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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존 Jan 25. 2024

스스로 공부하는 아이는 어떤 "지식"을 쌓게 될까?

주도적 학습, 개별화 교육과 지식

  아이들이 주도성과 관계성을 함께 함양하며 지식의 창조성을 발휘한다면 과연 아이들의 지식체계는 어떻게 변화될까요? 우선 짚고 넘어갈 것은, 아이들의 창조적 지식이란 그 앞 단계에서 이전의 지식체계에 몰입하여 아주 풍성한 탐구와 학습을 완료한 뒤에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즉 학습 주도성이란 아이가 원하는 것을 골라 빈 집에 새로운 것을 마구 밀어 넣는 그런 배움의 길은 아닙니다. 배움이 흘러넘쳐 창의적인 방식으로 지적 활동이 이루어지는 것이 주도적 학습이라고 할 수 있지요. 피카소 역시 전통적인 회화미술에서 탁월성을 발휘할 만큼 노력한 뒤 큐비즘이라는 새로운 지평을 열었습니다. 


 그러나 아주 작은 성취라도, 주도성을 통해 일구어낸 지식은 학습자들의 삶을 바꾸고 미래를 열어줄 가능성이 숨겨져 있습니다. 모든 지식이 다 같은 가치를 지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떤 지식은 보다 가치롭고, 어떤 지식은 보다 진리에 가깝습니다. 또 어떤 지식은, 보다 정의로울 수 있겠죠. 이러한 지식의 가치를 평가하고 나누는 것 또한 아이들의 학습 자발성을 이끌어내는 데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아이들이 스스로 일구어낸 지식은 또한 그 자체로 창의성과 성실함의 징표가 됩니다. 대학생이 되면 취업 준비를 위해 포트폴리오를 구성해 취업 자료로 활용합니다. 포트폴리오가 꽉 차거나, 눈여겨볼만한 것들이 많다면 취업 후보생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겠죠. 


 또한 학습 주도성에 의해 얻은 지식이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가 아이의 진로와 적성을 알고 미래를 준비하기 쉬워질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각 교과목의 성적과는 다른 결과물이기 때문이죠. 게다가 성적은 장기간에 걸쳐 크게 변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아이의 잠재력을 평가하기에 적절하지 않습니다.


 아이가 어떤 영역에 깊이 몰입하는 것을 보고 그쪽으로 교육투자를 하기로 결심했다고 한들, 그것이 외부의 자극에 대한 단순한 몰입 반응인지 참여와 창조가 발생하고 있는 모습인지는 알기 어렵습니다. 실제로 어떤 결과물을 만들어내는지를 보아야 할 테지요.


 그러나 이런 ‘실용적’인 교과 지식의 쓰임 말고, 실제로 주도적 학습과 그로 인해 생산된 창의적 지식들은, 우리 아이들의 삶과 생각을 어떻게 바꿀까요? 우리는 무엇에 주목해 아이들의 성장을 조력해야 할까요?     


부여된 복제” 지식 VS 생성한 실재” 지식


 아이들이 책과 수업을 통해 배우게 되는 교과지식은 아이들에게 있어는 외부에 이미 존재했던, 타인이 부여해준 지식에 불과합니다. 이것이 참된 지식인지 아닌지 의심하고 비판할 여지가 없고, 그로 인하여 아이들은 이 지식이 자신에게 있어서 실재로 필요하고 중요한 것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런 반면 주도적으로 얻은 지식은 아이에게 있어서 충분한 검증과 성찰을 거친 것이기 때문에 곧 아이에게는 실재적인 것, 보다 진리에 가까운 것으로서 다가오죠. 오히려 정규수업에서 배우는 교과 지식보다도 아이들이 스스로 창조해낸 지식이 더 명확하게 세상을 비추어 준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두 지식은 아이들의 학습관을 좌지우지합니다. 흔히들 아이들이 수학은 왜 배워요? 이런 말을 합니다. 수학 뿐만 아니라 어느 과목도 마찬가지인데요, 자신에게 주어진 지식이라서 이것이 참인지 거짓인지 알지 못하고, 그만큼 배움에 몰입을 하기도 어려운 것입니다. 


 교사들도 비슷한 경험을 합니다. 교과서에서 가르치라는 대로 가르치고, 거기에 창의성을 발휘하기라도 하면 민원이 발생하여 고된 일을 치르니, 교사들에게도 자신이 수업 때 가르치는 교과지식은 점점 시간이 갈수록 평이해집니다. 이들의 지식은 교사 자신의 것이라기보다는 나라의 것, 교육청의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 같네요. 


 학습자 주도적 지식은 처음엔 이것이 가치로운지 어떨지를 알 수 없기 때문에 타인과의 교류 속에서 그 지식의 가치를 확인받아야 한다는 한계가 존재하지만 그 과정을 거치고 나면 아이들에겐 훨씬 실재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며, 공부의 동기를 다시 부여합니다. 즉 창습 지식은 고유의 성격으로 인하여 주도성과 관계성을 더욱 강화하는 특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도구적 지식 VS 실천적 지식


 우리가 성적을 위해, 대학을 위해 지식을 탐구한다는 것은 외부에 근원과 목적이 있는 도구적 지식에 기댄다는 의미입니다. 그에 비하여 아이들이 대상과의 관계맺음, 타인과의 관계맺음 속에서 주도성을 발휘하여 일군 창조적 지식은 아이들의 내면에서부터 시작된 배움으로써 보다 본질적인 지식으로서 가치가 있으며, 그 탐구와 활용에 있어서도 실천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직업세계에 나가보면 확연히 그 의의를 알 수 있습니다. 취업에까지 활용되는 도구적 지식은 직업인으로서 전문영역이 생기는 순간 그 가치가 상당히 감소하게 됩니다. 그때부터는 자신의 전문영역에서 얻어지는 풍성한 경험으로부터 다시금 참여-창조-연계의 원리에 따라 일구어진 실천적 지식이 훨씬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됩니다. 


 우리의 삶을 바꾸어 온 인류의 지식들 역시 도구적인, 이익을 목적으로 한 것들 보다는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고 세상을 바꾸고자 한 실천적 지식인 것들이 더 많습니다. 실천적 지식으로서의 학습 주도성의 의의는 아이들을 기능적으로도 발달시킬 수 있다는 점입니다. 말 그대로 실천, 이론의 현실 적용이 매우 중요할 것입니다. 아이들은 배움의 과정에서 1차적으로 다양한 실천적 방안을 성찰하고, 2차적으로 그렇게 확립된 자신의 이론을 2차로 현실에서 다시 실천하며 펼쳐가려 노력할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시행착오를 겪고 좌절도 할 것입니다만, 실천과 관련된 여러 가지 역량, 즉 문제해결역량이나 공동체 역량, 창의적 역량 등을 함양할 수 있기도 합니다. 


탈윤리적 지식 VS 윤리적 지식


 어떤 아이를 기르고 싶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아이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사랑받아 마땅한, 지성과 품성을 겸비한 인간을 우리는 꿈꿀 것입니다. 학교에서 배우는 교과 지식은 윤리성과는 구분되는 탈윤리적 지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스스로 몸소 배우며 익힌 지식은 그 자체로 아이의 윤리성을 상징하고 또 강화해줍니다. 


 영어를 충분히 공부하면 영어를 잘 하는 학생을 만들 수 있는데 윤리과목을 충분히 공부한다고 하여 윤리적인 아이로 바뀌진 않습니다. 교과의 기본 성격은 가치중립적, 탈윤리적인 성격이 있기 때문입니다. 실천과도 실재적 삶과도 분리된 채로 아이들에게 복제되어 다만 아이의 지식을 평가할 뿐입니다. 


 이러한 탈윤리적 지식으로는 우리 아이가 어떤 유형의 사람인지를 알기 어렵습니다. 아이로부터 배우고, 아이로부터 듣는다는 태도로 아이가 창습해낸 지식들을 눈여겨보면 아이의 윤리성을 탐색하고 별개의 도덕교육 없이, 아이 스스로 보다 나은 삶을 위한 실천을 하도록 이끌 수 있습니다. 


 근대사회에 학교가 직업교육을 목적으로 국가의 한 기관으로 형성되기 이전까지, 지식은 윤리적 성격을 띠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전통교육에서도 유교적 인간상을 추구하며 대학과 소학, 논어와 맹자 등을 배우죠. 사회의 문화와 전통을 후대에 계승하는 것에서부터 교육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지식의 공동체성과 윤리적 성격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학습 주도성을 통하여 지식의 윤리성을 추구한다는 것은 아이의 미래를 위한 새로운 가능성을 활짝 열어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침 최근에는 기술 사용과 기업 경영에도 윤리성이 요구되고 있는 시점입니다. 환경과 생태에 대한 공공의 감시와 투명성이 높아졌습니다. 아이가 윤리적 지식에 대한 지향점을 품고 있다면, 이런 지식에의 접근 기회는 늘어납니다.      


 지식의 양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지식의 질도 중요합니다. 우리의 과제는 아이들로 하여금 지식의 질적 가치를 평가할 수 있도록 하여, 평생에 걸친 배움의 길 속에서 올바른 방향을 갖고 윤리적 실천 방안을 현실에서 그려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학교교육이 지금처럼 난이도가 높고 방대해진 것은, 고등학교까지의 12년 동안 아이들이 배울 수 있는 것이 자꾸 늘어나 결국엔 다수의 아이들이 매우 높은 교과 지식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9분위의 내신 등급, 400점의 수능 만점을 꽉 채우고도, 아이의 지성은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습니다. 도구적인, 탈윤리적인, 복제된 지식을 아이들에게 더 더 채우려고 애를 쓰기보단, 아이와의 시간을 성찰과 탐색의 시간으로 쓰는 일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풍요로운 지식은 본질적으로 우리의 삶을 밝히고,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배워서 써먹는 것이 아니라, 창조하고 연계하며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 세상을 조금이나마 이롭게 한다면 더할 나위 없겠죠. 


 최근의 생태주의적 실천운동은 다음의 다섯가지 실천 목표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전 지구를 아우르는 윤리적이고 실천적인 운동으로서, 지식의 질을 평가하기에 참고가 될만 하여 소개할까 합니다.


 - 통합적인 계획을 세워라, 지구적으로 생각해라, 현장에서 실천해라, 

 - 지구적으로 저항하라, 지역에서 재건하라. 


 위의 세 가지 항으로도 우리를 둘러싼 문제가 쉽사리 해결되지 않아, 아래의 두가지 항이 다시 나왔다고 합니다. 무언가를 관찰하고 상상하고 실천하려 한다고 할 때, 아이들의 생각의 지평은 전 지구적인 것으로 되어야 하며 그 실천의 방안은 우리 주변의 삶을 바꾸고 재구축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러한 지향점을 세우고 아이가 세상을 바라보며 우리 주변의 사물과 관계할 때, 아이들은 스스로 더 많은 과제를 부여하고, 탐구해나가지 않을까요. 


 지구적 생각, 지구적 실천이 허황되고 허무맹랑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영어를 왜 배우고 있을까요? 아이들이 즐겨보는 유튜브에는 실시간으로 몇 개국의 영상이 매일 업로드되고 있을까요? 아이들의 가능성은 아마도, 우리의 상상력보다는 클 것입니다. 학습 주도의 가능성도 우리의 상상력 이상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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