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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존 Jan 24. 2024

자존감과 공부 역량을 함께 살찌우는 자녀교육 비결

관계적 정체성과 든든한 존재의 토대

 바야흐로 자존감의 시대입니다. 저마다의 자리에서 인정을 받으면서도, 타인의 시선보다는 자기 자신의 명확한 주관으로 세상을 살아갑니다. 아이들의 성장, 교육, 생존에 있어서 자존감의 중요성은 말할 것이 없죠.


 그럼 그러한 자존감은 어떻게 키워주면 좋을까요? 먼저, 아이들의 자존감을 형성해주는데에 있어 크나큰 장애물들 우리 앞에 놓여있다는 점을 이야기해야합니다. 


 첫 번째 장애물은 말할 것도 없이 경쟁입니다. 아이들이 자기만의 확고한 주관을 가지고 살아간다고요? 주관보다 중요한 것이 객관적인 평가의 결과이겠죠. 아무리 튼튼하고, 적극적이고, 성실한 아이라고 할지라도 객관적인 성적, 학업성취도에서 밀리면 심각하게 자존감의 위기를 경험합니다. 


 두 번째 장애물은 공부할 과목들의 많은 양과 높은 난이도입니다. 선행학습을 꼭 하지 않더라도, 정상적으로 교육과정을 밟아나가도, 아이들이 미쳐 내용을 이해하기도 전에 또 다음 과목, 더 어려운 문제들이 아이에게 밀려옵니다. 그런 상황이니 생각이 깊은 아이들이나 끈기가 조금 부족한 아이들은 비교 당할 일, 잔소리를 들을 일들이 많죠. 자존감의 하락으로 이어집니다. 


 세 번째 장애물은 공부라는 과제 이외에, 아이들이 효능감을 느끼며 자존감을 높여갈 다른 활동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줄어든다는 것입니다. 아기 때는 그냥 막 걷기만 해도, 계단을 기어 내려오기만 해도 부모님들이 박수를 쳐주잖아요. 그런데 공부 시간이 늘어나고 아이들의 취미 시간이 줄어들게 되면서, 또 그런 활동들에서 성장과 발견의 경험은 시간이 갈수록 줄어들기 때문에 효능감도 갈수록 희소한 감각이 되어버리죠. 이러니, 아이들이 스스로를 칭찬할 기회도 갈수록 줄어들 밖에요. 


 한 가지만 더 같이 이야기를 나누어볼까요? 가족과 떨어져 학원과 학교로 나아가며 경험하게 되는 소외감 또한 자존감의 장애물입니다. 미성숙한 상태로 태어나는 아이들이 자신을 보살펴줄 부모님과 가족의 존재에 전적으로 의존함으로써 삶은 시작됩니다. 그런데 가족의 품을 떠나면서부터 소외감은 생겨나죠. 가족의 지지를 잃었다는 감정이 생기면서 자존감의 중대한 위기를 겪게 됩니다. 


 그런데 반대로 부모님들의 입장에선 아이들이 하루라도 빨리 스스로 하나 둘 해내길 바라죠.  심지어 서양권에서는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혼자 자도록 부모로부터 떼어놓는다고 하고, 그런 육아방법을 우리도 배워서 일찍부터 아이를 따로 재우는 것을 좋다고 추천 받습니다. 함께 아이를 돌보아줄 가족이 없으니 아이가 혼자 자도록 해야 부모가 숨 좀 돌리며 밀린 집안일을 할 수 있으니 당연한 일이지만, 자칫하면 아이가 혼자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며 소외감의 늪에 빠져버릴 위험이 존재합니다.


 아슬아슬한 줄타기 같은 고민이죠. 자존감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한 아이를 온전히 돌보며 지속적인 지지의 메시지를 보내줄 텐데, 캥거루족이란 말처럼 지나친 의존과 보호 관계로 인하여 아이가 자립심을 잃고 평생 부모의 등골을 빼먹는 경우가 있으니까 말입니다. 어떻게 해야할까요? 당장 “공부”가 시작되는 시기부터 세상은 아이에게 정글인데, 우리가 품으로 끌어안고 함께 가야할지. 아니면 그 정글 속에 뛰어들며 세상을 견뎌가도록 해야할지.


 지금보다 훨씬 평균 수명도 짧고 위험한 삶을 살았던, 옛 사람들은 어땠을까요?     


삶의 모든 것을 가족과 함께


 일찌감치 민주주의를 구가하던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시민들은 가족과 가문, 그리고 개인의 존재 사이에서 소속감과 자존감, 양쪽을 잘 조율하며 살아갔습니다. 그들은 저마다 어느 집안의 자녀, 또 어느 집안의 자녀라는 정체성을 확고히 했습니다. 누구의 손자 손녀, 누구의 딸 아들이라는 호칭이 매우 자연스러웠죠. 


 그들이 가족의 품에 파묻힌 캥거루족은 아니었습니다. 각자 나라를 지키는 군인이 되기도 하고 사회정의를 위한 연설가, 정치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또 각자 본업이 있어 구두를 만들기도 약초를 채집해 약사가 되기도 했죠. 그러나 어떤 일에 종사하든, 가족과 가문이 평생 그들과 함께했습니다. 가문에 대한 소속감은 아테네의 시민들에게 있어 자신의 존재의 밑바탕 그 자체였습니다. 


 어떻게 그런 확고한 소속감이 가능했을까요? 눈을 바로 옆으로 돌리면 자유시민이 아닌 노예들이 헐벗고 힘겨운 육체노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가족의 식사 시간에, 부모님을 따라서 구경을 나간 업무 시간에 늘 “우리 집안은 너의 할아버지의 할머니의 어머니의 아버지로부터…” 하며, 마치 족보를 달달 외듯 집안의 역사와 전통을 늘 배웠습니다. 우리 집안의 저택과 토지가 언제 일구어졌는지, 지금 이 시민의 자유와 권리가 어떻게 획득되었는지 자라면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익히게 되었죠. 


 또한 당시 아테네는 주변 다른 나라와 지속적으로 세력다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구성원들은 가정과 국가를 수호하기 위한 개인의 책임에 대해서도 잘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시민의 자유를 마음껏 누리다가도 어느날, 스파르타가 침략해 와서 이 민주주의를 잃게 되면 어쩌죠? 나쁜 정치가들, 나쁜 정치로 인해 우리 사회가 어지러워지면 어떻게 하죠? 나의 아들 딸에게 이 민주주의를 물려주지 못할 수도 있겠지요. 우리 조상의 역사를 빼앗길 수 있겠지요. 그래서 저마다 정치인, 연설가가 되고 군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삶은 고스란히 자존감의 성취로 이어졌습니다. 나의 존재의 든든한 토대가 우리 가문임을 알고 있었고, 그것을 수호하는 것이 나 자신임을 인식하고 있었으니까요. 우리가 살아가는 평범한 하루하루가 주변의 위협으로부터 가족과 가문, 우리 공동체를 수호하는 우리 모두의 셩과였습니다. 


 반대로, 나 한사람의 실패와 불명예가 가족 모두에게 미치게 된다는 점도 그들은 분명하게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로 인하여 아테네의 시민들은 가족을 지키기 위한 책임감으로 똘똘 무장해 있었습니다. 조선시대까지도 역모를 저지르다가 적발되면 3족을 멸했고, 고대 중국에서는 반역자의 9족을 멸했습니다. 잔혹해 보이지만, 이런 생각은 현대에는 무척 이상한 것이지만 옛날 사람들에겐 오히려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가족 공동체로부터 동떨어진 한 개인은 존재할 수 없다는 생각이 상식으로 통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어떻게 생겨나죠? 가족의 온전한 보살핌으로부터 생겨납니다. 그들 속에서 하나의 반역자가 나왔다는 것은 곧 그 가문의 모두가 같은 전통, 같은 인식을 공유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테네 시민들에게 나 한사람의 자유와 권리도, 의무와 책임도 가족과 가문으로부터 절대로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가족 공동체 문화가 단단히 뿌리박혀 있던 이들의 눈으로 현대인의 삶을 바라보면 어떻게 될까요? 조금 기괴하죠. 각 가문의 아들 딸로 태어난 아이들이, 가문과 가족의 뿌리와 전통을 알지 못한 채로 학교란 곳에 가서 각자의 정체성을 형성한 뒤, 성인이 되어 자신의 소속집단을 찾아간다니까, 이해가 안될 것입니다. 이 아이들은 무엇을 위해 살아가게 되죠? 무엇을 수호하려 하고, 누구에게 헌신하게 될까요?      


소속감과 자존감


 우리는 모두 어딘가에 소속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받고 안정감을 얻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축구 야구 등 스포츠 중계를 시청하며 팀을 응원하고, 때로는 유니폼을 입고 경기장에 가 응원을 합니다. 그를 통해 국가대표의 일원이라는, 어느 지역 팀의 서포터라는 정체성을 타인과 공유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타인과 나누면서 그들로부터 공감과 위로를 얻어내죠. 


 힘든 하루를 보내고 난 뒤 친구와 수다를 떨면서 위로받는 경험이 있으시죠? 왜 우리는 이런 아무것도 아닌 일들로부터 위로를 받을까요? 우리가 의지하는, 소속감을 부여해주는 이 집단은 우리의 삶이 틀리지 않았다는, 나의 존재가 가치가 있다는 “무조건적인 지지”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무조건적인 지지라, 아이에게 도움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시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첫째, 그것은 인간의 본능적인 감정입니다. 내가 부모님의 품 안에서 태어나, 자라나면서 품은 가장 중요한 감정이니까요. 그것은 우리 삶의 중요한 기둥입니다. 둘째, 오늘날의 삶은 모두에게 안개 속 미궁입니다. 과거에는 공부, 대학, 대기업, 아파트라는 공식이 존재했고 그것이 우리에게 삶의 안정감을 주던 시기가 분명히 있습니다. 지금은 그런 정답 따위 존재하지 않고 매일 매일이 투쟁이죠. 그러니, 매 순간 우리가 옳은 선택을 하고 있다는 근거가 마련되어야 온전한 정신의 건강을 누릴 수 있습니다. 


 다시 아테네 시민들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시죠. 아테네의 소년 소녀들이 가족과의 완벽한 소속감을 느끼면서도, 이들이 캥거루족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들려오지 않습니다. 이들이 전쟁터에 나가길 두려워했다는 말도 들려오지 않습니다. 무조건적인 지지를 보내는, 아이와 하나로 묶인 끈끈한 준거집단인 “가족”이 오히려 그들의 책임감과, 그 책임감이 실천으로 이어짐으로써 얻어지는 효능감의 모태가 되었던 것입니다. 어떻게 그게 가능했을까요? 다시, 몇 가지 원칙으로 정리해보겠습니다.      


자존감을 위한 가족 공동체의 세 가지 원칙


 첫째, 무조건적인 지지와 과잉보호는 완전히 다른 요소입니다. 이들을 명확하게 구분하며, 아이들에게 역할을 부여하고, 어떻게 그것을 수행하는지 지켜봐주며, 응원해야 합니다.


 현명한 아테네 시민들은 국가의 수호자로서의 역할을 명확히 인식했습니다. 아들도 딸도, 우리 공동체의 수호자들이니 그들이 안심하고 책무를 다할 수 있도록 남은 모든 가족이 그들의 존재의 밑거름이 되어주도록 하였죠. 지금, 부모인 우리가 어느날 죽음을 맞게 된다면 우리 아이들은 어떻게 될까요? 두렵고 불안하시죠. 당연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아이들은 할아버지 할머니, 큰아버지와 이모, 삼촌과 고모의 손에, 부모인 우리의 최선을 다한 양육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환경에서 자라나게 될 것입니다. 늙으신 부모님도 우리의 친척이 친자식처럼 모실 것입니다. 이것을 믿고 기꺼이 죽음을 각오하며 전쟁터에 나갔습니다. 우리의 희생으로 공동체가 지켜진다면, 우리 가족은 전과 변함없는 삶을 누릴 수 있으니까요. 


 조금 이해가 되시죠? 이것이 가족 구성원이 맡은 책임에 대한 무조건적인 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실패의 순간은 한 번 두 번쯤 반드시 찾아옵니다. 그럴 때 우리의 상실만큼 보태주고 도와주는 완벽한 공동체로서 가족이 기능했습니다. 아예 실패가 찾아오지 않도록, 상실을 경험하지 않도록 부모가 우산이 되고 바람막이가 되는 과잉보호가 아니라요. 


 다시 말하여 아이들의 자존감을 향상시키는 무조건적 지지의 핵심은 역할을 부여하고 마음껏 실패를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아이는 실패로부터 배웁니다. 소크라테스의 그 유명한 말처럼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를 알아야 아이는 성장합니다. 극심한 경쟁과 공부의 어려움에서 발생하는 두려움 또한 우리의 한결같은 지지를 통하여 극복될 수 있습니다. 


 딱 지금 이 순간, 우리 앞의 아이들을 보시죠. 모든 것을 잘 해내고 있나요? 잘 하는 것들, 못하는 것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럼, 지금 이 순간 앞으로 한발짝 더 나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실패의 가능성을 예감하고 있으면서도 두려움없이 나아갈 수 있는 용기일까요, 아니면 실패를 경험하지 않도록, 완벽한 준비가 될 수 있도록 채비를 해주는 것일까요? 양쪽 모두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에겐 어쩌면 즐거운 선택의 고민입니다. 


 둘째, 가족 안에서 우리 아이가 아니면 안되는 고유한 역할을 부여하고 그 영역을 존중해주는 것입니다. 보통은 이 영역이 공부죠. “넌 공부만 해. 나머진 엄마 아빠가 다 해줄게.” 이게 일반적인 가정의 정서이고, 전통입니다. 그러나, 그 공부에서 효능감을 느끼고, 자존감으로 이어지는 아이가 있는가하면 그렇지 못하는 아이도 있습니다. 도리어 아이의 고유 영토인 공부에서 지속적인 자존감의 하락을 경험하는 아이가 더 많습니다. 


 조금 남성 위주의 구태의연한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만 차례와 제사라는 전통 문화는 아이들 하나 하나의 자리를 바로 호명하는 나름의 장점이 있습니다. 다른 아무런 역할 부담 따위 없습니다. 그냥 그날, 가족 모임에 자리만 채워도 요즘 세상에 드문 아이라고 칭찬 받고 용돈도 많이 받죠. 그렇게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역할을 해냈다는 경험은 곧 가족에 대한 책임감과 효능감으로 이어집니다. 전통 문화에는 이러한 나름의 장점이 있습니다. 부작용을 집안 웃어른들이 잘 통제해주실 수 있으면 아이 교육에 효과적이죠. 그런 집안이 세상이 어딨냐 싶겠지만, 의외로 수평적인 남녀 문화를 일구는 집들도 많습니다. 


 집안에서의 자리 채우기를 통해 존재 그 자체의 의의를 인정받는 경험과 함께, 아이에게 역할을 부여하고 그것이 가족 안에서 다른 누구도 할 수 없는, 그리고 아이가 가장 잘하는 영역으로 만들어주어야 합니다. 그 경험은 아이에게 가족을 수호하는 인식을 싹트게 합니다.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니까요. 물론 아이가 커가면서 진실을 깨닫게 되고, 그 일에 소홀하게 될 수 있습니다. 처음엔 설거지를 돕는 것이 자기 일인 줄만 알다가 귀찮아하고, 방에 콕 박혀 나오지 않을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다시 우리는 다음의 아이의 영역을, 그리고 다음의 아이의 역할을 설정해주며 아이의 성장에 따른 지속적인 효능감의 장을 부여함으로써 이 상황을 개선시킬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느 시기에든, 아이에게 집안 경조사에 단지 함께 함으로써만으로도 존중을 받고 인정을 받는다는 점을 다시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아테네의 시민들이 가문의 일원이라는 정체성이 확고했다는 것을 기억하시지요? 그 원리로, 아이의 역할과 영역은 확보되어 갑니다.


 세 번째 원칙은, “가문의 영광”입니다. 즉, 아이의 노력으로 우리 모두가 보다 나은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인식시키고, 무조건적인 지지와 고유한 아이의 영역 수행을 통해 쌓인 효능감이 주도성으로 전이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현대에도 여전히 아테네와 같은 명문가들, 가문이라고 부를 수 있는 집안들이 존재합니다. <재벌집 막내아들>이란 드라마도 있었죠? 의사 집안, 법조인 집안, 군인 집안 들이 그러한 가문의 정체성을 유지하려는 노력의 결과물입니다. 


 그런 집안에서 자란 아이들은 태어나면서부터 한 평생의 인생의 계획이 태어나면서 꽉 짜여 있을 것입니다. 몇 살 때부터 어느 학원을 다니고, 어떤 공부를 하고, 어느 학교에 들어간 뒤 언제 유학을 가고 전문직이 될지가, 가문에 누적된 성공의 경험들에 따라 착착 제공되겠죠. 그 여정 내내 공부와 여가활동을 도와줄 부모님을 비롯한 멘토들이 따라붙습니다.


 동시에 아이에게는 대단한 자유가 주어집니다. 꼭 그 길을 갈 필요도 없고, 그 길에서 실패해도 아무런 걱정이 없으니까요. 법조인 가정에서 음악을 하는 아이, 스포츠 선수가 되는 아이, 창업을 하거나, 프로그래머가 나올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아이가 잠재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할 수 있도록 충분히 지원을 해줄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이죠. 부모님이 미리 준비해둔 길이든, 아이의 잠재력을 따르는 길이든, 양쪽에서 최상의 환경이 제공될 것입니다.


 안정적인 성공의 길과 자유로운 선택까지 양쪽 모두에서 만족스러운 성장과정을 가진 아이는? 가문의 일원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고 그들의 영광을 지속하기 위해 노력하게 됩니다. 그리고 정말로 뛰어난 성취를 거두는 아이가 튀어나와, 집안을 더더욱 빛내기도 하죠. 


 다시 말하면 막강한 가족 공동체의 소속감을 지닌 아이들은 아이들은 태어나면서부터 가족과 평생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갑니다. 가족이 곧 정체성이고 소속감의 원천입니다. 부모님들로부터 무한한 지지를 얻으며 자신의 선택에 확신을 더해갑니다. 바로 그 토양 위에서 아이들의 주도성이 발휘됩니다. 


 확고한 뿌리와 두터운 관계성을 통해 나오는 주도성은 단순히 성공의 욕구나 사물에 대한 흥미에서 발휘되는 것과는 한결 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가족과 공동체에 대한 책임에서부터 시작되죠.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유명한 말이 있죠? 유럽 엘리트의 교양이자 덕목인 이것 역시 국가공동체에 대한 소속감과 충성심에서부터 시작하여, 자신의 가문을 대표하는 한 사람으로서의 책임감에서 나옵니다. 그에 따라 헌신과 리더십, 겸손과 인내 등의 특성이 주도성을 발휘하는 가운데 드러납니다.


 학교에서 직장에서 그러한 인성요소와 공동체적 역량은 아이의 다른 장점들을 더욱 빛나게 합니다. 이것만으로도 남다른 점이라 할 수 있는데, 가족과 공동체에 대한 책임감에서 발현되는 주도성이기 때문에 다른 효능감의 원천이 소실되더라도 아이의 노력을 지속할 수 있게 됩니다. 경쟁에서 지더라도 실패를 반복하더라도 언제나 자신을 든든히 보호해주는 가족의 테두리를 명확히 인식하고 있으니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목표에 전념하죠. 또한 가족 안의 어른들과 대화를 나누며 인생을 장기적으로 바라보는 법, 인생의 지혜를 전해 듣게 된다는 점 등이 아이에게 유익하게 작용합니다. 늘 100m 전력질주를 하는 시기의 아이들이, 인생인 길고 긴 마라톤이며 그 승자는 고작 100m, 500m 구간에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란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죠.      


 우리는 자존감의 시대에 살고 있으면서도 자존감의 원천에 대해서는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듯합니다. 아이에게 있어서 모든 것인 엄마와 아빠가 태어났을 때와 같이 생애 끝까지, 마음과 영혼으로 함께함으로써 가장 확고한 자존감의 토대가 될 수 있습니다. 경쟁도, 공부도, 그리고 성공도, 그 자존감의 토대가 있고서 비로소 아이의 어떤 주도성이나 도전, 발전의 밑거름이 되겠지요. 


 아이가 공부를 잘해서 자존감과 효능감이 쌓이면, 그것 또한 가족이 함께 누려야 마땅합니다. 그렇게 좋은 성적을 얻도록 얼마나 부모님은 희생해왔겠어요. 아이가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는다면 온 가족이 함께 그것을 감당하면 좋겠습니다. 아이의 어려움은 결국 온 가족에게 미치니까요. 결국 자존감과 주도성이란, 우리가 어떻게 아이에게 확고한 소속감과 안정감을 주고, 그 다음으로 자기만의 성장 스토리를 써나가는 것에 달려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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