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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존 May 06. 2021

쓸모가 없어서 가족, 쓸모가 없어야 가족. <미나리>

심심한데 계속 보게 되는 영화

 <미나리>의 이야기구조는 매우 단순하고 쉽다. 1970년대말~80년대 초의 미국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그곳에는 도무지 섞이지 못하는 한 가족이 자기들끼리 지지고 볶다가 화해하는 이야기. 물이 마르거나 막히거나, 토네이도가 부는듯하다가 슥 가버리거나 등등. 고난은 감당할 수준들이고 인물들은 몹시 상식적이다. 한국말도 영어도 그럭저럭 하는, 한국에서 적어도 성실하게 고등학교 졸업 이상의 교육과정을 밟았을 것이고 미국에 와서도 누구보다 바쁘게 자기 일을 하는 도무지 심심한 사람들.


 다만 독특하다. 미국 기준으로 코딱지 만한 농장을 어떻게 일궈보겠다고 들어온 아시아 이방인들의 이야기다. 미국인들에겐 쟤들 지금 뭐하는거야 싶고(손바닥 만한 땅에서 농사를 짓는다고?), 그런데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어머니와 딸의 이야기이고 하고, 그 아시아인들이 미국인인 자기들의 정서를 건드리고 있으니 신기하게도 계속 보게 될 것이고 아시아인들에겐, 고국을 등지고 미국에서 아둥바둥 버티며 아이들을 지켜내는 이 특별한 사연에는 호기심이 들 수 밖에.


 보편성과 특수성을 함께 담아 그리운 풍경과 함께 이야기는 흐른다. 너른 초록색 풀밭과 그 위에 솟아오른 나무들과 나란히 누운 푸른 하늘은 미국인들의 노스텔지어이기도 하다. 시냇물처럼 나란히 그 풍경 위를 거니는 할머니와 손주들은 지구 위의 모든 가족들의 소중한 기억이다. <미나리>는 그리움을 지배정서로 삼아 그것을 관객에게 정밀하게도 그려낸다. 10인치도 안될 낡은 브라운관 TV을 통해 낯선 한국의 쇼프로그램을 보면서 미국인들은 그들이 나란히 누워있는 트레일러 주택에서의 하룻밤을 저마다 떠올려낸다.

 

 그러나 이제 40대 후반의 장년이 된 정이삭감독이 그리움으로 호명하는 그 시절은 부모님 세대에겐 몸서리쳐지는 가난과 고난의 시절이다. 영화에선 소프트하게 쉭쉭 지나가는 고통들이지만, 미국에서 영광의 세기로 불리던 1950년부터 1970년대까지의 장기호황을 지나 오일쇼크와 신자유주의 개혁으로 미국 경제에 암운이 막 드리워지기 시작하던 시절이다. <미나리> 영화 속 가족은 한인들을 대상으로 나름 특용작물인 한국 채소들을 길러서 팔지만, 미국의 많은 가장들이 공장의 일자리를 잃고, 사무실을 잃고 정든 집을 떠나게 되기도 하는 시절.


 1980년대이든 2021년의 오늘날이든 이처럼 가혹한 세상에서 "쓸모있어야 해"라는 생각은 역시나 우리 모두의 고민거리다. 수평으로 긴 탁자 위에서 한 박스에 담겨있던 병아리들은 숫놈과 암놈으로 가려져, 한편은 수직으로 길게 뻗은 굴뚝에서 검은 연기로 화해 날아간다. 쓸모가 없으면 버려지는 세상과 그 속에서의 투쟁. 그러나 데이빗의 아버지 제이콥은 단지 쓸모에 따라서 살아가고자 하지 않는다. 어린 아들에겐 쓸모를 말하면서도 제이콥은 자기가 가장 잘하는 병아리 감별사 커리어를 희생해가면서까지 대도시를 떠나 아칸소 땅에 농사를 짓는다. 쓸모를 위해 살기보다는 자기 자신의 삶을 증명해내기 위하여.


 제이콥과 긴장을 빚는 그의 아내는 삶에 필요한 것들이 많다. 안정적인 생활을 위해 커뮤니티도 필요하고, 데이빗의 심장병을 관리할만한 병원도 근처에 있어야 한다. 부족한 수입을 벌충하기 위해 일을 나갈 동안 아이들을 돌봐줄 사람도 필요하고, 무엇보다도 가족은 뒷전이고 농사에만 열중하는 남편이 그녀에겐 필요하다. 쓸모가 있어야 한다면서 자기가 어떤 쓸모가 있는지에는 관심이 없는 제이콥과 남편이 빚어낸 공백으로 인해 지속적으로 갈등하는 모니카는 가족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익숙한 구도다. 그리고 이 낯익은 구도를 할머니 순자가 뒤집어엎는다.


 쓸모를 두고 갈등하는 제이콥과 모니카 앞에 나타난 순자는 영 쓸모가 탐탁치가 않은 할머니다. 쿠키도 못굽고 애도 못본다. 아이 보기는 뒷전으로 하다가 내내 사고를 친다. 그리고 모니카와 제이콥의 관계도, 다른 모든 가족들의 관계도 뒤집어버린다. 영화를 막상 보았을 때는 윤여정 배우의 연기가 특출난 것인지 확 와닿는 장면이 없지만 이야기의 한 가운데에 탁 자리를 잡고 영향력을 발휘하는 그 캐릭터성을 생생하게 창조해낸 능력에 대해선 이론의 여지가 없을듯하다.


그리고 순자에 의해 심어진 미나리로 이야기는 수평도 수직도 아닌, 숲도 아니고 농장도 아닌 개울물 옆의 작은 미나리밭 풍경으로 마무리된다. 제이콥과 모니카는 가족의 쓸모를 두고 갈등을 빚지만 사실 순자가 보여주듯, 가족에게 매겨지는 쓸모의 값은 아무 의미가 없다. 쓸모가 있어도 가족, 없어도 가족 아닌가. 영화가 병아리 부화장이나 농장이 아닌 미나리의 공간에서 마무리된다는 것은 부부, 가족의 갈등이 완전히 해소되었음을 알리면서 또한 그 마나리라는 채소의 독특한 성격과 메세지로 이야기가 승화되었음을 알린다. 가족들에게는 완전히 새로운 삶의 장이 열린 것이고, 쓸모가 없던 땅에 싹튼 미나리처럼, 자신들만의 색상, 고유의 향과 끈질긴 생명력을 갖게 될 터.


 영화가  순하고 쉬워서 독립영화 치고는 예술성이 높지 못한데, 심지어는 검은 연기와 맑은 수돗물처럼 뻔하고 명징한 상징들이 이야기의 흐름을 암시한다.  이래? 싶은데, 깔려진 자락이 평탄해서  위에서 캐릭터와 인물들이 잘도 굴러만 간다.  패튼이라는 생소한 배우의 신들린 연기에, 윤여정의 천연덕스러운 연기에 홀려서 보다가 아이들의 재간에 즐겁고 스티븐 연의 미국식 한국어에 이끌리고, 한예리의 "우리 가족은 내가 부양할게." 한마디에  쿠웅. 그러니까 대중예술이란 이처럼 누구나 쉽게 이해할  있는 이야기를 얼마나 특색있게 전달하느냐인 것인데. 글쎄, 영화를 보고 나니 나도 외갓집에서 자고 일어나면 코를 살살 간질이는  개죽 끓이는 내음과 소나무 장작의 향내가 그만 떠오르고야 만다. 아...내가 데이빗이 아니라 이제 제이콥이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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