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와중에 집에서 콩을 볶으며 사는 이야기
- 어케 이걸 집에서 볶으시는거죠
- 담에 함 강의해주셔요 ㅋㅋㅋㅋ
- 아항ㅋㅋㅋㅋ네
- 저도 원두를 사보고 도전을ㅋㅋㅋ
- 신기하죠? 퀄이 나쁘지 않죠?
- 나쁘지않은게아니라 ㅋㅋㅋ 맛잇어용
지난해에 우리 학교에 계시던 선생님이 잘~되어서 다른 학교로 갔다. 부장을 할 때 우리 학교에 새로 온 선생님이라 내가 많이 챙겨드리는 입장이었다보니 다른 학교를 가서도 종종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부장을 하면서 나는 우리 부서 선생님들의 커피는 내가 공급하겠다며 열심히 콩을 갈아 내렸는데, 원래는 하나 달랑 있던 드립퍼를 세개나 더 사서 동시에 네 잔의 커피를 내렸다. 믹스 커피가 아니라 하루에 한두번식씩은 따끈한 원두커피를 자리에 놓아두었으니, 우리 부서의 바쁘디 바쁜 일과에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었을까. 그 와중에 다른 한 선생님은 우리 부서에 계실 때 결혼도 했다. 아차 나도 결혼을 그때 했었군. 어쨌든, 그럭저럭 인연이 잘 이어지고 있고 커피는 여전히 열일 중이다. 다른 선생님을 통해서 내가 볶은 원두를 한 200그램? 정도 보내드렸고 생각보다도 훨씬 좋은 반응이었다. 왜냐면 진짜로 그 원두는 훌륭한 맛이었거든.
커피를 볶아서 먹기 시작하면서 여러가지 변화가 있었다. 가장 좋은 것은 내가 디자인한 블렌딩을 다른 사람에게 선보일 수 있다는 점이다. 호주의 Campos 원두의 그 복잡하면서도 밸런스가 잘 잡힌 맛은 내게 가히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어떻게 그 맛을 다시 즐기나...한 며칠 고민을 한 결과가 직접 커피를 볶는다는 선택지였다. 물론 돈만 충분히 지불한다면 좋은 커피를 어디서라도 구해서 먹을 수는 있겠지만 말이다. 게다가 요즘 호주 스타일의 블렌딩을 제공하는 카페들도 제법 있다고 하고. 그러나, 정말 만족스럽게 마실 수 있는 원두를 찾기 위하여 나는 얼마나 많은 커피를 테이스팅해야 할 것이며, 몇개의 200그램 봉지를 주문해서 뜯고 또 갈아야 한다는 말인가.
그런 점에서 원두를 볶는 것은 확실히 보람 있는 과정이다. 처음 샀던 세가지 원두에 이어서 또 다시 세가지 원두를 더 샀다. 블루마운틴과 게이샤, 코케 허니다. 그리고 원두를 볶는 방법도 바꿨다. 원두는 직화에 굽기도 할정도로 열전도율에 민감하다. 그러니, 집에 있는 가장 작고 얇은 라면냄비를 골랐다. 마침 뚜껑이 유리다. 뚜껑을 단단히 잡고 빠르게 냄비를 흔들면서 볶으니, 와, 훨씬 낫다. 벌써 2kg은 되지 싶을 정도로 많은 생두를 수업료로 치렀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래봐야 고작 3만원 치다. 여섯가지나 되는 원두를 한번 이상씩 두루 볶아보니 볶는 온도, 빼내는 시간, 이후의 레스팅 과정 등등 뭐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무엇보다도, 콩의 품질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도 알았다. 균일가 수준의 게이샤 원두는 도통 아무리 정성들여 볶아보아도 영 마뜩찮기만 하다. 반면 기대를 하지 않았던 블루마운틴은 굉장한 맛이다. 신선한 생두를 꽤나 잘 관리해서 판매한듯, 뜻밖이라고 할 정도로 정말 잘 볶였다. 맛도 최고. 커피의 산미와 과일향은 서로 다른데, 블루마운틴의 오렌지향은 산미와는 확실히 다른 풍미로 코를 간질인다.
"오빠 뭐 마셔?"
"아무거나."
(잠시 후)
"...이건 뭐지."
"민트라떼래."
"(침착)"
그 사이에 나는 마침내, 바깥양반과 다니는 카페 투어에서 완전한 자유를 바깥양반에게 줄 수 있게 되었다. 원래 바깥양반과 카페를 다니며 나는 라떼조차 마시지 않았다. 커피의 맛을 제대로 즐기게 되면서부턴 오로지 아메리카노, 그것도 뜨거운 것만 마시곤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직접 원두를 볶으며 다양한 맛을 즐기게 되니 카페에서 사 마시는 아메리카노에 대해서 더 이상 미련을 가질 필요가 없었다. 사실 바깥양반이 커피의 맛을 중시해서 카페를 고르는 것도 아닐뿐더러, 조금 괜찮다 싶은 카페도 대개는 싱글오리진이다. 그럴 바에야, 서투르더라도 서너개의 원두를 볶아두고 하루 하루 숙성되어 가는 맛을 즐기는 것이 훨씬 즐겁고 배워가는 것도 많다. 물론, 카페에서 마시는 커피에 대한 기대를 버린 댓가로 바깥양반이 이따금 내게 얼토당토 않은 커피 메뉴를 들고 오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민트라떼는 정말 별로였다. 카페는 대단히 유명한 곳이였지만.
그렇게 몇달이 훌쩍 지나가던 어느날, 마침내 내가 오랫동안 찾아헤메이던 커피의 맛이, 내가 손수 볶은 원두에서 나기 시작했다. 에티오피아 자반토. 처음 두어번의 로스팅에선 맥없이 실패해 떫고 시기만 했는데, 경험을 쌓아서 제대로 볶아내니 정말 훌륭한 맛이었다. 갓 볶아서 열을 식힌지 몇분 되지 않아 갈아서 커피를 내려보니 와, 꽃향기가 잔에서 진동했다. 우리나라의 그 어떤 커피전문점에서도 원두에서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내가 찾아헤메던 플로럴한 생두를 찾아낸 것이다. 너무 행복하고 즐거운 발견이었다. 자반토를 베이스로 블루마운틴과 조합하면 산뜻하고 품격 있는 맛을 내줄 것 같았다.
그래서 완성된 것이 지난주에 선물로 보낸 원두였다. 블루마운틴과 자반토를 1:1로 조합했다. 캐러맬한 원두를 찾아서 셋을 블렌딩했다면 더욱 좋을 테지만 그것은 얼마든지 천천히 해도 된다. 블루마운틴의 라이트하면서도 깊은 맛이 자반토의 플로럴함과 오일같은 바디감을 만나니 내가 원하던 커피의 맛에 90% 정도는 근접해 있었다. 내가 이런 원두를 블렌딩해내다니!
그리고 한가지 보너스랄까. 블렌딩 이름을 작명하는 것도 꽤나 즐겁고 행복하다. 완성한 블렌딩은 이제 딱 하나인데, 만들어놓은 블렌딩 이름은 벌써 열댓개는 된다. 레스타 & 루이(뱀파이어와의 인터뷰), 라젠카(그...영혼기병 라젠카라고...아시나?), 리버 오브 드림(빌리 조엘의 노래), 레베카(히치콕의 영화, 뮤지컬) 등등. 카페를 차리기까지는 한 20년은 더 남았지만, 이런 꿈을 꾸며 하루 하루 콩을 볶고, 새로운 생두를 골라보는 행복은 참으로 커피 향처럼 감미롭기만 하다.
그런고로, 나는 자유롭다. 어디서든 더는 어떤 커피에도 매달리지 않게 된, 그리고 타인의 손으로 볶아진 원두의 맛이 어떨지 전전긍긍하지 않게 된. 내가 콩을 고르고 그 볶음도와 블렌딩을 내가 택할 수 있는 자유. 한바탕 비가 내려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오늘 같은 밤이면, 나는 그 자유를 만끽하며 또 어떤 콩을 볶을지 고민을 시작한다. 자유. 프리더어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