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 C.S.Lewis -

by 공존 Apr 28. 2021

물론 열무국수는 먹었습니다.

Feat. 예산국수라는데요?

 포장지에 뭐 인쇄된 게 없네.


 아침에 일어나 물을 올리고 찬장에서 국수를 꺼내보고 나는 생각했다. 유명한 국수 면이라고 예산에서 엄마가 사오셨는데, 막상 열어보니 가게 이름도 뭣도 없다. 보통 이러면 전통이 있는 집이란 거겠지. 그런데 예산이 국수로 유명한가? 어릴 때 대전에서 태안을 오가며 예산을 자주 거쳐갔지만 그런 소문은 듣지 못했다. 하기사 그 시절에 홍성인가 청양에서 자주 차를 세우고 돌솥밥을 먹곤 했는데 그런 집이 입소문을 탔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으니 세상은 넓고 요식업이야 많기도 하지. 물이 끓길 기다리며 식탁을 좀 정리하고 김치도 꺼내둔다. 

 

 아침 댓바람에 열무국수라니 아직은 날씨가 서늘하긴 하다만, 바깥양반이랑 하루 한끼 먹는 처지에 저녁상에 올릴 메뉴는 되지 못한다. 입덧이 아직 끝나지 않아 김치 내음만으로도 힘들어한다. 학교에서도 급식은 못먹고 교무실에서 몇몇이 모여서 음식을 나눠 먹는다는데 바깥양반은 튀김우동 컵라면이 잘 받아 매일 그것만 먹고 있는데, 부장님이 꼭 김치를 꺼내신다고. 그런 풍경을 아는 사람들은 익히 떠올리겠지만, 인심 좋은 사람이 공동취식을 위해서 큰~ 통에 김치를 넉넉~히 담아오셨단다. 어쨌든 입덧이 끝나야 할 노릇이지만, 하루 하루 감당해나가는 바깥양반의 노고는 크다.


 그런 바깥양반과, 저녁식사 하루 한끼를 대학원 수업의 틈바구니에서 먹어야 하는 나의 사정도 무척 곤란한 요즘이다. 화, 수요일엔 6시에 강의가 있다. 다행히 코로나 덕분에 줌으로 집에서 강의를 들을 순 있지만 집에 와서 저녁을 뭔가 차리기엔 촉박해도 너무 촉박하다. 하릴없이 어떨 땐 포장, 어떨 땐 배달. 그러고 나면 또 바깥양반의 입덧 사정을 보아서 집에서 뭔가 튀기고 볶는 요리는 하기 어려워진다. 그럼 목요일엔 또 배달, 금요일엔 또 포장. 나는 바깥양반과 하루 한끼를 같이 먹고, 바깥양반은 하루 한끼를 갖춰먹는 게 저녁식사가 되어 있으니 그만큼 바깥양반과 집밥을 먹긴 힘들다. 하여 나는 오늘 벼르고 벼른 열무국수를, 아침에야 말아먹는 것이다. 


 그런데 면을 삶아내고 보니 생각보다 굵다. 중면보다 조금 더 굵다. 어릴 땐 국수면은 소면만 있는 줄 알았고, 물론 시원한 멸치국물에 말아서 후루룩 삼키는 그 섬섬옥수의 보드라운 맛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각종 미식이 유행하고 제주도의 고기국수가 이름이 알려지면서는 나도 집에서 중면을 즐기게 되었다. 물론 잔치국수만은 여전히 소면이 최고라지만, 비빔국수에도 열무국수에도 중면의 그 탱글탱글함은 넉넉한 기쁨이다. 입 안 가득히 면을 씹고 있노라면 스르르 풀어져 사라지는 소면과 달리 혀에 달라붙고 이 사이에 늘어붙는 그 중면의 식감. 예산에 중면을 잘 뽑아내는 집이 있었나보다. 나는 면을 식히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두어번 대충 헹궈서 탁 하고 그릇에 담았다. 


 열무김치를 작은 통에 옮기면서 국물을 따로 조금 빼두었는데 아무래도 아쉽다. 열무김치 국물을 그대로 쓰는 것은 아무래도 간도 너무 세고 염분도 많아서다. 멸치국물을 좀 내서 냉장고에 식혀뒀다가 하나로 합쳤다면 딱 좋았을법. 그런데 또 바쁘다는 핑계로 그런 밑장만은 해두지 못했다. 어제 저녁은 뭘 했더라. 5시반부터 10시까지, 조모임과 수업을 함께 치렀다. 제면기 틀에서 실처럼 하얗게 뽑혀나오는 밀가루반죽처럼 나의 하루하루가 그렇게 뽑혀져나오고 있다. 뜨거운 국물에 푸르륵 잠겨, 한바탕 삶아지고 나온 면발처럼. 비는 시간 내내 글자를 읽고 쓰고, 수업에 풍덩 빠져, 한바탕 삶아져서 시원한 바람처럼 짧은 여가를 맞이한다. 그래 국수. 가늘고 길게 백세처럼 살라고 국수를 먹는다지. 수업을 마치고 논문을 읽고서 자정을 넘겨 과제를 제출하고 잠에 든 나의 공부가 길게 길게 이어질지 모르는 일. 


 국수가 그러한 공부의 순백이라면 열무김치는 새빨간 유혹이겠다. 주말에 바깥양반께서 생일선물로 게임기를 사주셨다. 내가 조금 많이 졸랐다. 그래서 일요일에 게임기를 설치하고, 예전 것은 정리하고 당근마켓에 올린다고 두어시간을 허비했다. 흰 면에 감기는 빨강 국물에 초록 열무처럼, 내 삶을 둘러싼 즐길거리들. 맛난 음식이며 술이며 게임이며 친구들과의 한담이며. 면은 면대로 쫄깃하고 열무는 열무대로 아삭하지만, 그것을 따로 따로 먹을 수만, 혹은 하나만 먹고 살 수는 없는 것이 삶인가. 나는 생각을 그만두고 후두둑 식탁에 앉았다. 


 엄마는 열무김치를 철마다 빼놓지 않고 만드신다. 봄의 열무는 이파리가 여려셔 대충 손질한 부추같다. 그래서 열무김치의 국물도 조금 맑고 옅다. 반면에 여름에 만드시는 열무는, 이파리가 크고 억센데 그래서인지 국물도 진하다. 계절 따라 열무김치가 다른데 부지런하신 엄마 덕분에 그 맛을 다 볼 수가 있으니 호사다. 이 맛을 함께 못보는 바깥양반을 뒤로 하고 나는 천천히 열무를 풀어 면발에 말아서 한 입 가득. 


 참기름을 안넣었다. 참깨도 넣지 않았다. 국물이 너무 진해, 역시 멸치국물을 내서 합쳐야겠다고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것도, 아침 한상으로는 모두 과도한 처사. 참기름만 톨톨 털어서 다시 한입을 문다. 예산국수. 중면. 입소문이 날법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돌고래가 놀러왔다

매거진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
브런치 시작하기

카카오계정으로 간편하게 가입하고
좋은 글과 작가를 만나보세요

카카오계정으로 시작하기
다른 SNS로 가입하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