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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존 Dec 16. 2019

커피 한 잔 6000원의 가치

훌륭한 로스터리-바리스타가 운영하는 카페라면.

바깥양반이 아무리 카페를 사랑하더라도 나는 나이고 싶다. 커피를 내려마신지 제법 오래되었다. 시집을 간 얼마쯤 뒤 누나는 쇼핑몰에서 사은품으로 받은 드롱기의 커피 메이커 기본형 모델을 나에게 주었고, 나는 그라인딩된 원두를 사와서 서툴게 처음 커피를 내렸다. 아메리카노의 비율도 모르고 에스프레소를 먹는 법도 몰랐다. 압력이 낮은 기본형 모델과 그라인딩된 채 마트에서 몇주 혹은 몇개월 저장되어 있던 원두는 풍미도 크레마도 내게 선사하지 못했다. 쓰디 쓴 커피를 한 두 번 내려먹어본 뒤 커피메이커를 정돈해 수납장 꼭대기에 올려두었다. 제대로 인터넷에서 추출법이나 비율, 원두 선택법에 대해서 알아봤더라면 그때 진작 더 좋은 커피를 내려볼 수 있었을 테지만, 집에는 녹차도 있고 허브티도 있었다. 손이 많이 가는 에스프레소 추출은 경험 이상의 통찰로 작용하지 않았다.


 커피메이커 위에 쌓인 먼지를 털어낸 것이 4년 전인데, 학교 부서 개편으로 부장 자리에 앉았고 내가 살펴야 할 다른 부서원들이 생긴 것이 계기가 되었다. 집에 메이커는 놀고 있겠다 부서 선생님들에게 뭐라도 나누고 싶어 이번엔, 9900원짜리 그라인더도 함께 구매해 만반의 준비를 했다. 고 사이 몇살 나이를 먹어 원두커피 관리와 추출에 대해 조금 머리가 트였다. 처음 홀빈을 사던 날은 좀 웃겼는데, 출근 중에 원두를 사려고 카페에 들렀다가 생각보다 비싼 원두 가격에 화들짝 놀라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겨우 200그램 짜리를 고른 뒤에 버스정거장까지 헐레벌떡 뛰어가야 했다. 전날 밤 카페의 오픈 시간과 출근 중 동선까지 확인해 야심만만하게 집을 나섰던 것에 비하면 초라하고 우스꽝스러운 꼴이었다.


 교무실 한 가운데에서 윙윙 그라인더로 콩을 갈아 부서원들과 나눠 마시자, 선생님들의 반응이 다양했다. 역시 저녀석이구나 하는 사람, 커피 냄새 좋다며 교무실에 들어와서는 항상 기분좋은 미소를 보내는 사람, 그라인더 소리가 날 때마다 킥킥 웃는 사람. 알고 보니 그 웃음은 내가 콩을 가는 소음에 교감선생님의 미간이 찌푸려지는 것을 눈치채고 터져나온 것이었다는 걸 몇개월 뒤에 알았다. 그때 마침, 친한 선생님 한분은 자기 동생 카페에서 유통기한이 다 되어가는 원두라며 내게 공짜로 1kg치를 주었고, 나는 전체 쪽지를 보내 "이 원두를 다 쓸 때까지 아무에게나 커피 내려드립니다"라고 선생님들께 말했다. 3월 바쁜 한 철이 지나고 조금 여유가 생긴 참에 피워본 소동이었다. 그렇게 하루에 대여섯번씩 샷을 내리며 추출 요령을 익혔다. 즐거운 배움의 과정이었다.


 그렇게 몇년을 커피를 내려 마시는 동안 추출기는 보다 고가의 커피머신으로 바뀌기도 했고, 드리퍼가 추가되었다. 부서에 새로 들어온 선생님이 드립을 해 먹는 이여서 내가 그에게 배우며 함께 커피를 내리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한개의 드리퍼로 커피를 내리다가, 드립커피와 에스프레소를 양쪽에서 동시에 내리기도 하고, 이듬해에 부서원이 한명 더 늘자 드리퍼를 4개로 맞추어 한꺼번에 내리기도 했다. 그라인더도 바꾸었다. 9900원짜리 그라인더를 버리고 핸드그라인더로 팔이 빠져라 손으로 갈다가 조금 고가의 그라인더를 사 원두를 갈았다.


 그러다 보니 사 마시는 커피에 민감하게 됐다. 바깥양반의 경우에는, 나의 예민해져가는 커피 취향에 맞추어 좋은 커피를 파는 곳으로 자주 나를 이끌어간다. 그러나 그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집중해서 책을 읽기 위해, 친구들과 약속장소이기 때문에, 혹은 수다를 떨기 위해 찾게 되는 카페의 커피 맛에는 항상 불만족이다. 내가 내리는 맛난 커피가 있는데 4,5천원짜리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는 것은 나의 자율성을 훼손하는 것임과 동시에 돈의 낭비로 받아들여졌다. 서너명이 모여서 마시는 커피값 2만원이면, 윽 일주일도 안된 원두 200그램. 물론 그 맛이야 논할 바가 없고 말이다. 자연히 저렴한 브랜드의 카페를 찾게 되었다. 바깥양반은 이디야 취향이냐며 한마디씩 하곤 하지만 스타벅스와 커피 품질 차이가 크지 않다. 종종 혼자 가서 업무도 하고 책도 읽다 오기에 합리적인 가격이다.


 그러다가 "커피 맛 다 똑같지 뭐" 하는 친구에게 커피에반하다 브랜드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프랜차이즈에 로열티를 요구하지 않고 원두만 공급하기에 획기적으로 저렴한 2천원에 아메리카노 한잔을 마실 수 있다. 마침 운동 다니는 헬스장 코앞에 하나 있어 이번엔 그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고 오곤 한다. 대체로 점포가 작아 소란스럽지 않기에 조용히 머물다 오기에 좋다. 내가 커피를 즐기기에 가장 합리적인 가격이 책정되었다. 물론 그 사이에도 거의 매일처럼 집에서 커피든 홍차든 마시면서.


 그런 나에게 커피 한잔 6천원은 확실히 비싸다. 그것도 집에서 차를 몰아 15분을 가야 하는 곳이다. 그만큼의 투자를 해야만 꼭 책을 읽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굳이 좋~은 커피를 마시고자 한다면 최대한 고품질의 원두를 사서 집에서 매일 같이 내리면서 그 커피를 조율하는 법을 깨우치는 게 가장 이득일 것이다. 돈도 시간도 절약되고 소비가 아닌 생산의 과정이 될 수 있으니까. 그러나 바깥양반이 찾아내어 방문하였고, 학교의 커피동무인 선생님과 두번째로 들른 이 카페는 조금, 아니 심상치않게 특별하다. 원래부터 통도 작고 게다가 커피에 대한 외식가가 2천원으로 세팅된 내게 6천원의 가격이 그 이상의 만족도를 주는 곳이다. 30년 경력의 로스터리-바리스타가 정말로 최상의 맛으로 원두를 볶아내고 추출하기 때문이다.


 바깥양반과의 첫 방문 때는 날씨도 덥고 실내에 곤충이 여럿 눈에 띄고 책을 읽기엔 자리가 불편하여 오래 머물지 못했는데 두번째에 커피동무와 찾아갔을 땐 정말 인상깊었다. 사장님의 프라이드가 잘 드러나는 방담과 함께 커피의 볶음도에 대한 재미난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이른바 "산미"라는 것은 커피가 본래 콩이기 때문에 아무 원두라도 라이트하게 볶아내기만 하면 쉽게 낼 수 있다며, 사장님은 신선도가 빨리 감소하더라도 다크로스팅이 좋은 바리스타의 선택지라며 우리가 주문한 커피 외에 두 종의 원두를 추출해 맛보여주기까지 했다. 정말 그랬다. 나는 그 자리에서 평소 선호하던 케냐와 에티오피아 원두에 이어서 과테말라와 인도네시아 원두를 마시며 로스팅과 드립커피의 진수를 맛봤다. 정말 좋은 바리스타가 내려준 커피의 첫느낌과 목넘김, 입안에 감도는 풍미와 숨을 내쉴 때마다 느껴지는 잔향까지 내가 지금까지 마셔온 모든 커피의 기억을 그라인딩하는, 충격적인 경험이었다. 좋은 커피는 잔을 비워 커피가 말랐을 때 조금의 쩔은 내음도 없는 것이라는 소소한 디테일까지 끝내주는 커피강좌였다.


 그리하여 오늘 오랜만에 카페에 들르면서 가격에 대한 생각을 잠깐 했다. 이주 전에 들렀을 때 새로 발급받은 카드가 인식되지 않아 사장님이 외상으로 한잔을 내려주었기 때문에 난 12000원을 이번에 지불해야 했다. 자릿수가 늘어나니 새삼스럽다. 커피 한잔에 6천원은, 여전히 내 깐깐함에는 고민의 대상이다. 그러나 30년 경력이 헛되지 않은 로스터리-바리스타의 커피라면 조금도 큰 가격이 아니다. 순식간에 결론이 떨어졌다. 오늘은 그래서, 두잔을 마셨다. 합이 18000원. 이 역시 괜찮은 원두를 하나 살 수 있는 가격.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아깝지 않다. 정말 좋은 영화를 보면 관객으로서 숙연해지듯이 6천원짜리 드립커피를 마시는 내내 겸손해진다. 이 안에 그 다양한 맛이 피어나는 것은 누군가의 한 평생이었음을 바로 눈 앞에서 배울 수 있으니까. 그리고 마시는 내내 정말 즐거우니까.


 철학서적의 한 챕터를 읽고 글을 하나 쓰는 사이 두번째 커피가 식었다. 여전히 한모금 한모금이 즐겁다. 마저 비워낸 뒤에 마른 컵의 냄새를 느껴보고 내가 방금 마신 커피가 정말 훌륭한 것이었음을 재확인하는 것으로, 오늘의 마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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