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주 장흥면 승전방앗간과 우리집 들기름막국수
엄마는 나에게 이따금 고춧가루, 들기름, 간장 등등을 안기곤 하신다. 물론 나는 그것을 알뜰살뜰 요리해서 다 처분해버린다. 그런데 이따금은, 너무 잘 소진해버리는 바람에 그만 뚝 하고 떨어져버리는 경우가 있다. 들기름이 그런 경우인데, 엄마가 내게 안겨주시는 들기름은 시골 방앗간에서 큰 패트에 담겨서 오는 물건이다. 도시사람은 그런 방앗간에 줄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말인즉슨, 엄마가 내게 안기기 전까지 시골 방앗간의 들기름은 나의 것이 아니라. 마치, 내게 다가와 이름을 불러주기 전까지는 하나의 몸부림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하여 나는 제법 여기~저기 그놈의 들기름을 좀 구하러, 여행을 다닐 때마다 방앗간을 둘러보곤 한다. 우리 바깥양반은, 그런 내 행각에 조금도 거리낌이 없어서 "오빠, 여기 시장에 방앗간 안보고 가?"라고 먼저 묻곤 한다. 그런데 그런 방앗간 투어의 문제는, 이게 싼지 비싼지에 대한 감각이 없단 것. 엄마야 태안 시골사람이고, 그래서 농사를 짓는 친구며 친지들이 아직 수두룩 있으시고, 그래서 그분들이 구해다주신 저렴한 기름을 내게 안기시는 걸 테지만, 어디까지나 시골사람의 자식으로서 도시에서 자란 사람은, 고향에 간들, 그건 그냥 외지인일 뿐인 거라. 태안에 가서 바깥양반이랑 시장 구경을 하다가 방앗간이 보여, 들기름과 참기름을 '싯가'로 샀고, 작은 기름 병에 담긴 두개의 상품의 값을 내게 물은 엄마는, 그래 그정도면 됐다 하셨다. 그럼 나는 '상품 가격'으로 잘 산 건지, 아니면 '엄마 가격'으로 잘 산 건지를 알 수가 없는게라. 또 하릴없이 엄마가 언제쯤 들기름 한통 넘겨주시나 하며 손을 빨고 기다릴 뿐.
그렇게 산 들기름 참기름은 요리에 두루 애용되고 있다. 집에 생활하는 시간이 기니, 또 수시로 음식을 해다 먹으니 참기름이든 들기름이든 소진은 빠르다. 그럼 나는 또 들기름을 찾아 방랑을 하며, 어디 방앗간이 보이면 달려가본다. 지난 여름에 제주도에서, 동문시장에서, 방앗간이 보이길래 들어가 값을 물었더니, 방앗간 할머니께서는 검은 봉다리에 기름병부터 넣으시다가 내가 아 사지 않겠다고 하니, "사지도 않을 거 값은 묻는 게 아니야!"라며 노기를 드러내신 바도 있다.
그런 와중에, 도착한 곳은 양주, 장흥면의 승전방앗간.
여기는 이런 곳이다. 장흥면의 논밭에 둘러싸인 작은 동네에 자리잡은 오랜 방앗간을 개조한 카페 겸 방앗간. 지금도 방앗간으로써의 기능을 유지하면서 협동조합처럼 다양한 농산품도 판매한다. 방앗간 내부도 쾌적하게 리모델링을 했지만 공간이 아무래도 적어, 방앗간 앞 평상을 하나, 그리고 열 평 남짓한 비닐하우스가 제법 예쁘게 차려져있다.
살짝 안에가 어떻게 되어있나 구경을 한 뒤 비닐하우스 공간에 자리를 잡고 한시간 가량 쉬면서 김장을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전기장판이 깔린 좌식 자리가 있어, 거기서 누워서 새우잠을 청하기도. 그렇게 시간을 보낸 뒤 슬슬 자리를 정리할 시간이 되어간다. 나는 마지막으로 한번 더 안을 구경하곘다며 일어나, 판매공간을 구경하러 들어가는데.
아 글쎄!
들기름이 있다. 중국산 들기름도 있고 챔기름도 있고 생들기름도 있다. 깨를 가져오면 직접 깨를 볶아서 짜주기도 하는 곳인데 여기선 판매용으로 제법 알찬 구성.
나는 여기서 고민을 했다. 25,000원이면, 꽤나 비싸다. 이 값이면 엑스트라 버진 올리브유도 1리터는 살 것이다. 그러나 환상의 상술인지 환장의 상술인지 심지어 들기름 메밀국수 레시피까지 알려주고 있잖아.
나는 결심했다. 바로 산다. 거금 25,000원을 들기름 막국수에 태우기로 하고, 마치 올리브유처럼 맑고 투명한 국내산 생들기름, 산다! 아 참고로 보통 국내산 들기름은 어지간하면 2만원 정도는 한다. 엄마가 아는 분들께 사오면 값이 달라지겠지만.
그런데 이런 젠장 아침에 들기름 막국수를 하려 보니 메밀국수가 떨어졌네. 장을 봐와야 한다는 뜻이다. 어쩔 수 없지 하며 일단 소면을 삶는다. 여름에 막국수며 모밀이며 퍽 자주 만들어먹은 탓인 게다. 그 사이 소면들은 소진되지 않았던 것이다. 아쉬운대로, 아침이기도 하고, 일단 면발은 패스.
쪽파를 4대를 하라는데, 없다. 사실 쪽파까지 꼭 사야하나 싶긴 하다. 대파를 흰 부분 위주로 쫑쫑 작게 썰었다. 통 들깨는 없지만 들깨 가루는 있다. 거기에 참깨를 좀 얹었다. 이쯤만 되어도, 이미 레시피와는 멀리 멀리 가버리고 있는 상황. 다행히 나머지 양념들, 간장과 참치액, 올리고당과 설탕까진 있으니까. 대략 레시피에 맞춰갈 수 있겠다.
그리고 대망의 들기름을 투척. 아무리 봐도 색이 예쁘다. 간혹 고급이라고 좀 맑은 들기름이나 참기름을 사는 일이 있는데, 그게 향이 좀 약하다. 태안에서 산 놈도 그랬다. 근데 그건 볶을때 과하게 볶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고, 산패가 덜 되어 오히려 건강에도 좋고 기름맛도 과하지 않다. 그냥 슴슴한 맛으로 먹기에 충분하다는 이야기.
그래서 들기름을 넉넉히 두루고 마침내 위생장갑으로 석석 비비기 시작한다. 여기에 넣을 기름은 아끼면 못쓴다. 넉넉~히 뿌려서 비빈다. 음. 맛있다. 사실 나는 무쇠솥밥을 이따금 하기 때문에 반드시 솥을 기름을 먹여야 하는데 지금까지 올리브유로 손질을 했거든. 어차피 큰 수저 반스푼이면 무쇠솥은 거진 다 닦으니까 많이 쓰인다고는 생각은 안하고 있다. 이 들기름도, 비록 비싸긴 하지만 그래봐야 국수 2인분이면 많아야 세 스푼이나 될까.
어 이 사진이 왜 여기에...사진이 순서가 좀 꼬였다. 그리고 이 때쯤 아기가 일어나서 아쁘아! 하면서 또 다리에 매달린다. 아침이 되면 바깥양반이나 나나 졸려서 침대에 몸을 붙이고 있고, 아기가 일어나 우릴 깨우는 일이 다반사다. 어찌 아침을 우유를 먹이고 나면 잠시 뒤엔 주방으로 날 따라나온다. 그런데 이게 참 곤란하다. 이제 어느새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 싱크대 끄트머리에 손이 닿는다. 식탁도 척척 올라온다. 그래서 언제 어떤 사고를 칠지 알 수가 없다. 매우 큰일인 상태.
요즘은 아기가 장난도 칠 줄 알고 말도 많이 알아듣는다. 그런만큼 호기심도 많아졌다. 아빠가 출근하고 나면 하루 종일 엄마를 퍽 괴롭힌다고 한다. 호기심이 강하다는 것은 충분한 흥미 발달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뜻이니 그저 감사할 따름. 나중에 아빠가 하는 요리에도 관심을 가져주려나. 아빠가 읽는 책들에도 관심을 가져주려나. 그냥 하루하루, 밥 하고 애 키우고 하다 보면 잘 커주려나. 아이가 클수록 고민은 따라 커진다.
아빠 가랑이 사이에 끼어서 흐늘흐늘 춤을 추는 아이와 함께 아침 밥상 완성. 들기름 막국수만큼 쉬우면서 맛난 음식이 또 있을까. 여기에 동치미에 새 김치 살짝 곁들이면 비건으로 살아도 될 맛이다.
솔직히 다시 한번 말하자면 들기름이 향이 강하거나 진하지 않다. 그리고 더 솔직히 말하면, 아이 때문에 특히 아침 식사는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귓구멍으로 들어가는지 알기 어려울만큼 정신이 없다. 이날 아침의 국수 맛을 나는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 기억나는 것은 오로지 굉장히 높은 만족도 뿐. 그럼 왜 이 비싼 들기름까지 사서 부었을까, 하면.
그런 은은하고 잔잔한 맛 안에 또 참맛이라는 것도 있는 법인 게다. 조금 여유가 있을 때 천천히, 맛을 충분히 음미하면서 먹어볼 수도 있겠지. 아이에게 좀 먹여봐도 좋을 것이다. 그 역시 바쁘지 않을 때. 왜 굳이 아침에 이걸 해서 그리 정신없이 먹고 치우느냐 하면 또, 아침이라고 재~미없게 빨리빨리 먹고만 살 수 있나.
마트에 가서 메밀국수를 샀다. 오늘은 퇴근길에 쪽파도 살 예정이다. 쪽파는 파김치를 담그기 위한 것이긴하지만 어쨌든...조만간 다시 보자 들기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