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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존 Apr 08. 2021

스스로 불러온 재앙에 짓눌려

김밥은 접시를 가리우며

“아 속이 안좋아.”

“곱창.”

“하지마.”

“흑돼지삼겹살.”

“쉭.”

“오는정.”

“어? 해줘.”

“어?”

 언제나처럼은 아니고...오늘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이 되었다. 바깥양반이 누워서 입덧에 무기력증을 앓고 있길래, 나는 놀려먹겠다고 그걸 가서 굳이 바깥양반이 좋아하는 음식을 귀에다 대고 속삭이듯 하나 둘 읊었을 뿐인데 거기서 오는정 김밥에 콜이 나올 줄이야. 오는정김밥이라. 오는정김밥. 제주도에 가면 바깥양반이 매일이라도 먹겠다며 반드시 들르게 되는 오는정김밥.


 게다가 바깥양반은 철두철미하게도 내가 빠져나갈 구멍을 하나 둘 막았다. 다음날 점심시간 때쯤, 나에게 오는정김밥의 레시피를 링크로 보낸다. 유부랑 햄을 바삭하게 볶아서. 올리고당 약간 식초 조금 간장 쫄쫄해서 만들면 오는정 김밥.


 게다가 오늘은 퇴근시간이 다가올 때쯤이 되자 또 카톡을 한다. - 김밥재료 사와요. 아니 이거야 원. 화요일 수요일 이틀간이나 야간 강의를 듣고, 기말 프로젝트 과제 때문에 자정까지 책을 읽고 잠드는 남편에게 너무한 거 아니냐고 이거.


 라고 말하고 싶지만 재앙은 내 입술 사이에서 튀어나온 것이었다.

 그래서 만들었다. 모든 직장인들이 피로감에 쩔어간다는 목요일. 그것도 나는 화요일 수요일 야간 강의를 하고 난 목요일. 그리고 내일 123456 교시 수업을 하는 목요일. 임산부가 먹고 싶은 음식은 절대로 거부할 수도 도피할 수도 없다는 엄격한 고대로부터의 계율에 따라서 집에 오는 길에 시금치에 단무지에 우엉을 사가지고는. 집에 오자마자 서둘러서 유부를 먼저 잘라서 볶기 시작하고야 만 것이다.


 시금치의 풋내는 어김없이 생생한 철분의 센티멘트를 주방에 남기고. 작년에 바깥양반이 도시락을 싸달라고 하기 시작했을 때 사서 얼려뒀던 햄은 우선 다지듯 잘라서 밥에 버무릴만큼을 따로 볶아낸 다음, 김밥속으로 쓸 것을 따로 볶았노라. 계란 세알을 까서 후라이팬에 풀어낸 뒤에 살살 모양을 다듬어 반으로 접어낸다. 평일 퇴근 시간 후의 김밥이라. 그것도 밥알에 볶은고명을 버무려서 만든다는, 너는 정녕 오는정김밥이란 말이더냐.

 그러나 나의 그런 야속함과는 반대의 길로 시간은 무상하게도 흘러 흘러 야구가 시작했다. 그만큼 김밥을 만들기 시작한지 한시간이 되었다는 것이지~. 우리 한화이글스의 주황색과 같은 당근을 꺼내 채를 쳐서 후라이팬에 또 올리고, 헹궈서 데쳐낸 시금치는 물기를 탈탈 털어 챔기름과 소금과 깨소금을 넣어 버무렸다. 아아 김밥에 들어갈 시금치란 이다지도 꽉 짜야하는 것이었거늘. 접시에 버무린 시금치 나물을 담았을 때 그만 초록색 국물이 흐르는 것을 보고야 말았다. 김밥재료는 끝내 반 이상이 남아버릴 것이므로, 나는 베르테르가 로티를 그리는 심정으로 다음에 또 김밥을 말아낼 날을 기다리게 될 것이다.


 밥이 다 되었다. 안 그래도 겨우내 다 먹어가던 식량이 오늘 김밥 네줄을 말 만큼. 딱 그만큼만 남기고 쌀통에 쌀이 떨어졌다. 운명인지 징조인지. 햇반으로 김밥을 마는 일은 면했음을 다행스러워하며. 고슬고슬 잘 익은 현미귀리밥을 퍼내어 양념을 하면서 엉망이 된 싱크대를 정리한다.


 김은 파래김이요 곱창김은 아니러니. 나는 길쭉한 면을 세로 방향으로 하여 김밥 마는 발을 깔고 손을 다섯번째로 씻었다. 재료 하나에 비누질과 재료 하나에 비누질과 재료 하나에 한화이글스와 재료 하나에 최강한화, 최강한화. 3점을 먼저 주었구나. 어쩐지 어제 17점이나 내고 운세가 좋더라니.

 이런 젠장할. 재료들을 물을 빼지 못해서 첫 김밥부터 옆구리에 시원하게 구멍이 나 버렸다. 나는 그것을 그대로 쭉 짜서 발 사이로 기름을 빼낸다. 다음에 시금치를 버무린다면 반드시 두 손으로 꽈악 짜고야 말리라. 다음에 김밥을 한다면 일단 물기를 다 날리고 간을 하리라. 유부와 햄을 볶아서 넣는다면 그조차 기름을 싹 다 빼고서야 넣으리라. 어머ㅓ니(의도적 오타). 나는 재료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봅니다. 한시간 넘게 침대에 누워있는 바깥양반의 이름과, 순대, 족발. 이런 입덧음식들의 이름과, 벌써 80구나 던져버린 우리 투수의 이름과...어어어! 역전! 역전! 이야아아아최강한화최강한화!! 나는행복합니다나는행복합니다나는행복합니다이글스라행복합니다!


 그렇다. 한화처럼 나는 승리하고야 말았다. 김밥의 물기가 조금 마르도록 기다렸다가 썰어내니. 네줄의 김밥이, 한화의 주황색을 채운 그대로 옆구리가 터지지 않고 접시에 담기고야  것이다. 나는 바깥양반을 불렀다. 다섯발자국 멀리 떨어진 침실일 뿐인데, 그러나 바깥양반은 한참 뒤에나 나왔다. 입덧 때문에 식단관리가 되지 않아 하루에 한끼 겨우 제대로 먹으면서도 날로 배도 살도 부풀어오르고 있는 바깥양반은 우울한 얼굴로 자기 배를 쓰다듬더니 김밥을 보고서야 자리에 앉았다.


"김밥이 왜 이렇게 커요? 아 그리고 베란다 문 닫아 추워. 아 김밥은 흰밥으로 해야지 오는정인데."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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