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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존 Jan 27. 2024

자기주도적 학습에 대해 우리는 모르고 있다.

자기주도적 학습의 다양한 층위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


 봉준호 감독이 이 말을 했을 때 멋진 말이다, 예술가 답다. 이정도 생각들은 누구나 해보았을 수 있겠습니다. <기생충>이라는, 한 가족의 개별적인 서사이면서 빈부격차의 심화라는 전지구적 사태를 다룬 명작 영화에 대한 훌륭한 평가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이다. 이 말이 정말 사실인지에 대해서는 고민을 해볼 필요는 있을 것 같습니다. 왜냐면, 이 말을 단지 한 성공한 영화감독의 예술관이라며 감동이나 동기부여로 끝내기엔, 뚜렷한 시사점을 갖추고 있거든요. 과연,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 될 수 있을까? 만약 개인적인 것이 창의적인 것이 될 수 있다면, 그 가능성은 어디에 있을까.


 이러한 논의는 사실 오늘 이야기할 "자기주도학습과 4차 산업혁명 시대의 교육"이라는 주제의 전제라기보다는 결말이었습니다. 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자기주도적 협력학습 프로젝트"의 오리엔테이션을 위하여 자기주도학습이란 무엇인가, 협력학습은 어째서 필요한가에 대한 설명을 이어가다가 아이들에게 이 결론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 떠오른 사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봉준호 감독의 저 코멘트는 교육적으로 증명이 가능한 아이디어입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교육과 4차 산업혁명의 관계라는 한정된 영역에서는 상당히 타당성을 갖춘 논의가 전개될 수 있습니다. 자기주도적인 학습이 무엇인지. 그것은 지식사회에서, 그리고 국가의 교육과정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해서 탐구해봄으로써 말입니다. 


 자기주도학습이라 하니 확 구미가 당기시는 분도 계시겠네요. 그렇죠 모든 학부모와 교사들의 고민이기도 합니다. 한때는 "야간 자율학습"을 대체해 학교에서 "야간 자기주도학습"이란 용어로 쓰이면서 우리에게 처음 도달한 개념이기도 하구요. 그놈의 4차 산업혁명 덕에 실제로 학교 교육도 학습자의 주도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많이 변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자유학기제와 동아리 활동입니다만, 현실적으로 주도성을 갖춘 학생들이 많지 않아 제도 도입이 10년은 된 지금에서도 학교 현장에서의 반응은 제각각입니다. 아 물론 학생부종합전형에서는 그런 제각각인 학생들 사이에서 제대로 주도성을 갖춘 학생을 골라내기 위해 막대한 생기부 빅데이터를 구축하고 입시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자기주도성이란 걸 제대로 키워낼 수 있다면 배우는 학생이나 양육하는 교사/학부모나 모두 고민이 없겠죠. 그러나 그 전에 우선, 그래서 자기주도학습이란 게 뭔지는 좀 알아야겠군요.  


자기주도학습의 다양한 층위


 자기주도학습이라면 일반적으론 "스스로 하는 공부"라고 생각할 것입니다만 조금 복잡한 사정이 있죠. 일단 대학이라고 하는 목표가 있고, 자기 진로를 위한 준비라는 목표가 있고. 그래서, 자기주도학습이라고 하지만, 이것이 정말 “나”를 위한 공부일지, 아니면 미래를 위한 대비책인지 조금 애매한 지점이 있습니다. 그러한 학습의 다양한 동기는 나쁜 것도 아니고 의도적인 것도 아닙니다. 단지 학습자의 성장과정에서 취사선택되는 자연스러운 과정입니다.


 다만 이러한 “교육적"인 논의를 해나갈 때의 맹점이 있어 그것은 먼저 짚어야 할 것 같습니다. 모두가(학부모, 교사, 학생) 교육을 경험해보았기 때문에, 자기만의 교육에 대한 철학이 있다는 점입니다. 그것이 충분한 사려와 숙고를 기울여 되게 잘 만들어진 철학이든, 편견과 속단으로 버무려진 좀 이상한 철학이든 간에. 이미 학생과 학부모 교사 모두들 10년, 30년씩 만들어지고 형성되어서 자기 내면에 구조적으로 이루어진 이 철학에 도전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특히 큰 세대차이가 발생하는 학생과 학부모의 경우가 그렇지요. 30년의 간극이 있는데 교육에 대한 철학은 더욱 완고하고, 교육에 대해 관심이 많은 학부모라면 더더욱 그 잘 다듬어진 자신의 철학을 고수할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이왕 교육을 이론적으로 조금 살핀다고 한다면, 또 “잘 배우고” "잘 가르치려면" 근본적으로 배움이란 무엇인가, 교육은 왜하는 것인가? 이 질문을 스스로 해보고 답을 얻어내야 합니다. 학생이든, 교사든, 학부모이든. 그래서 질문은 조금 더 근본적인 내용으로까지 나아가게 됩니다. 그렇다면 교육의 목적은 무엇일까? 

교육과 학습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내가 하고 싶은 공부와 내가 해야 하는 공부를 어떻게 균형을 잡아야 할까? 이런 질문들이 "자기주도학습"의 논의에 뒤따르게 될 것입니다.


 서론이 자꾸 길어집니다. 빨리 학습, 특히 “자기주도학습”을 바라보는 다양한 층위를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청소년기의 학습자에게 크게 세가지 층위의 학습이 발생합니다. 첫째는 내가 궁금한 것들, 내가 하고싶은 것들이 있죠. 자연적으로 생겨나는 호기심에서 연장되는 학습의 과정입니다. 공룡이라거나 캠핑 가서 벌레라거나, 수영이라거나, 피아노라거나, 태권도라거나, LOL 메타라거나 등등. 그리고 둘째, 학령기가 시작되고 주어지는 교육체계, 정규교육이라는 제도적 과정이 있습니다. 초-중-고 교육이죠. 셋째, 초-중-고에서의 학력경쟁을 위한 공부가 있습니다. 두번째 영역과 세번째 영역은 겹치긴 하지만 같지 않습니다. 목적도 다르죠. 정규교육의 목적은 자아실현과 인간화, 사회시민 양성이라면 학력경쟁은 고등지식에 접근하고 고등지식을 창조하기 위한 학습이라고 하겠습니다. 


 자 그러면 중등 학습자 차원에서의 세가지 층위에서 자기주도성은 어디에서 발현될까요? 이건 조금 어려운 질문입니다. 정규교육 영역과 학력경쟁 영역에서 최대한 활성화되어주길 바라실 수도 있습니다만, 이 질문을 택한다고 해도 그럼 그것을 어떻게 이끌어낼지 말이죠. 정답은 세 영역 모두에서 자기주도성은 발현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첫번째(자연학습이라고 임시로 부르겠습니다) 영역에서야 말할 것도 없죠. 다만 그것이 "탐구"인지 "학습"인지, 그것을 "교육과정"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는 있을지에 대해선 또 다른 이야기가 됩니다. 정규교육 영역에서는 다양한 자기주도 영역을 열어두고 있습니다. 위에서 이야기한 자유학년제가 대표적이고, 초등학교 때부터 아이들이 주도적으로 할 수 있는 여러 활동을 학교마다 개설하고 있습니다. 요즘엔 인원이 줄어서 더 활동에 참여하기에도, 아이들을 지도하기에도 수월한 편입니다. 코로나만 아니었다면.


 셋째, 학력경쟁의 영역에서 자기주도적 학습이 발휘되고 있다는 근거는 우선 학생들이 학력경쟁에서 이탈하지 않고 다수가 그 부조리한 것을 받아들이고 그 경쟁에 함께 뛰어들고 있다는 점이죠. 이 결정 자체가 자기주도성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아무리 학부모가 강압을 하더라도 스스로의 결정이 아니면 학력경쟁을 위한 교육과정은 불가능하죠. 일단 아이의 결정 뒤에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자기주도적인 판단을 더 더 하면서, 더 많은 학력과 활동기록 등을 축적합니다. 학력경쟁에서 동기상실은 아이의 주도성이 줄어드는 것이 근본 문제가 아닙니다. 그보다는 평가의 불합리성이나 학력경쟁의 압박 등 다른 이유가 선행되는 것이죠. 적당한 학력경쟁, 합리적인 평가, 충분한 보상, 충분한 휴식이 있다면 학습자가 학력경쟁에서 자기주도성을 상실할 여지는 없습니다. 그것이 자유경제의 대전제이기도 하죠. 이러한 주도성은 일반적이고, 모두에게 존재합니다. 


 자 그러면 지식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입장에선 어떻게 학습의 자기주도성을 바라볼까요? 지식 전문가는 대학 교수를 필두로 하는 연구자, 학자 집단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집단이 대학에서 학생들을 선발하지요. 학종, 다시 말해 입학사정관제도를 담당하는 교수는 물론이고, 입학사정관도 최소한 석사 학위를 갖추고 있습니다. 지식전문가의 입장에서는 학습의 자기주도성은 상당히 다른 관점에서 포착이 됩니다. 


 일단 대학생인 학사 과정생들은 사실 취업을 위해서 대학 과정을 이수하는 친구들이기 때문에 대학 교수, 지식의 최고 전문가 입장에서는 이 사람들에게 기대하는 자기주도성은 미래의 학자가 될 수 있는 잠재력일 수도 있고, 단순히 우리 학과의 뛰어난 인재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공부"라는 것은 이 단계에선 쉽게 증명되지 않습니다. 우수한 대학에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했더라도 그렇습니다. 석사과정을 시작한 대학원생부터 비로소 학과 전공 학문의 실제 구조나 현황을 깊이 있게 공부하는 단계입니다. 자기주도적 공부의 입문 단계이나, 아직도 지식 차원에서의 자기주도적 학습이라고 평가되기 어렵습니다. 다만 일단 석사를 하겠다고 한다면 이 사람이 학문적 잠재력을 피울 의지가 있다는 정도 태도로 받아들여질달까요. 전공 분야의 지식을 최대한 자세히 파악하는 과정입니다. 


 학습자 입장에서는 자연학습, 정규교육, 학력경쟁의 모든 차원에서 발생하는 자기주도성이 왜 대학 교수 수준의 전문가 입장에서는 부정되느냐 하면 학습자의 자기주도성은 "성장"의 관점에서 정의한 것이고, 지금 교수가 바라보는 학습자의 주도성은 "지식"의 관점에서 정의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식전문가의 입장에서는, 대학생과 대학원생의 공부는 방대한 학문지식체계를 하나 하나 천천히  답사하는 과정에 불과합니다. 기존에 모두 입증되고 검증된 지식들인데 그것을 일일이 익히고 있는 수준의 학생들의 "자기주도적 학습"이라는 것은 쉽게 인정하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박사 과정에 들어서 비로소 지식 측면에서의 자기주도적 학습이 이루어집니다. 박사는 대학원/대학에서 강의가 가능한 수준의 지식 전문가임을 인정받는데, 그 강의 또한 가르칠 가치가 있는 지식이어야 할 테지요. 그러니까, 지식전문가로서 박사는 자기주도적으로 학습을 하여 전공 분야에서 새로운 지식을 발견해낸 사람을 말하며 실제로 박사과정은 그렇게 운영됩니다. 


 문제는 입시생들을 평가할 입학사정관/대학 교수들은 자기주도학습을 성장발달이 아닌 지식전문가의 관점에서 바라보게 된다는 점입니다.  그러면, 학습자 수준에서의 자기주도 학습을 인정해줄 수 있을까요? 만약에 그것을 고맙게도 인식하고 인정해준다고 한다면. 과연 그 학생의 자기주도성은 다른 학생에 비해 유별난 것으로 판단될까요? 애석하게도 그렇지 않습니다. 성장의 관점에서는 모든 학습자들이 자기주도적인 특성을 드러냅니다. 특히 정규교육과정이나 학력경쟁에서의 자기주도성은 내신과 수능성적 등의 객관적인 수치로 이미 모두 채점되어 있고, 만약 이 영역에서 주도성이 판별된다면 굳이 면접이라는 절차를 거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학습자의 입장에서 발견되는 자기주도적 학습은 모두 입시평가자들의 입장에서는 반박되거나 부정되고, 교수와 입학사정관들은 여러 다면평가자들의 각종 자료나 제한된 면접 내에서 이 학생이 나중에 석사, 박사까지 되어서 전문적인 지식을 습득할, 자기주도학습의 경지로 나아갈 수 있는 학생들을 판별하는 아주 어려운 과정을 겪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박사 수준에서 바라보는 진짜 공부, 자기공부를 해내는 학습자는 어떻게 판별되느냐.


그리고 국가와 산업의 입장

 

 그 전에 잠깐 학습자와 지식전문가의 관계를 검토하며, 동시에 지식전문가 집단 역시 국가 단위로 지식생산과 자기주도적학습의 통제는 받는 존재라는 점을 검토하겠습니다.


 국가는 (1)국민들을 인간화하고, 자기실현을 하도록, (2)국가를 운용하고 함께 발전시킬 시민들을 육성하기 위해, 그리고 (3)미래 산업사회에서의 기술 확보 및 지식문화 수준을 향상하기 위해 교육제도를 모색하고 운영해나가고 있습니다. 이 세가지가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데 이를테면 미국처럼 국가경쟁력은 여전히 막강한데 교육의 인간화라거나 건전한 시민양성을 제때 못하여 코로나 감염증에 엉망으로 대응하거나, 대통령 선거가 증오와 혐오로 얼룩지거나 하는 사례를 보게 됩니다. 


 세번째 영역인 국가경쟁력도 사실 정규교육의 아주 중요한 목표입니다. 오히려 교육의 수요자들이나 교사가 무감각한 영역입니다만, 근대교육의 발상지인 유럽에서도 부국강병을 위해 의무교육을 시행한 바가 있을만큼, 또 동아시아의 여러나라들이 교육입국을 내세웠던 것처럼 교육을 통한 가치창출은 무척이나 중요한 문제입니다. 국가에게 있어서 "새로운 지식"이 창조하는 가치의 중요성은 자연스럽게 도출됩니다. R&D 투자를 통한 국가경쟁력을 향상 노력과 연구보고서, 신기술 등에 많은 투자를 하고, 전 세계가 오늘날 지적재산권을 둘러싼 사투를 벌이고 있습니다.


 4차산업혁명 시대는 지식정보산업 사회입니다. 기생충처럼, 넷플릭스처럼, 애플의 아이폰처럼 새로운 지식에서 막대한 부가 창출되고 그것이 국가경쟁력으로 이어지는 시대죠. 여전히 인간화 교육이나 시민양성이 교육 자체의 대전제이긴 합니다만, 그것은 국가와 교육 상호간의 필요충분조건이고 지식정보산업에서의 부의 창출은 그에 더하여 첨단의 지식을 추구해야 하는 어려운 영역입니다. 때문에, 많은 지식전문가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지식을 창출한 학문 연구에 몰두하고 있으며, 또한 그런 잠재력을 갖춘 학생들을 찾아내기 위해 부심하고 있습니다. 


 중간결론을 이쯤에서 잠깐 내어본다면 국가와 지식 전문가 집단의 학습의 자기주도성에 대한 일치된 관심은 정규교육 과정에서의 학력경쟁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학습자 스스로 공부를 하는 태도” 는 학습자의 모든 교육활동에서 드러나긴 하지만, 전공 분야에서 새로운 지식을 창출하는 박사 과정의 학습, 그리고 그렇게 생산된 지식을 통해 국가경쟁력을 향상시키고 사회문화적 수준을 신장시켜야 하는 국가의 요구는 명확하게 고도화되고 전문화된 학습의 자기주도성을 요청한다는 점입니다. 특히나 우리나라처럼, 학력경쟁이 빡세서 알아서들 공부하는 나라라면 말입니다. 정규교육과 학력경쟁, 교육을 통한 인간화와 사회화는 그를 전문적으로 탐구하는 집단이 있고 그 나름의 중요성에 따라 다루어집니다. 그러나 진정한 자기주도학습이나 그를 통해 생산되는 지식의 가치는 조금 다른 영역으로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다시 학습자의 자기주도성 층위를 검토한다면, 그리고 교육을 바라본다면

 

 따라서, 국가와 지식전문가들의 일치된 관심으로서 정규교유과정과 학력경쟁에서 발현되는 자기주도성보다는, 학습자 본연의 의식과 관심에 따라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학습과정, 다시 아이가 공룡에 관심을 갖고 로봇을 좋아해서 장난감을 분해하고, 조금 나이를 먹어서 자기만의 관심분야가 생기고 거기에서 탐구를 하고 동아리활동을 해나가는 이 영역이 가장 핵심적인 자기주도학습의 영역이라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지식전문가들을 통제하는 국가의 요구는 학력경쟁의 과잉이 아니라 가치를 창출할 새로운 지식의 생산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지식의 생산은 단순한 정규교육과정의 이수나 학력경쟁으론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학습자 스스로 문제를 도출하고 그 해답을 찾는 긴 과정을 해나갈 지적 잠재력을 갖춘 학습자가, 실제로 박사 수준의 과정을 거쳐야 가능한 일입니다. 


 봉준호 감독의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라는 결론 역시 학습의 자기주도성을 개인, 국가, 지식전문가의 입장을 검토하면 합리성을 얻을 수 있습니다. 국가가 국책연구기관을 통해 막대한 비용을 연구자들에게 투자하는 것은 새로운 지식을 창출하고 그로부터 가치가 생산되길 기대히는 때문입니다. 새 지식은 결국 스스로 지식을 탐구하는 과정에서만 가능합니다. 이미 존재하는 대부분의 질문의 답변들은 다른 연구자들에 의해 나와있습니다. 자기가 스스로 찾아낸 문제, 스스로 탐구해 얻어낸 결론이 곧 지식의 본질이며, 미래의 부의 산실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교육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교육과 학습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간략하게, 교육은 지식전문가과 국가의 입장에서 학습자를 함양하는 과정이고, 학습은 내가 국가의 요구, 지식전문가의 요구, 나 자신의 욕구를 조화해서 다양한 층위에서 발생하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것, 사회적인 것, 회고적인것, 미래지향적인 것이 모두 다 있겠죠. 학습자를 중심에 둔, 교육이 아닌 학습의 관점에서 아이들을 바라보아야 학습의 자기주도성이 발견되고 미래사회를 위한, 그를 위한 전문적인 지식 습득을 위한 기반이 학습자에게 마련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학습자에게는 "내가 하고 싶은 공부"와 "내가 해야 하는 공부"를 어떻게 균형을 잡아 나갈지 평생의 질문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교사의 입장에서는 일단 사회화와 학생들의 인간화, 자아실현이 중요한 과제이긴 합니다만 그것은 제가 말 그대로 공교육의 한 실행자이기 때문이죠. 정교교육과 학력경쟁의 문제를 고민하는 주체가 교사 같은 집단들입니다. 그 밖에, 진짜 아이가 해야 하는 공부, 하고 싶은 공부에 대해 고민할 주체는, 바로 학습자 본인과 학부모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왕이면 자연발생적 자기주도학습의 영역을 절대로 손상은 하지 않아야 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도피를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아이들은 충분히 자기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학력경쟁을 감내하고 있는 것이니까요. 억지로 특정 영역에서의 주도성을 끌어올리길 기대하는 것보다는 아이가 갖는 다양한 주도성을 잘 탐지해서 두루 그것을 발달시킬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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