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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존 Jul 04. 2022

흐린 하늘은 말을 한다

Feat. 춘천 "오월학교"

 새벽에 몇번이고 잠에 깨고, 또 깨며 하룻밤을 보냈다. 아내가 예약한 숙소의 침대가 2층에 있는데, 1층에서 아기를 따로 재울 순 없고 그렇다고 1층에서 다 함께 자자니 나 혼자 누우면 끝날 좁은 바닥이 있고, 그 위에 두 사람 겨우 누울 툇마루형태의 침상이 있는 방이었기 때문이다. 아기를 데리고 부부가 2층 침대에서 자는 수 밖에 없었다. 여기서 아이가 밑으로 떨어지면 그 순간 끝장이다. 나는 나름 최선의 대안을 찾아내어 아이를 안쪽 깊은 곳, 나와 아내가 모두 잠에 빠져있어도 절대로 기어올라오지 못할 자리를 침대 끝자리에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벽 한시, 세시, 다섯시, 아침 일곱시까지, 나는 무시로 깨며 아이의 상태를 확인했다. 아이는 좁은 자리에서 이따금 으앙! 하고 외마디 울음을 터트리곤 다시 새근새근 잠에 들었다.


 그때마다 귀를 때리는 것은 아이의 울음소리만은 아니었다. 비. 그것도 새찬, 장마를 알리는 비가 창밖 테라스의 나무 데크를 때리고 있었다. 제법 휘황하니 비가 내리는구나. 나는 생각했다. 어젯밤엔 모기 때문에 테라스에 나가지 못했다. 그리고 아침에 호젓하게 커피라도 한잔 하기 딱 좋은 무드의 테라스인데, 비 때문에 영영 포기하게 생겼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하며 나는 밝아오는 아침의 산그늘을 바라보았다.


 춘천 시내에서 차로 50분은 북쪽으로 달려야하는, 홍천과 접경지역의 깊은 골짜기에 분교가 하나 있었다. 20여년 그 역할을 다 하다가 입학생이 줄어들어 폐교를 했고, 그간 종교시설, 군사시설로 사용되다가 한두해 전에 한 업체가 인수를 해서 식당, 카페와 체험공방, 글램핑장에 숙박까지 다 갖춘 복합문화시설로 개발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름다운 분교의 정경, 감각적인 내외부의 인테리어를 감상하기에 지금은 마음의 틈바구니가 없다. 아이를 돌보다 보니 모든 것이 그에 맞추어져 있는 탓이다. 아이가 가지 못할 곳은 나도 안가게 되고, 아이가 못하는 것은 나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니, 아침의 산그늘 아래 티타임도 비를 맞으며 갖는 조용한 명상도 모두 포기할 수 밖에 없다. 나는, 아이가 잠을 거의 다 자고 이제 깰 때가 된 것 같아 분유를 타 먹이곤, 우리 조식을 타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다시금 비오는 하늘을 마주한다. 추적추적, 처마에서 빗물은 점점이 떨어져 땅에 경계선을 만들어놓았다.


 그 어린 시절의 천진난만함처럼 나는 지붕 처마 아래를 따라 달리며 식당으로 향했다.

 비는 새벽과는 달리 잦아들었지만 우산이 없이는 다니기 쉽지 않다. 캐리어와 아이 짐까지 달달이 끌고 자갈밭을 지나 차까지 가기 고달플 것이다. 에어컨을 틀기 전에 아이 발가락이며 종아리도 말끔이 닦아주어야 할 것이고. 생각이, 마치 햇살을 가린 구름처럼 비 내리는 정경을 바라보는 마음에 두껍게 드리워진다. 이것 봐 아기가 기준이 되어 있잖아. 하면서도 내 손에 들린 것은 또 조식이다. 큰 나무 쟁반에 카레와 커피, 반찬이 담기고 비를 막기 위해서 호일이 둘러져 있다. 그걸 들고 문을 열고 나오니, 투두두둑 얇은 호일에 빗방울이 부딪히는 소리가 마치 풍경소리 같다.


 신이 나는구나. 두 손은 쟁반을 드느라 비를 가릴 새도 없지만, 마음은 몹시 설랜다. 안경에 점점이 묻어나는 빗방울에 내 콧김이 뿜어내 렌즈에 맺히는 뿌연 색채까지 짧은 거리를 비를 맞느라 봉변을 당하고도 조금도 아쉬웁지가 않다. 비다. 산 속에 비가, 풀잎과 슬레이트 지붕에, 양철로 된 처마 끝 비막이를 따라서 도롱도롱 투투두둑 비가, 내리고, 흐르고, 맺힌다. 오늘 나는 좀처럼 갖기 어려운 경험을 하는 것이다.


 이런 날은 밝은 날보다 오히려 큰 유리창 앞에 앉아있기 좋다. 역시나 지금의 나의 삶은 아이가 기준점이기에, 아이와 함께 비내리는 장면을 통유리창 앞에 마주하는 것이다. 그럴때, 사람들의 손에 손이 들린 우산은 형형색색의 물감으로 아이의 눈동자에 맺힐 것이고, 빗소리는 색채에 어울리는 선율이 될 것이다. 그럼 아이는 두 고사리 같은 손으로 유리창을 텅- 텅- 두들긴다. 그때마다 유리창에 맺혀있는 빗방울들은 물결을 만들며 흐르다가, 아이의 작은 손에 의해 파문이 되어 호를 그린다.


 9개월 된 아기,에게 세상은 모두 관계망 속에 위치한다. 다 큰 우리라면 손이 닿지 않을 유리창이건만은, 아이는 달려간다. 달려가서 두드리며, 세상 속으로 뛰어들지 못하게 하는 투명한 막을 스스로 인지하게 된다. 오히려, 더 많이 알고 더 많이 보는 어른들보다 아이가 세상에 직접 뛰어들고, 관계를 맺고 있으니 아이러니 하지 않은가. 물론, 그 모든 관계가 지금은 혀로, 고작 여덟개 달린 치아로, 그리고 입술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은 여지없는 비극이기도 하다. 밤 사이 비에 젖어 쓰지 못하게 된 텐트처럼, 아이의 침으로 젖어 쓰지 못하게 된 신상 장난감들이여.

 아침은 뭉근히 끓인 하이라이스. 식사를 마치고 나니 비는 많이 가늘어져 있다. 아이를 데리고 아내는 먼저 들어가 머리를 감는 사이, 나는 조식 그릇들을 반납하고 나서 운동장을 한바퀴 돈다. 맞아줄만한 부슬비다. 나 말고도 몇몇 가족들이 짐을 챙기랴, 조식을 하랴 하며 교정을 거닐고 있다. 화단에는 노란 꽃과 보라색 꽃. 비에 젖어 촉촉한 얼굴로 하늘을 바라본다.


 비를 구경하다가, 빗속으로 나오니 이제 풍경은 조금 달라져 있다. 원래는 아이들이 공놀이하던 운동장이었을 작은 잔디밭 한켠의 모래밭엔 푸른 피닐이 덮어져있고, 테이블과 의자는 비를 피하기 위해 접혀져 있다. 지난밤 글램핑장에서 고기를 구워먹고 나서 불멍을 할 수 있도록 마련되어 있던 불 태우던 자리엔 검은 재들만이 남아서 비를 맞고 있다. 비가 오지 않았다면, 새벽까지 타다가 남은 장작이 홀연히 흰 연기를 피워내고 있었을 것이다. 비오는 아침 그것이 하나 아쉽다. 어릴 때 외갓집에서 하룻밤 자고 일어나면, 늘 마당에는 장작 타는 연기, 개죽이 끓여지는 내음이 가득했다. 시골집 아침마다 손자에게 들려오던, 나무가 타면서 수증기 기포가 터지는 타닥 소리가 지금은 비싼 돈을 내고 이런 곳에 찾아와서야 듣게 되는 소리가 되었다. 아이가 조금 크면 텐트라도 치고 놀아야 할 것 같긴 하다. 내 어린시절 누리던 것만큼은 못하겠더라도, 이 근처 쯤은 경험할 수 있게 해주어야지.

 짐을 챙기고 나서 시간이 조금 남아 카페 공간을 둘러봤다. 어제 오후 이 춘천 끝의 오지엔 사람들이 가득했다. 정말 이 공간도 모두 차 있었고 마당에는 뭔가 영상을 촬영하려 스튜디오에서 나와있었고 모래밭에선 아이들이 성을 짓고 놀았는데, 그때는 제대로 즐길 수 없던 적막이 비오는 날 아침에 카페 공간에 채워져 있다. 아쉽다는 생각을 한다. 이 시간 이 공간에 호젓이 머무를 수 없다는 것이.


 아이가 태어나고 나니 원래 나의 삶에 제법 많은 비율을 차지하던 홀로의 의미가 거의 빛을 바랬다. 아니 그것은 결혼을 하고 나서, 아니 그 전에 결혼상대 수준의 연인을 만나면서 시작된 것일까. 홀로, 많이 걷고 홀로 어딘가를 바라보던 삶이, 오로지 아기를 바라보고 아이를 목마 태우고 다녀야 하는 삶으로 변해있다. 내가 홀로 보내는 시간만큼 아기도 홀로 남는다. 즉 그럴 때 나는 치환할 수 없는 절대적인 하나의 대상을 상실하는 것이다. 이 순간, 지금의 아이의 모습을.


 순간 순간 아이가 보여주는, 하루 하루 달라지며 변화해가, 부모의 눈에 담겨 포착되는 아이의 모습들에 비하면 사진 한장의 값은 싸다. 이 자리에 서서 촬영버튼 하나를 누르면 정지된 시공간은 하나의 이미지에 담긴다. 아이가 이제 아빠의 손가락을 깨물고 어떻게 아프게 깨물까 장난을 치다가 그것을 요리조리 피하는 아빠의 뜻을 이해하고 웃음을 터트리거나, 아빠가 볼을 깨물려고 할 때마다 미소지으며 내 얼굴을 밀쳐내는 것과 같은, 사진에도 동영상에도 담기지 못하는 모습들.


 그런 것들을 생각하며, 되새기며 가족들은 이곳까지 찾아오는 것일 테지. 아이와의 지금의 돌아오지 않는 시간들을.

 비는 땅을 적시고 꽃잎을 적시고 또, 사람이 앉던 자리까지 적셔놓았다. 이 자리에 앉아서 옆에 커피 잔을 놓고 있으면 학교 앞마당과 건물이 한장에 모두 담긴다. 비를 막을 차양도 천장도 없는 자리라 그대로 비를 맞아, 이제 여기엔 사람이 앉지 못한다. 다시 누가 앉기 위해선 비도 그치고, 또 햇살이 내리쬐어야 수분이 사라지고 겨우 누군가가 쉴 자리가 되겠지.


 얄궂은 비의 심술일지 모른다. 오늘 카페를 찾아올 사람들이 아쉬워하겠구나 생각하며 다시 하늘을 바라보니, 문득, 흐린 하늘은 말을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가 비록 한 음절조차 제대로 발성하지 못하지만 모든 수를 써서, 깨무는 행동으로, 기어가는 행동으로, 소리를 지르는 힘으로, 무언가 우리에게 말을 거는 것처럼, 하늘은 그 또한, 추적이는 비로써, 드리워진 구름으로써, 또, 스산한 기분을 때론 주기도하는 이 바람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


 흐린 하늘은 말을 한다. 그것은 두드림, 창을 두드리는 티디딩 소리와 함께, 기다리는 우리를 호명하는 소리. 그리고 구름을 드리움으로써 태양으로부터도, 혹은 어느 목적지로부터도 눈을 돌리라는 어떤 말 소리. 비가 내려서 다리가 끊기도 길허리가 잘릴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럴 땐 옆길로, 샛길로, 오던 길로도 아니가볼 이유는 또 없을 일이다. 마치 저 나무살처럼. 이것은 보슬비다. 발목 높이를 겨우 넘길 작은 나무살은 차를 막고 사람은 막지 않는다. 보슬비는 누군가에겐 장애가, 누군가에겐 즐거움이 되기도 하겠지. 무엇이든 받아들이는 사람 마음 먹기 나름일 터다. 그리고 또, 이것은 구름의 운행. 오늘과 같이 구름이 켜켜이 쌓인 날은 산 속에서 머물고 있다보면 낮은 구름이 춤추듯 흘러가는 것이 보인다. 그럴 때 나는 맑은 하늘에선 목격하기 어려운 대기의 운행과 그 방향을 감각하는 눈이 트이는 것이다.

 비오는 것이 늘 다행한 일은 아닌 것이지만 모처럼 찾은 나들이 공간에서, 집으로부터 먼 여행지에서 이렇게 맞는 빗소리와 그 풍경은 고맙기 짝이 없다. 아예 맑아서 티 없는 파란 가을 하늘이면 모를까 무미건조한 회색하늘도 드물지 않다. 물론 파아란 가을하늘도 아름답지만, 꼭 그것이 아니더라도 하늘은, 비와 바람과 구름을 통해 자기의 목소리를 내고 있지 않나.


 나 여기 있다고.


 나 여기 잘하고 있다고.


 나 여기, 살아있다고.


 티디딩 빗소리, 쉬잉쉬잉 바람소리, 빠르게 흐르는 구름의 뒤척임과 함께, 부슬거리는 아침에 하늘은 이렇게 말을 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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