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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존 May 14. 2021

때깔 오브 마인

이만하면 됐다. 이보다 더 많이.

 중부내륙에 다녀온 뒤에 또 한 얼마간은, 내 커피가 맛이 있는지 없는지 감을 잃었다. 한번 좋은 커피를 먹고 나니 자신감이 없어지고 자꾸 의심이 든다. 그 와중에 새로 볶은 콩을 직장의 커피친구에게 나눔했더니, 산미도 없고 구수한 맛이라 오히려 인상이 없다고. 나는, 그러나 이게 내가 추구하고 있는 방향성이므로 선선히 그 말을 받고 내 입장을 이야기했다. 전미보다는 후미와 바디감으로 맛을 잡아가고 있다. 캐러멜 맛과 꿀향이 배어나오게 하려면 어느정도 중배전 이상으로 볶을 수 밖에 없으니 꽃향이나 과일향, 산미는 버리고 있다고. 그러나 어쨌든 그건 내가 추구하는 맛인 거지, 내가 지금 갈아서 내린 커피가 추구하는 바로 그 맛인지는 알지 못한다. 이게 맞나. 이 커피는 맛이 있는 걸까. 


 하여 어제는 업무 중 여가가 조금 생겨 홈 로스팅 영상을 몇개 찾아봤다. 나이 지긋한 전문가들이 자기의 로스팅에 대한 지식과 요령을 설명하고 있다. 내가 잘못하고 있는 게 뭐지 하며 보고 또 본다. 다만 한가지 내가 지금 커피를 볶는 방식인 냄비 로스팅 그 이상으로 절차라거나 도구라거나가 번잡해지지 않아야 할 것. 직화로 통돌이를 하는 게 가정에선 가장 좋은 퀄리티라고 하지만 앞뒤로 손이 너무 많이 간다. 공간도 마땅치 않다. 나는 그저 인덕션에 올린 라면냄비로 후다닥 볶아, 채반으로 커피빈 껍질만 탈탈 털어내는 것으로 족하다. 이 수준에서 내가 원하는 맛이 나올 수 있다면 된다. 


 그러나 그렇게 로스팅 영상을 보면 볼수록 더 확신은 들지 않는다. 한 1년 넘게 내가 볶아낸 콩이 저 영상 속의 콩들에 비해 못날 것이 없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고, 결정적으로, 내가 저 콩들을 직접 맛을 본 것이 아니라면 저 로스팅 영상의 주인공들이 옳은지 내가 옳은지 알 수 없는 것이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생두를 파는 인터넷 몰에 들어가 다시 콩을 몇가지 골랐다. 꾸준히 커피를 볶고 마시니, 연초에 7,8kg 정도 되는 분량의 콩이 이제 2kg도 남지 않았다. 그러나...또 고민이 든다. 어느 콩을 사야 하나. 뭐가 제일 맛이 좋을까. 


 한번 의심을 갖기 시작하니 여지껏 즐겁게 해 온 모든 일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작년에 한동안 생두를 따로 볶아 관리하다가 어느 정도 요령이 생기자 마구잡이로 섞어서 먹고 레시피 관리도 하지 않았다. 그 모든 게 맛이 괜찮다고 느꼈으니까. 사실 호주 여행에서 새로운 커피 맛을 느끼고, 집에서 직접 커피를 볶는 과정이 모두 신기하고 즐거운 체험이었으므로 그 만족이 컸다. 그땐 맛이 없어도 그저 즐거워하며 마셨고, 실제로 카페에서 사먹는 것보다 훨씬 맛이 좋았다. 때문에 열가지 다른 원두가 있으면 그것을 다 이리 섞고 저리 섞으며 그 다른 맛을 그냥 모두 인정하고 살았던 것이다. 


 그 일이 후회가 된다. 이왕이면 처음처럼 일일이 따로 분류를 하고, 커피를 내린 때만 섞어서 갈아버릴걸. 내가 새삼 이렇게 커피 맛에 반성을 하고 민감하게 또 까칠하게 커피 맛에 대해 또 고민을 하게 될 줄이야. 그런 생각을 하며 오늘 아침에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커피를 내렸다. 그리고 시험 감독에 들어가 입을 꽉 다물고 커피를 조용히 마셨다. 아이들도 침묵하고 있고, 부감독으로 아이들 등 뒤에서 텅빈 적막 속에 조용히. 그런데 어렵쇼. 웬걸. 이건 또 제법 맛이 좋네. 맛있다. 좋은 커피다. 잡맛은 통제되었고 적당히 태워진 은근한 풍미에 바디감. 그리고 원하는대로의 후미다. 달고, 목넘김 뒤에 입안에 도는 부드러운 꽃향기와 꿀향이 딱 좋다. 


 큰 텀블러에 가득 담아온 커피라 양도 많아서 시험감독을 하는 내내 아이들의 등을 바라보며 잔을 홀짝이는 동안 드는 생각은, 이쯤이면 될까. 혹은 이보다 더 많이. 원하고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인가.


 내 삶의 틈바구니에 고작 기호품인 커피 때문에 투자하는 시간을 이 이상 들일 수도 없다. 충분히 바쁘고 애쓰고 있다. 한 잔에 100원 정도, 그리고 200g을 볶는데 30분 남짓 시간을 투자하니, 한 잔 당 2분 내외의 시간을 들여 볶고 있는 것이니 그 작은 노력으로 즐기는 커피의 맛은 이정도면 호사다. 다만 실력있는 바리스타가 제대로 관리한 커피의 맛을 오랜만에 보고, 그에 비하면 내 커피가 맛이 있는지 없는지 한 순간 혼란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단지 맛 없게 볶아져서 맛 없게 내려진 내 커피의 맛에 비할 경우이고, 잘 볶아져서 잘 내려진 커피를 맛보는 지금과 같은 순간엔 그런 "좋은 커피" 따위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나는 충분히 잘하고 있다. 성실함으로나 그 결실로나 내 커피는 그 값을 해내고 있다. 그 과실을, 교무실에서 여러 사람과 나누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내가 무언가를 더 탐구하고, 조금이라도 나아지길 바라는 것은 이 작은 커피빈의 알맹이나 한잔의 커피 속에도 아주 많은 가능성들과 내가 알지 못하는 지식들이 숨겨져 있기 때문일 테다. 어느 품종을 어디에서 심는지 어떻게 과육을 제거해서 어떻게 말리고 골라냈는지, 그것을 어느 강도로 볶아, 어떻게 갈아서 어떤 도구로 어떤 스타일로 내리는지. 하나 하나에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손길과, 그로 인해 변성하는 커피의 영양성분, 그리고 향미가 있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나의 늘어나는 솜씨에 기뻐하더라도, 끝 없이 더 많은 커피에 대한 지식을 원하고, 그것을 몸으로 느껴보길 원하고, 유튜브에서 영상을 보더라도 그것을 마실 수 없기 때문에 욕구를 해소하지 못하는 일일 게다.


 커피의 표면은 고요히 말 없이 내 생각들을 비추고 있다. 아이들의 작은 어깨는 꾸준히 달싹거리며, 그들이 해온 노력과 탐구해야 할 앞으로의 지식 사이의 갈피를 흔들리며 말해주고 있었다. 


 무언가를 배우는 것의 중요함에 비추어, 내가 지금까지 해 온 일들에 대해 정확히 아는 일의 중요함이 조금도 모자라지 않다. 내가 볶아내고 다음날 아침 밝은 빛에 반사되는 반짝이는 커피빈의 때깔을 보며 스스로 감탄하던 일들의 소중함. 작은 라면냄비에 콩을 부어 집중해서 수백번을 흔드는 시간들. 한번에 500번 정도는 흔들지 다만, 그런 일들 없이는 더 맛있는 커피도, 더 좋은 생두도 올바로 그 가치를 알 수는 없는 일이다. 


 하여, 다시 자리에 앉아, 조금 느긋해진 마음으로 천천히 생두를 골라 장바구니에 넣었다. 이번엔 섞지 말고 하나 하나의 원두의 맛을 집중해서 봐야겠다. 여러 배전도를 시험해보며. 그러면 레시피도 다시 써내려가겠지. 내 커피의 당당한 때깔에 이만하면 되었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와 함께, 이보다 더 많이 무언가를 배우고 또 배워가는 일만 하면 되는 게 아닐까. 급할 것도 없는 일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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