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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존 Feb 27. 2021

라구 소스에 베지마이트 끼얹은 남자

쇠고기는 저렴하고, 라구는 홈레시피로 하고 싶어서.

 올리브유가 떨어졌다. 파도 떨어졌다. 그리고 바깥양반은 과일쥬스가 떨어졌다. 딱 요 정도 간단한 동기만을 가지고 퇴근길에 함께 마트에 들렀다. 그런데 본능은 정육코너로 날 이끈다. 분명히 소고기가 쌀 거다. 


 정육코너엔 과연 미국산 쇠고기가 가득하다. 국내에선 잘 유통되지 않는 셀렉트 등급도 보인다. 공교롭게도 스태커 와퍼와 아웃백의 경험 전인 지난주에 나는 MBC의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마블링의 진실에 대한, 건강하지 못한 우리 쇠고기 문화를 알리는. 그러니까 지금 우리의 한우 등급제는 미국에서 온 것이고, 미국의 3등급제에 더하여 우리는 마블링이 얼마나 더 꼈느냐에 따라 "쁠"과 "쁠쁠"을 등급에 더해놓았다. 귤이 회수를 건너니 탱자가 된 또 하나의 사례라고 해야 할까. 어쨌거나 저쨌거나, 쇠고기가 저렴한 참에 갈아져있는 고기를 집었다. 마침 딱 라구를 하고 싶었다. 

 집에 와서 당근을 찾았다. 다행스럽게도 딱 좋은 분량이 냉장고에 있다. 퍽 오래됐는데 거의 상하지 않았다. 역시 뿌리채소라 그런 걸까. 작은 냄비를 꺼내 후다닥 채쳐서 냄비에 담고, 양파를 채치는 동안 먼저 버터와 볶는다. 이어서 양파를 넣어서 충분히 양파에서 즙이 빠질 정도로 볶았다. 캐러멜라이즈 될 정도로 볶으면 좋겠지만 글쎄 또, 나는 지금 세가지 요리를 동시에 하고 있었다. 감자전과 감자샐러드를 만들어 저녁을 차린 뒤 대충 걷어내고 만드는 라구다. 시간을 충분히 투자하기 어렵다. 


 그런 상황이니, 원래는 토마토 페이스트를 따로 만들어서 라구에 투입해야 하지만 그런 절차도 단축되었다. 생토마토로 페이스트를 만드는 데에만 최소 30분이 따로 소요된다. 그럴 순 없지. 어차피 라구를 만들려면 충분히 끓여야 하니, 그때 토마토의 수분은 날아갈 것이다. 욕심을 내어서 올리브유와 버터를 많이 넣으면 라구가 끓여지면서 동시에 볶아지는 효과도 날 테지만 그렇게 하고는 싶지가 않다. 토마토 두개를 썰어서, 넉넉히 볶아진 양파와 당근에 넣었다. 그리고 허브솔트를 넣고 다시 또 한참을 볶는다. 간은 약하게. 

 토마토를 볶으면서 나는 한가지 엉뚱한 생각을 했는데, 그것은 영국과 호주에서만 먹는 베지마이트/마마이트 페이스트다. 원래 정규 레시피엔 라구에 우유와 와인 그리고 치킨스톡이 들어간다. 그런데 일단 버터가 들어가 있으니 우유가 필요없지 않을까? 냉동실에 보관중인 크림스프 분말로도 대체가 가능하다. 정규 레시피를 따라하기보단 냉장고를 먼저 털어야겠지. 와인과 치킨스톡은 베지마이트로 대체가 되지 않을까? 풍미를 내기 위한 것이니까 말이다. 


 베지마이트/마마이트는 영국과 호주에서 먹는 짜고 춘장냄새 나는 별식 정도로 한국인들의 시각에선 보아지지만 간단히 말해서 "감칠맛"을 내는 방편이다. 고농도로 농축된 글루타민산, 다시말해 MSG덩어리. 그런데 베지마이트의 경우 허브, 소금, 이스트로 만들었으니 채식성 자연 식재료에 가깝다. 치킨스톡보다 윤리적이다. 와인의 풍미에 비할 바는 못되지만 라구 만들겠다고 평소에 마시지도 않는 와인을 살 수는 없지. 홈레시피에서는 무엇보다 식재료가 중요하다. 게다가, 사실 오늘 라구를 만들 생각도 아니었다. 냉장고에 들어있는 재료들을 검토해보고 내일쯤 만들까 하던 참인데 당근과 양파 토마토와 쇠고기가 갖추어진 상태이니 일단 시작을 하고 본 것이다.


 두 해 전에 "수업용"으로 친구가 사서 내게 하나 준 베지마이트가 냉장고에 그대로 있다. 친구는 <영어권문화> 라는 과목을 가르쳤다. 호주 관련 단원을 보고 "호주의 맛을 느끼게 해주마"라며 교육예산으로 베지마이트를 한박스 사서, 아이들에게 빵과 함께 먹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수업이 끝난 뒤에 가져가고 싶은 아이들은 가져가라고 했는데 거의 들고 가질 않았단다. 남은 베지마이트가 몇통 있어 친한 술친구들 끼리 나눴다. 그래서 내게 한통이 왔는데 바깥양반은 쌀밥충인 때문에 우리집 베지마이트는 거의 그대로 보존되고 있었다. 


 자 그러니까, 베지마이트의 풍미와 감칠맛이면 와인 그리고 치킨스톡을 대체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성공일까 실패일까. 나는 고민을 마치고, 충분히 볶아지고 있는 라구소스에 베지마이트를 반 스푼 떠서 집어넣고 살살 풀었다. 반스푼이면 충분하다. 고추장보다 세배 정도는 농축된 놈이니까.  

 그렇게 라구는 비밀을 가득 품고 보글보글 끓어지기 시작했다. 원래는 쇠고기도 볶으면 좋겠지만 어차피 오래 끓일 것이라 볶지 않고 그대로 넣었다. 이쯤 되니 완전히 야메 레시피다. 토마토 껍질을 벗기지도 않았다. 페이스트를 만들지도 않았다. 와인, 넣지 않았고, 우유, 넣지 않았다. 크림스프 분말을 쓸까도 생각했지만 굳이 필요치 않겠다. 토마토까지 볶느라 버터가 제법 들어간 상태다. 쇠고기, 볶지 않았고, 치킨스톡 넣지 않았다. 그 대신 토마토즙으로 만들어진 무수분 요리다. 물 한방울 들어가지 않았다. 베지마이트의 풍미가 충분히 라구에 깃들어진 상태인데다, 갈아넣은 쇠고기가 600g 정도라서 충분히 육향은 날듯하다. 야메 요리가 나올까 백종원 레시피가 나올까? 

 라구 소스를 만든 다음날 다시 마트에 들렀다. 생각해보니 페투치노가 아니면 라구 파스타스럽지가 않다. 사는 김에 링귀니도 샀다. 요리 욕심 때문에 자꾸 이런 저런 면들이 찬장에 쌓인다. 파스타를 골라 후딱 마트를 나오려는데, 국거리멸치가 눈에 띈다. 사고 싶다. 살까? 오늘은 참아야지. 가벼운 마음으로 들른 마트라 쇼핑가방도 없다. 겨드랑이에 페투치노를, 팔을 접어서 링귀니를, 손에는 파르팔레를 들고 한 손으론 카드를 주머니에 집어넣는데, 바깥양반에게 톡이 왔다.


- 마트야? 어디로 갔어?

- 응. 동네 홈플. 그래도 파스타는 여기서 사는 게 나을듯해서.

- 베라 사와용 엄마는 외계인이랑 쿠앤크


 ...이렇다니까. 가뜩이나 손도 없는데. 마트 1층으로 내려가 테이블 위에 파스타들을 우수수 내려놓고 주문을 했다. 금요일 밤이니 아이스크림 정도는 어쩔 수 없지. 그래도 덕분에 작은 쇼핑백이나마 생겼다. 파스타면들을 아이스크림 백에 밀어넣은 뒤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집에 와선 페투치노를 삶으며 대망의 라구를 개봉하는데, 이게 말이지. 어제 두시간 가까이 끓여낸 것이라 괜찮게 졸여져 있다. 차갑게 식은 것을 슬쩍 떠보니 찰진 느낌이 손에 전달된다. 끓여보면 결과를 알겠지. 야메 레시피냐 백종원 레시피냐. 아 일반적으로 가정에 베지마이트가 있진 않으니, 베지마이트가 들어간 라구가 애초에 백종원 레시피가 될 순 없겠구나. 와인과 치킨스톡을 한꺼번에 대체한 방편일 따름이지만.


 어쨌든. 저녁 식사는 준비되었다. 라구 페투치노의 그 맛은 뭐랄까. 두구두구두구. 지금까지 내가 만든 파스타 중에 가장 맛이 좋았다. 페투치노도 딱 좋게 삶아졌고, 냉동실에서 치즈를 찾지 못해 대신 뿌린 마파산 가루가 그래도 제 몫을 해주었고, 무엇보다도 라구가, 라구가 너무나 맛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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