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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존 May 03. 2021

프로편식러가 입덧을 한다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요리가 딱 두개라는 것

"바깥양반. 잠깐만."

"왜-?"

"반창고 하나만. 다쳤어."

"헐. 조심 좀 해."


 보통 사고는 익숙하지 않은 동작을 할 때 터진다. 3월의 한파로 대파대판이 터졌을 때 겨우 4500원짜리 파 한단을 발견해 손질해뒀던 한 통. 파 세줄기가 남아 적잖이 상해 있었다. 모두 꺼내 살릴 것은 살리고 버릴 것은 버리는데, 파를 제대로 손질하는 것도 아니요, 이리 저리 위를 따고 아래를 따고 하는 손놀림을 재게 하다 보니 그만 톡 하고 검지 끝을 칼 밑끝으로 찌르고 말았다. 아프다기보단 성가신 문제. 잠깐 손을 멈추고 바깥양반에게 반창고를 부탁해, 대강 떼우고 나서 나머지 재료들을 손질했다. 갈 길이 아직은 멀다. 오늘도 국수다.

 

 점심을 먹고 나서 당근마켓 거래를 했다. 아빠가 읽어주는 태담 동화라나. 7개월 난 아이의 아버지와 만나 후다닥 책을 거래하고, 오는 길에 마트에 들러 국숫거리들을 사왔다. 호박에 당근. 그런데 영 심심한 것 같아 뭘 더하면 좋을까 하다가 유부를 샀다. 바깥양반이 좋아하는 재료이기도 하고, 잔치국수와 크게 틀어지지 않으면서 어울릴 수 있을 것 같고. 국수의 맛을 거스르지 않으려거든, 한번 끓여내서 물을 짜도 좋을 것이다. 손이 바쁘게 돌아갈 것 같으면 그냥 둬도 되고. 그래서 오늘은 일단 그냥 둬보기로 했다. 반창고를 한 채로 유부를 차차 썰어서 다른 고명들과 함께 마련해두고, 대망의 국수 삻기다. 한 웅큼 가득 면을 뽑아 끓는 물에 담았다.


 면이 뭉치치 않게 계속 이리 젓고 저리 젓고 있으니 뭉근한 내음이 주방을 채운다. 어라 이거 꼭 콩물 느낌. 예산 국수가 유명하긴 한가 지난번 열무국수 이야기에 오간 정담들이 퍽 많다. 그런데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다른 국수 면을 끓일 때랑 냄새 자체가 다르니 막상 이 향기를 맡은 사람들은 그 맛에 대한 기억이 남다를 수 밖에. 소금이 많이 들어갔다던가. 제분한지 얼마 되지 않은 싱싱한 밀가루에서 느껴지는 그 고소한 향이 마치 콩물같고 마치 바게트 같다.


 그러나 손가락에 반창고를 붙인 채로는 면발을 씻을 수도 없고 고명은 모두 손질을 마치긴 했지만 불편함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면을 끓이는 동안에 시간이 충분히 지나 피가 그친 것을 보고 반창고를 떼넨다. 물로 씻어내고 그릇을 차차 내어 식탁에 올린다. 잔치국수. 100명을 먹이기엔 더 없이 수월한 음식이지만, 단 둘이 먹기엔 더 없이 번잡한 음식을.

 어째서 오늘도 잔치국수일까. 예산국수가 짱이라서는 아니고, 내가   있는 집밥이 지금은, 김밥과 잔치국수  두개. 비빔국수도 아니고, 열무국수도 아니고, 들기름국수도 아니다. 오로지 입덧이 한창인 바깥양반이 먹을  있는 집밥은 오로지 잔치국수, 그리고 김밥.


 프로편식러인 바깥양반의 입덧은 우리 식생활을 당연히도 심대히 뒤바꾸었는데 평일엔 그나마 고민이 덜하다. 내가 글쎄, 밥을 지어서 바깥양반을 기다리고 있는데 자기가 퇴근길에 배달음식을 주문을 해서 날 먹이더라니까. 월화수목금 매일 외식을 하듯 바깥양반의 취사선택에 따라 배달음식 잔치, 드물게 외식 한번쯤이다. 그러나 지금은 다른 지출도 없고, 입덧 때문에 하루 한끼를 겨우 챙겨먹는 바깥양반에게 즐겁고 만족스러운 저녁식사는 도저히 포기할 수 없는 문제다. 그런데 주말이라면? 아침은 거른다고 치고 토요일과 일요일 네끼를 집에서 먹어야 한다면?


 보통은 이런식이다.


"볶음밥 할까?"

"아니야."

"LA 갈비 사다놓은 거 있는데."

"안땡겨."

"후...김밥할게."

"좋아!"


 나는 오는정김밥을 흉내내어 만든 그 주말에 또 김밥을 말고야 말았다. 똑같이 네 줄. 비록 유부는 없지만 똑같이 햄을 따로 볶아 밥과 버무려서. 그런데 또 며칠만에 만드는 것이다보니 훨씬 이전번보다 잘 되었다. 시금치에서 물기를 쫙 짜낸데다가 밥의 기름기도 덜하다. 이렇게 일요일 점심 한 상을 차리는데 꼬박 한시간이 걸리지만, 내가 만든 밥으로 한 끼니 차려드시니 그 얼마나 다행이랴.

 매일 같이 배달음식을 주문해 먹는 것은 고민에 또 고민이 수반되는 문제다. 배달음식 중에서도 임산부가 즐길만한 메뉴가 몇개 없다. 매운 음식을 잘 먹지 못하게 되는 문제도 있고, 고기 냄새가 찐한 음식도 안되고. 한달쯤 전엔 용기를 내어 곱창을 시켜먹어봤다가 이내 탈이 났다. 그렇다고 매일 같은 음식을 할 수도 없고. 그나마 내가 뭐라도 차려보려니, 그만 손이 많이 가는 김밥, 아니면 잔치국수다.


 이상하게도 바깥양반은 잔치국수를 잘 먹는다. 문제는 내 잔치국수가 그렇게 맛이 있지 않다는 것인데, 둘이서 하는 살림에 국물에 무도 넣고 다시마도 넣을 깜냥이 되지 않으니 나는 멸치만 겨우 넣고 팔팔 한 30분 끓여 국물을 낸다. 다시다를 함부로 넣었다간 설탕물처럼 맛이 바뀌어버리고 인내심으로 끓여낸 멸치육수가 다 맛이 지워져버린다. 그러니 나는 자연히 멸치에 소금 약간 쳐서 국물을 내고, 그럼 또 그 심시~임한 국물을 당근과 호박 고명, 지단과 함께 우리 프로편식러께서는 맛있다고 드신다. 세상에나 이, 손만 많이 가고 비효율적인 음식을.

먼젓번의 김밥
먼젓번의 잔치국수. 호박이 없네.

 그래도 입덧 심한, 프로편식러인 임산부가 한그릇 다 비울 수 있는 메뉴가 있는게 어디야. 나는 그릇에 면과 고명을 담으며 피로를 덜어낸다. 어린이날이라 이번주엔 강의 두개가 휴강이다. 교수님께서는, "우리 대학원생 어린이들 놀아야지?"라고 말씀하셨는데 두달간 긴장상태에 묶여있던 몸이 조금 이완의 기회를 얻어내자 온갖 보상에 목말라하고 있다. 책을 읽긴 읽되, 도무지 진도를 내지 못하는 주말이었다. 누워서 몇장 읽다가 잠들고, 다시 일어나 책을 읽다가 잠들기만 반복했다. 가장 큰 보상이 잠이라니 내 5월의 주말이 처량하기도.


 그런 나의, 입덧에 고달픈 바깥양반의, 저녁으로 잔치국수라. 내 손으로 또 한시간의 노동이었지만 괜찮다. 나쁘지 않다. 고명을 면에 올리는 즐거움만으로도 한가로운 편안함이 몸에 퍼진다. 여기에 국물을 넣기 전, 나는 미리 만들어서 식혀둔 열무 국물도 따로 내었다.


 나의 계획은 이것이다. 잔치국수를 하긴 하지만, 열무국수도 나는 먹고 싶다. 그래서 큰 그릇에 잔치국수를. 작은 그릇에 열무국수 국물을 내서 상에 올린다. 잔치국수를 먹다가 열무국물도 먹고, 넉넉히 말아둔 국수를 말아서도 먹고. 야! 완벽해!


"뭐야 이건?"

"열무국수도 먹으라고 같이 냈어."

"아 아니야 나 매운 건 싫어."

"응 괜찮아 국수 먹어 국수."

"응."

"유부 어때? 넣기 잘한것 같아?"

"응."

"이거 간장도 좀 치고."


 아직 일이 끝나지 않았다. 나는 김치냉장고에 가서 엄마가 며느리 먹으라고 만들어주신 장조림을 덜어온다. 고기내음이 진해서 바깥양반이 잘 먹지 못하지만, 잔치국수에 탁 하고 올려먹으면 또 이만한 게 없을터.


 모처럼, 허름한 잔치국수가 아니라 장조림에 열무국수까지 합쳐진 풍성한 식탁이었지만 프로편식러, 입덧 에디션, 바깥양반은 잔치국수만 한그릇 탁 비우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보들보들 열무를, 멸치육수가 합쳐진 시원하고 삼삼한 국물과 함께 말이 마저 싹 다 비우고 주말을 마감한다. 아무것도 한 것도 없는 것 같지만 나도 바깥양반도 수고했다 오늘도.

매거진의 이전글 물론 열무국수는 먹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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