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드시 성공하는 자녀교육, "겸손한 엘리트"

세계의 질서와 지식탐구의 의미를 알고, 그것을 위해 평생을 바칠 결심

by 공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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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치스(지)와 골드문트(사랑)


데미안은 아시지요? 데미안이 '독립된 인격체'로서 세상에로 나아가는 소년의 내면에서 현실의 모순과 이상적 자아를 다룬 작품이라면, 그보다 뒤에 쓰여진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는 국내에서는 '이름 정도는 알지만 정확히는 모르는 소설' 정도로 받아들여지고, 자주 인용되거나 추천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막상 읽어보면 <데미안>보다 훨씬 이해하기 쉽고 주제도 명확하거든요. 골드문트라는 아름다운 외모의 소년이 수도원에서 나와 세상을 방황하며 성에 눈을 뜨고, 흑사병으로 무너지는 세상 속에서 자신을 해치려는 노상강도를 살인하는 이야기까지, <데미안>보다 흥미진진한 구석이 있습니다.


<데미안>의 싱클레어에 해당하는 이 소설의 주인공은 골드문트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 반대쪽엔 '지' 즉, '앎'을 의미하는 나르치스가 있습니다. 나르치스가 나이가 몇살 더 많습니다. 스포일러가 되겠지만, 알고 보아도 상관 없을만큼 재미있는 책이니 밝혀두자면 세상을 유람하던 골드문트는 수도원으로 돌아가 나르치스와 함께하게 됩니다. 사랑을 통해 골드문트는 세상을 이해했고 앎을 통해 그 세상의 불안과 모순으로부터 안정을 되찾습니다. 한편으로는 사랑이 앎의 품에 안기는 모습처럼 보이는, '지와 사랑'의 결합으로 이 아름다운 소설은 마무리됩니다.


사랑을 상징하는 골드문트는 왜 진리와 앎을 상징하는 공간인 수도원에 들어갔을까요? 여기에 우리의 고민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펄펄 뛰는 뜨거운 열정을 가진 아이들을 책상에 앉혀야 하기 때문이죠. 즉, 각 가정의...'우리집 골드문트들'을 '수도원의 나르치스'로 만들어야 합니다. 이것이 실제로 수백년간 자녀교육의 핵심 명제였습니다.


당장 이 소설의 저자 헤르만 헤세 본인이 청소년 시절 수도원에서 신학도 생활을 하다가 실패했습니다. 너무나 엄혹한 환경이라 정신질환을 앓게 되고 학교를 벗어났죠. 이러한 자신의 이야기를 <수레바퀴 아래서>란 작품에 담기도 했습니다. 즉, 수도원을 뛰쳐나온 골드문트는 헤르만 헤세의 청년기의 투영이라면, 수도원에서 진리 탐구를 계속하는 나르치스는 중장년에 이르러 원숙해진 헤세의 투영입니다.


'겸손한 엘리트'라는 유형의 학습자는 소설 속 나르치스의 모습에 부합합니다. 나르치스는 세상의 즐거움보다 수도원에서 진리를 탐구하는 배움의 길을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골드문트가 경험했던 본성과 경험의 세계, 사랑과 분노 등 다양한 감정으로부터 벗어나 하루 하루 읽고 기도하고 성찰합니다.


그런데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를 읽으신 분이 많지 않고, 엘리트라는 말에 대해 거부감이 있고, 거기에, '겸손한 엘리트'라니 무슨 말인지 이해가 어렵지요? 그러나 '겸손한 엘리트'는 약 3천년 간, 대략 그리스 문명이 태동하던 시절부터 이어져 온 교육모델이고 현재에도 엄연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공동체에 존재하는 특수한 유형의 학습자로서, 과거에는 유학도, 선비 등의 모습으로 우리 사회에선 지칭되었습니다.


자, 이 글의 제목 그리고 주제는 '겸손한 엘리트'입니다. 서두에서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에 대해 다룬 문장 정도는 무리 없이 읽어내실 수 있을 것이라 믿고 글을 이어가보겠습니다.




어떻게 우리 아이를 세상으로부터 지켜낼까?


'겸손한 엘리트'의 첫번째 구성요소는 '우리 아이가 소중해'라는 부모의 마음과 그 실천입니다. 엘리트라고 하면 예나 지금이나 소위 말하는 귀족이라고 할 수 있겠죠. 아이가 상처입지 않고 성인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의지가 성공하는 자녀교육의 첫번째 요인입니다.


이게 과해서 '몬스터 학부모'같은 일들이 최근 꽤나 많이 발생하고 있지요. 왜냐하면 엘리트들은 존재하지만, 그들 본인이 겸손함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겸손하지 못한 엘리트들이 자녀를 키운다고 애를 학교에 보내놓으니, 자기들은 엘리트이고 교사들은 엘리트가 아닌 것으로 보이니, 오만불손하게 학교를 쥐고 흔드는 것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겸손한 엘리트'에 대해 이해하려면 '우리 아이를 지켜야해!'라는 신념을 이해하고, 우리 자신이 그것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헌신과 희생이 아닙니다. 우리 아이가 당연히 엘리트가 될 것이라 확신하고 그것에 마땅한 대접을 해주고자 하는 신념체계입니다.


이렇게 말하니 되게 고약한 것 같죠? 또 몬스터 학부모 이야기 같죠? 거꾸로, 기업이나 국가의 입장에서 생각해봅시다. 국가에서 학교를 경영하고 교사들 봉급을 주어가고, 국가장학금을 만들어서 교육을 해놓았는데, 그 소중한 인재들을 사고로 잃게 되거나 제 능력을 발휘할 수 없게 된다면 그건 너무 아까운 일 아닐까요? 또 기업에서도, 최고 수준의 엘리트들에게 그 비싼 연봉을 주는 것은, 그들을 다른 경쟁자에게 빼앗기지 않도록 하기 위함 아닐까요?


우리 아이가 소중하니 절대적으로 지켜야한다는 신념은 국가와 기업이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차이가 있는데, 국가의 입장에서 엘리트를 기르고 지키는 것이 공동체 안의 다른 누군가를 해치면서까지 이루어질 수는 없습니다. 기업의 입장에서도 소수 핵심 엘리트가 아무리 중요하다한들, 그들을 지키겠다고 다른 노동자들을 위협하며 기업의 기둥뿌리를 뽑으면 기업의 생명이 위태롭겠지요.


다시 말하지만, '우리 애만 소중하고 교사든 다른 집 자식이든 난 몰라!'라는 몬스터 학부모들의 심리는 올바른 자녀교육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그런 오해는 빼고, 요약해보죠.


1. 우리 아이는 세상 누구보다 소중하다. 우리 아이는 엘리트니까.

2. 우리 아이는 마땅한 대접을 받을 것이다. 우리 아이를 최고의 엘리트로 만드는 교육도 마땅히 이루어져야한다.

3. 단, 우리 아이를 보호하고 가르치는 것은 공동체의 보존과 똑같은 만큼만 중요하다. 우리 아이가 공동체에 우선하지 않는다.


이 세가지를 내면화하는 것이 '겸손한 엘리트'의 첫번째 구성요소입니다.




공동체와 겸손함


간단히 생각해보죠. '나'와 '우리 아이'를 '학교' 그리고 공동체보다 우선하는 자녀교육이, 과연 나중에 가족을 우선하며 부모에게 '효도'라는 결과물로 돌아올까요? 아니면, 공동체와 함께 균형잡힌 자아정체성이 형성되는 것이 가족을 우선하고 부모님을 존중하는 결과물로 돌아오게 될까요?


굉장히 쉬운 계산이죠. 당연히, 공동체와 동등한 수준에서 자존감을 갖는 것이 훨씬 더 좋은 교육이고, 당연히, '겸손한 엘리트' 가정은 그렇게 합니다.


연구를 위해 방문한 대치동의 가정의 모습은 강제로 공부만 시키니 아이들이 부모한테 반항하고, 부모는 마치 차가운 냉장고처럼 아이를 학원에 통조림 시키는 그런 분위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할머니 할아버지에 대한 애착이 넘치고 전문직 부모님을 존중하며 가족공동체 품에서 따스하게 자라납니다. 그러한 애착과 공동체성이 있기 때문에 초등학생들이 하루 열다섯시간씩 공부를 하면서도 정서적으로 체력적으로 무너지지 않고 버티는 것입니다.


가족 공동체가 아이를 함께 기르고, 아이는 가족 공동체 속에서 자라나며 겸손함을 내면화합니다. 학교에서도 자기보다 잘난, 자기만큼 잘난 아이들을 만나니 엉덩이에 뿔이 날 일이 없죠.


대치동에서만 이런 교육이 가능할까요? 당연히 아니죠. 이런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으로 대표적인 것이 종교가 있습니다. 이것이 국가철학으로 로마가 교회를 공인하고, 조선이 성리학 사회를 이룬 이유입니다. 교회에 가면 창세기부터 '세상의 질서'를 배우죠. 가정에서는 제사와 차례를 배우며 유교적 세계관을 학습합니다. 유교 전통이 해체되다 보니 아래와 같은 댓글도 횡행하나, '음식상에 절하는' 그 행위가 바로 유교적 질서입니다. 이것을 내면화하는 것이 공동체적 가치관을 학습하는 것입니다. 조선의 유학도들에게 제사는 가장 중요한 행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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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2f36b5-4335-4be3-b9f5-3ce9de9d3ab7.jpg 28일 가을 석전 및 공자 탄강 2568주년 기념식이 열린 서울 성균관 대성전 뜰. 헌관들이 대성전에서 걸어나오고 있다. [출처:중앙일보]


'겸손한 엘리트'들에게 겸손함이란 '세계의 질서=공동체=나의 존재의 근거=지식과 배움'이 하나로 통합된 결과로 내면화된 것입니다. 대치동의 아이들은 가족 공동체가 지금 누리는 삶이 곧 세상의 질서이며, 그것인 공부를 통해 시험에서 우수한 성적을 얻어 얻어진 것임을 이해합니다. 조선 사회에서 세계의 질서를 탐구하는 유학이 곧 삶의 진리였고, 중세의 신학 역시 그랬습니다. 니체가 신을 죽여버리기 전까지는 신의 존재가 우주의 질서와 올바른 삶의 근거로 명확히 자리했습니다.


정리하자면,


1. 그토록 소중한 나는 가족 공동체와 우리 가족이 살아가는 세상의 질서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2. 이 거대한 질서를 지키기 위해 나는 올바른 삶을 살아야 한다

3. 이 세상의 질서를 배우고, 그러한 배움에 나 스스로 겸손해야 한다


이것이 전통적인 겸손한 엘리트의 사고 방식입니다.


그리고 엘리트, 겸손한 엘리트


1. 가족 공동체의 질서 속에서 2. 배움에 대한 겸손한 자세를 내면화한 3. 혼신의 힘을 다해 공부하는 엘리트. 이것이 '겸손한 엘리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엘리트란 무엇일까요?


https://brunch.co.kr/@coexistence/1112

https://brunch.co.kr/@coexistence/1118

https://brunch.co.kr/@coexistence/1164


앞의 글에서, 저는 한국의 학생들이 18살 때까지 받는 교육에 대해 논의했습니다. 고등학교를 무난히 졸업한 한국의 학생들은 거의 다가, 엘리트 교육을 완수한 것이라고 보아야 마땅합니다. 아이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거의 대부분이 공동체 질서를 내면화하고, 이 사회구조가 강제하고 있는 학력주의에 승복하여, 하루에 10시간 이상 교복 혹은 편안한 츄리닝을 입고 학교와 학원을 오갑니다. 한국의 학생들은 대부분 엘리트 교육을 이수하고 있으며, 대학에 가는 것 자체가 원래는 엘리트를 위한 것이고, 이 사회구조가 그 모든 엘리트들을 다 받아주지는 못하고 있으나, 대신, 한국의 고유한 휴먼파워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다만 어디까지나, 앞의 두가지 요건에 대한 내면화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못하기 때문에 세번째 요건인 엘리트적 학습의 실천이 충만히 발휘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죠.


그러니까 저의 제안은 어떤 새로운 교육모델을 따라가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수행하고 있는 엘리트적 교육에 대해서, 그것이 결여하고 있는 부분을 과거의 사례를 토대로 이해하고, 보완하자는 것입니다. 지금의 자녀교육이 반드시 실패하는 것은 공동체적 가치의 내면화와 그에서 싹트는 겸손한 태도의 형성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태도로서의 겸손함이 아니라, '세계의 질서=공동체=나의 존재의 근거=지식과 배움'이 통합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3000년이나 이어져 온 매우 중요한 교육 모델이지만 현재의 한국사회에선 거의 모든 가정에서 경험을 해보지 못한 것이기 때문에 지금 실패하고 있습니다. 잘못된 엘리트적 학습관이 오히려 몬스터 학부모를 만들어내기도 하죠.


그러므로, 자녀교육에 있어서는 '공동체만큼이나 가장 소중한 우리 아이'라는 관점과 함께 지식에 대해, 공동체에 대해, 나 자신에 대해 겸손함을 유지할 수 있는 그런 엘리트적 학습관이 요구됩니다. 그것이 나르치스가 골드문트에게 보여준 모범적인 어른의 모습이었습니다. 나르치스가 있어 골드문트는 안식을 찾았습니다. 우리도 그럴 수 있을까요?


다음 글에서 이에 대해 차차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학습주도성을 중심으로 써낸 이 브런치북은 여기에서 종료됩니다. <공부 도파민>이라는 책으로 하나의 여정은 끝이 났네요. 이제부터는 '겸손한 엘리트'라는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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