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2학년 때 "컴퓨터그래픽스 운용기능사 2급" 자격증(헥헥;;)을 땄다. 어떻게 대학에 갈지, 나름 방황하던 시기였고 집안 경제사정으로 별도로 학원을 다니지도 않고 있었다. 같이 만화를 그리고 놀던 친구가 같이 그래픽 자격증을 따자고 꼬셨고, 나는 별 고민 없이 수락했다. 3개월만 다니면 된다. 그리고 당시는 컴퓨터교육 열품이 불던 딱 2000년이라, 부모님도 약간의 학원비 출혈 정도는 감당해주셨다. 친구와 희희락락 재미있게 포토샵과 일러스트레이터를 배웠고 중학교 때는 같이 게임과 공부 경쟁을 하기도 하던 다른 친구도 같이 컴퓨터 학원에 다녔다. 그렇게 해서 나는 초 속성 단기 코스로 컴퓨터 그래픽 자격증을 땄다. 당시엔 1급 자격 기준이 마련되어 있지 않아 2급이 끝이었는데, 지금도 그럴지는 알 수 없다.
그 뒤로 나에게 그래픽 제작 능력이란 참으로 유용하게도 쓰였고, 쓰이고 있다. 대학생 땐 사진 합성 기술로 과 홈페이지 제작에 협력했다가 나중에는 교수님들 연구실로 끌려가 일주일 사이에 여덟개의 과 홈페이지를 만든 적도 있다. 각종 행사 포스터 제작도 내가 돈 한푼 안들이고 해결했다. 교사가 되어서도 학교의 예산을 많이 절감해주고 있다. 재작년엔 코로나 시국에서 졸업식 이벤트를 고민하던 3학년 부장님이 있어서, 일러스트레이터로 대형 걸게를 만들어드렸다. 그래서 우리 학교 학생들이 줄을 서서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자리가 다섯개나 생겼다. 학교 홍보자료도 외주를 주면 수십 수백이 깨질 일을 내가 슥 포토샵으로 찍어내면 끝. 참으로 훌륭한 직장인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이러한 포토샵 능력은 아이가 생기면서, 슬슬 본격적으로 아빠의 장난끼를 발동케 하고 있다. 아이가 점점 크면서 이젠 각종, 어른이 상상할 수 없는 재미난 포즈들을 잡는다. 나는 그럼 아이가 잠든 뒤 뚝딱 뚝딱 포토샵으로 사진을 합성해 보내준다. 그럼 바깥양반은 신기하다며 좋아한다.
소싯적에는, 사진 한장 합성하는데에 4,50분씩은 투입했다. 그렇게 시간을 들이면 전문적인 그래픽 작업물과 근사한 결과물이 나온다. 왜냐면 내가 딴 2급 자격증이 당시 유일한 그래픽 자격증이었으니까. 그러나 그거야 말 그대로 "잉여잉여"하던 대학생 시절 장난질 이야기지. 지금 나의 생활리듬에, 고작 장난질로 그만큼의 시간을 쏟을 순 없다. 그래서 소중한 우리 아기의 사진을 가지고 합성을 하는 것이긴 하지만, 그것은 전적으로 장난질에 불과하다. 그래서 색조나 채도를 굳이 맞추지도 않고, "합성"이라기보다는 "붙이기" 정도의 결과물만 나온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아빠는 충분히 즐겁다. 아이는, 아직은 자기 사진들을 보고 "나, 나" 하는 수준이지만, 조금 더 크면 아빠의 합성사진들의 가치를 조금 알아주겠지. 아마도 그때가 되면 좀 더 성실하게 합성사진을 만들어야할 것이고 말이다.
최근, 아이가 미끄럼틀을 타다가 재미난 사진을 찍혔다. 스윽 쿵 하고 아래에 도착해서 일어나려는데 누가봐도 이 사진은, 아무리 봐도 이 사진은, 스파이더맨 그 자체다. 마침 그 사진이 또 생동감있게 나오기도 해서 바깥반은 자기 프사로 해놓기도 했다. 나는 그렇다고 해서 아무 때나 포토샵을 켜고 작업을 할 동기가 부여되는 것은 아니기에, 그냥 나중에 시간 나면~ 저 사진으로 스파이더맨이나 만들어줄까 생각하던 참이다.
그런데, 이야기는 또 이렇게, 시작되었다.
"오빠 기말고사 교무실 출입금지 포스터 좀 만들어줘 재밌게."
"......."
하필 또 바깥양반이, 이런 거추장스러운 부탁을 한 것이, 딱-. 6월 모의고사로 내가 한가하던 날이다. 다른 때 같으면 나도 바쁘고 해서 거절했겠지만 마침 수행평가도 다 채점해놨고, 다음 수행평가도 인쇄해놨고, 해서, 시간이...시간이 남는다.
"자."
"ㅋㅋㅋㅋㅋ 이게 재밌네 이걸로 낙찰."
바깥양반은 나의 한문철 패러디, 재벌집 막내아들 패러디 등 세장의 포스터를 반려하더니, 마침내 거지단발 마동석 포스터로 만족을 하셨다. 그러니까 나에게, 포토샵은 지금까지도 가족을 위해 이런 쓸모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포토샵을 종료하려니, 아 조금 아쉽다. 시간이 애매하게 남는다.
미뤄둔, 아기 사진이나 장난을 쳐볼까.
나는 바깥양반에게 미끄럼틀 사진들을 보내달라고 했다. 즉시 바깥양반은 아이의 스파이더맨 사진을 보내왔다. 톡톡, 올가미 툴로 아이의 외형을 따고, 스파이더맨 사진을 골랐다. 그래서 비율을 적당히 맞춰 사진을 얹어, 바깥양반에게 보냈다.
"ㅋㅋㅋㅋ아이 사진으로 장난을."
"음...좀 허전한데."
허전하다. 얼굴이 휑하니 드러나는데 조금 굳인 얼굴이 찍혔다. 왜냐면, 미끄러틀에서 일어나면서 용을 쓰던 참이라. 그래서 스파이더맨 마스크를 또 찾아서, 눈을 따서 얼굴에 붙였다. 이거는 클래식이지. 아이패치형 마스크. 아아. 로빈, 조로, 그린애로우 등등, 그 길고도 긴 아이패치 히어로의 역사여.
"이것 봐 오빠가 ㅋㅋㅋ 아기 사진으로"
내가 다른 장난질을 치면 쪽팔린다며 핀잔을 주기 바쁜 바깥양반은 즐거운지 내가 보내준 사진을 부부모임 단톡방에도 올렸다. 사람들도 모두 좋아라 한다. 그러엄. 이런 사진, 언제 봐도 즐겁고 귀엽지.
열 재주 가진 사람이 배는 또 곯는다나. 음- 할 줄 아는 것은 많고, 돈 되는 것은 따로 없다. 그러나 또, 세상에 돈은 다가 아니다. 오늘, 바깥양반은 나의 쓸데없는 특기 하나로 잠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아이는 미래의 즐거운 추억거리를 오늘 미리 하나 더 가졌다. 부부모임 톡방의 누군가는 "스파이더웹도 쏴!"라며 리퀘스트를 했는데...아 뭐 그럴 계획이야, 당연히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