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만인가
"뭐야 내 턱살 어디갔어."
아내의 하루 일과 루틴 중 하나는, 일기 앱을 사용해서 잠들기 직전에 육아일기를 쓴다는 것이다. 아기가 태어나고 나서 하루도 빼먹지 않은 일이다. 적어도 세 편, 많게는 하루 다섯 편 정도의 육아일기를 쓴다. 50자 내외로 짧지만 갖가지 아이와의 기억들로.
그런 뒤에는 육아일기를 쓰면서 정리된 하루 동안의 아기 사진을 내게 보낸다. 하루에 일곱장에서 열댓장 정도가 자정 무렵에 꼭 나에게 날아온다. 아이 혼자 찍은 사진도 있고 내가 아이와 놀아주는 사진도 종종 껴드는데, 오늘은, 내가 아이를 끌어안고 밥 먹고 있는 사진이 몇장.
그런데 턱살이 꽤나 빠졌다. 야 양배추, 10년만에 챙겨먹는 보람이 있네.
10년전인 2013년 3월부터 양배추로 도시락을 싸기 시작했다. 나는 요리하는 습성도 먹는 식성도 자연주의 취향이라 양배추 도시락이 입맛에 딱 맞다. 양배추를 밥 삼아 아무거나 섞어 우걱우걱 먹는다. 맛이 없는 채소들이라 해도 또 드레싱이 없어도 하루 딱 한끼 밖에 되지 않지 않느냐. 입 안의 고요함을 벗삼아 신선처럼 먹는 즐거움도 퍽 호사다.
그런데 그런 양배추 도시락도 지속성에서는 벽에 가로막혔는데, 우선 삶이 번잡하다보니 한 1년간 성실히 유지하던 양배추 도시락도 어느새 귀찮아지고, 지겨워지고, 하여, 도시락을 싸는 것을 까먹고 점심을 내도록 굶는 게 2년 정도 이어졌다. 그러다가 부장교사 일을 하면서는 부서원들이랑 소통을 위해서 급식을 같이 먹어야겠다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의 첫 양배추 샐러드 점심은 3년만에 끝나게 되었다. 그 뒤로 종종 어 그래도 도시락 만들어야지 하며 양배추를 사는 일은 종종 있었지만, 아무래도, 집에서 도시락을 싸간다는 과정에서의 귀찮음을 이기지 못했다.
사정이 조금 바뀐 것은 작년, 학교 교직원 휴게실이 대공사로 자리도 옮겨지고 꽤나 쾌적해진 것이다. 그리고 고 나의 생활도, 조금은 바뀌었다.
2년간 대학원 생활이 마무리되면서 조금 여유가 생겼다. 밥을 먹다가 갑자기 입 안에 피물집이 확 차오르는 경험을 할 정도로 힘든 나날이다 보니 급식에 기대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이제 대학원도 석사는 마친 마당이다. 그런고로 한결 내 시간이 확보가 되었고, 그러니 다시 내가 점심을 만들어먹겠다는 의지가 샘솟았다.
그러던 차, 휴게실에서 평균 두 팀, 총 7,8명의 교사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식사를 하는데 저쪽, 저 팀. 저 팀의 선생님은 같은 영어 교과신데, 와플을 구워드신다. 아마도 반죽은 현미와 오트밀 류겠지. 저렇게 저 팀이 와서 식사를 만드는 것을 보니, 나도 어? 그럼 만들어먹으면 되잖아! 라는 결론이 났다.
일사천리로, 개학을 기다렸다가 하루 이틀 전에 장을 보러 가, 식칼과 도마를 샀다. 개학 당일 입학식을 마친뒤 슥 학교 앞 식자재마트로 걸어가 양배추와 계란, 그리고 임시로 먹을 드레싱을 샀다. 드레싱은 원래 올리브유와 발사믹, 설탕 약간이면 땡인 편. 집에서 챙겨오는 걸 깜빡했다. 어쨌든 장을 본 걸, 바로 가지고 와서 계란을 삶아둔다. 잠시 뒤 점심시간엔 휴게실로 올라가 양배추를 썬다. 자아, 이렇게 첫 끼니 완성.
이후에도 착착 방울토마토와 아몬드를 택배로 주문하여 샐러드의 구색을 마련해나갔다. 내가 양배추를 썰자, 같이 도시락을 먹는 동무들이 토마토 조금, 양배추 조금, 계란 조금씩을 빼어먹는다. 그게 재미지.
덕분에 개학 하고 열흘 만에 얼굴 살이 쏙 빠졌다. 그거야 내가 기초대사량이 2000에 육박하는 기관차 같은 몸뚱아리 덕분이긴 하겠다. 하루 딱 한끼, 점심에 먹는 것만으로도 삶의 질이 떡상이니, 이 어찌 양배추의 대단함을 찬탄하지 않을 소냐.
아이를 돌보느라 알아서 살이 빠지기도 한다는데, 그런 기대로 몇개월을 게으르게 보내며 부푼 몸을 방치만 했다. 아이는 어린이집을 다니기 시작해 이제 아내와 나의 삶에 균형이 찾아올 예정이다. 내 식단의 밸런스에도, 내 위장의 밸런스에도, 양배추는 굉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