥 우리는 한없이 맞지 않았다. 세상 일은 그렇게 단순하고 잔인하기도 하다. 우리의 관계는 실수가 아니었지만, 이런 일을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앞으로 나의 삶에는 나만큼 충분히 사랑을 주고받고 싶어하는 바나나 나무를 잔뜩 들이고 싶다. 나는 처절하게 외로워 본 적 있는 친구를 바란다. 일면식 없는 사람이 가여워서 눈물 흘리는 연인을 원한다. 그런 사람들 곁에서 더 활짝 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