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설과 속초와 7시간

겨울 속초 반달살이(6)

by 공존

"자 먼저 왔으니 얘기 들어볼까."

"허허허 교수님 저는 처음 입학할 때 문제의식에서 크게 달라지진 않았는데..."

"어? 그럼 안되는데?"

"허허허허허"

하고 나는 대학원에 와 있다. 오후 3시에 석사 논문을 위한 교수님과의 첫 미팅이 있었기 때문에. 아침 6시반쯤 일어나 준비를 하고 집으로 올라왔다. 학교에 먼저 가서 10시반 올해 첫 업무 회의를 하고, 집에 가서 커피를 볶고, 다시 차를 달려 관악구로 내려온 상태. 그리고 미팅이 끝나자마자 다시, 속초로 달려야 한다.


문제는 근 한달만에 눈이, 그것도 아쌀한 폭설이 온 날이라는 것인데.

그러니까 오늘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이 되었다. 연초에 학과 모임이 있었고, 끝난 뒤에 석사 동기 넷이 모인 방이 따로 생겼다. 첫 두 학기를 마치고 올해부터는 함께 졸업논문을 준비하기 위해서 바삐 또 살아야 한다. 나는 몇해전부터 비교적 확고하게 내 연구분야를 민주주의교육과 교육주체로 잡고 있었기 때문에 긴장은 하지 않은 상태였다. 석사보다는 이후에 박사 공부까지 이어가기 위해서 석사 후 한 1,2년이라도 쉬고 입학을 할지, 아니면 바로 들어갈지를 고민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학위 논문은 그냥 허투루 지나가지진 않는다. 첫 두 학기를 통해 충분히 어렵고, 충분히 장기간의 레이스라는 건 잘 알고 있었다.


마침 긴 시간 교수님과 교류를 해 온 내 입장이 있어서 동기 중에서 내가 교수님께 연락을 드렸고, 오늘 미팅이 잡혔고, 그렇다는 건 오늘쯤 나는 속초에서 서울에 올라와야 한다. 바깥양반에게 양해를 구했고, 함께 올라갔다 올테냐 의견을 교환해봤지만 아이를 차에 태우고 왕복 일곱시간 거리는 아무래도 무리다. 혼자 다녀오기로 했다. 겸사겸사 장모님과 처제도 그래서 속초에 초대한 것이지만 아침에 함께 모시고 왔다. 버스보다는 자가용으로 모시는 게 조금이라도 나으니까.


그리고 오늘 함께 학교 업무회의도 잡혔다. 내가 서울을 올라와야 하는 날이니 이왕이면 이날로 하자고 일정을 조정했다.


그리고 하나 더.

집에 가서 콩을 볶기로 했다. 속초에 보름 정도 있을 예정이라 콩을 300그램 정도는 가져온 것 같은데 5일만에 100그램 통이 비었다. 읭? 뭐지? 하루에 두잔 정도씩 내렸더니 당연한가? 불안해졌다. 남은 200그램 남짓으로 열이틀의 일정을 버틸 수 있을까.


물론 여행지에서 원두를 사먹는 방법도 있다. 당연히 여러번 해봤지. 여행을 가서, 카페에 가 보고, 괜찮은 카페다 싶으면 원두를 사서 내려먹어보기도 한다. 그러나 테라로사급 아니면 별로 신통치 않다. 게다가 나는 애초에 드립커피보다 에스프레소를 선호하기 때문에 보통 마시는 드립커피 맛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냥 내 입맛에 맞는 원두를 드립으로 내리는 것 뿐인데 쓸데없이 돈을 들이는 것보다야 내손내콩이 낫지.


해서 업무가 끝난 뒤 집에 가서 콩을 볶았다. 넉넉히 300g 정도. 이거면 속초 남은 일정동안 콩이 부족할 일은 없겠지. 집에 와서 바깥양반에게 설경 사진을 한장 찍어 보낸 뒤, 후다닥 짐을 챙겨 학교로 이동했다.

연구실에 내가 도착했을 때는 박사과정생과 교수님이 먼저 대화를 하고 있었다. 기다리면서 책을 구경하고 있노라니 내 연구 분야의 대표학자인 파울로 프레이리의 책이 보인다. 아직 공부 수준이 얕아 이렇게 외서를 착착 사서 읽는 정도 수준이 되지 못한다. 게다가 바깥양반의 임신, 동백이의 탄생이 있어서 올해, 대학원 첫 두 학기는 공부에 전념하지는 못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그저 공부란 계속 해 나갈 일이니까.


기다리는 동안 박사과정생 면담이 끝났고 내 차례가 돌아왔다. 다른 동기들은 10분 이내로 도착할 예정이고 먼저 도착한 내가 먼저 연구 주제를 밝혔다.


"체제와 주체 문제를 계속 다루려고요 그래서 일단 학교 민주주의 지수를 실질화해서 구하려고 합니다."

"학교 민주주의? 지금 계속 그거 평가하고 있나?"

"네 그런데 설문조사 수준이예요 사실 교사들에게 만족도 평가인데 실효성은 없죠."

"음 그럼 그거 그럼 원자료 구할 수 있나?"

"네 교육청에 보고는…아 안되겠네요 가라로 하는 학교도 많고 교육청에는 결과 점수만 보고하고 해서…근데 원자료보다는 제가 평가도구를 개발하려고요. 전문가 인터뷰랑 델파이랑 집단인터뷰랑 계획하고 있습니다."

"학교민주주의지수에 대해서 연구된 건 좀 있나?"

"별로...없습니다 그게 정책적으로 진전이 있지도 않고..."

"그런데 평가도구 개발로는 논문은 안되는데?"

"네 그래서!"


충분히 준비를 하지 못했다. 원래 교수님과의 논문 면담 때는 약식 계획서를 가져가야 하는데, 그걸 써가지도 않았지 뭐야. 계획된 내용은 전부 말씀드렸지만 교수님의 말씀은 "네가 거대담론을 자꾸 연결하려는 것은 잘 안다. 그러나 기본 토대가 부족하니 개념이 무엇인가부터 착실히 알아보자."라는 결론. 그래서 그에 대한 이야기를 마저 나누고, 내 순번이 끝나고 다른 동기들의 면담이 시작되었다.


알차다 알차. 바쁜 하루다. 면담이 끝나고 바로 출발하려고 했는데 그 사이 학교에서 또 연락이 왔다. 10분만에 하나 일처를 하고 출발. 이제 정말 속초로 갈 차례.

차를 몰고 달리며 바깥양반에게 연락을 하니 속초는 아직 눈이 오지 않는단다. 서울, 특히 집이 있는 경기북부는 폭설이었는데 말이지...찾아보니 밤부터 속초는 눈이 올 거라고. 뭐야 낮에 눈 속으로 차를 달렸나 싶더니 밤에 다시 눈 속으로 차를 달리는 건가.


차를 달려 속초로 가는 내 기분은 좀 묘했다. 지난번 겨울 제주도 반달살이 때도 바깥양반을 제주도에 남기고 혼자 새벽비행기를 타고 올라왔다가 오후에 내려갔던 적이 있다. 그땐 동백이가 없었지. 오늘은 사랑하는 처자식이 멀리 차로 세시간 거리에 있다. 아이와 이렇게 떨어져본 일이 없다. 아침에 영상통화를 잠깐 하기도 하고, 운전을 하는 내내 틈틈이 문자를 하며 부지런히 차를 몰았다. 다행히 길은 잘 제설되어 있다.


삶의 쉼표가 여행이라면 여행의 쉼표가 오늘의 서울행이었달까. 숙제를 받았고, 미뤄둔 일이 처리가 되어간다. 여행이 끝나면 다시 부지런히 해야 할 일을 할 것이고, 여행 내에 마무리할 일도, 역시 마무리해둬야 한다.


그러나, 이제 내 그 모든 과정에 아기가 전제되고 있다.


아이를 갖고 기른다는 것은 삶의 총체적인 변화다. 모든 나의 행동과 생각에 가장 첫번째 과제가 되어야 한다. 아직까지 소녀다움을 품고 있는 바깥양반의 경우 뭔가 그로부터의 자유를 갈망하는 것도 이따금 보이지만 나는 그닥, 그러진 않는 편이다. 그냥 아이를 품에 안고 일하고, 아이를 향해 차를 몰아 간다.


바깥양반 아니 아내와의 단 둘의 삶은 성인 대 성인의 관계였으므로 내가 얼마든지 아내에게 독립된 일정을 권할 수도 있고, 실제로 그렇게도 했지만 이제는 내가 별도로 움직이는 하루 하루는 집에 있는 아이와 아이를 돌보는 아내에게 나의 존재를 잠시 비우는 것이다.


다른 감각, 다른 관계. 교사에서 연구자로 내 삶이 옮아와 있는 것처럼, 무언가를 낳고, 또 지켜나가는 것은, 늘상 세상을 어떤 하나의 필터를 추가해서 바라보는 것과 같은 일이다.


나는 책임감을 가득 느끼며 아내와 아이에게로 돌아갔다. 수요일. 관광지인 속초의 여러 식당은 문을 닫아 우린 간단히 피잣집에서 늦은 저녁을 마쳤다.


하루 일곱시간의 운전도, 내가 지켜야 할 풍경과 함께라면 제법 괜찮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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