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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존 Dec 20. 2019

사표(師表)와 사표(辭表)

속 조국과 진중권의 앙가주망

 가르친다는 것은 매 해 부끄러움을 절감하는 일이었다. 나는 교직 2년차에 참을 수 없는 부끄러움에 매일 몸부림쳤다. 한 해의 수업을 마치고 같은 교과서를 다시 살피며 2년차의 수업을 하다 보니, 나의 첫해의 수업이 그리 한심하고 부끄러울 수 없었다. 교사들 사이에 흔히 하는 말로 "수업은 세 번째 학급이 진짜다."라는 말이 있는데, 교재를 연구하고 수업을 잘 구상해서 가더라도 실제로 50분 수업을 아이들과 상호작용하며 이끌어가는 실재는 늘 상상과 다르다. 계획을 잊어먹거나, 준비한 멘트를 하지 못하거나 흔한 일이다. 그러나, 그런 수준이 아니라 나는 정말 첫해 수업을 죽여주게 못했다. 


 아이들에게 너무나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2년차에 정신을 빡 차리고 수업을 열심히 했는데 3년차가 되니, 또 2년차의 부끄러움이 같이 따라왔다. 4년차엔 4년차의 부끄러움이 또 밀어닥쳤고, 7,8년차에 접어들어서 거꾸로수업과 역량중심수업을 만족스럽게 할 수 있게 되자, 이번에는 7년치의 부끄러움이 한꺼번에 밀어닥쳤다. 아아. 나느 왜 이리 어리석었을까. 왜 나는 진작에 보다 더 나은 수업을 아이들에게 해주지 못했을까. 지금도 하루 하루 그저 아이들에게 부끄럽다. 지금은, 예전보다 나은 수업을 하지 못하는 부끄러움이 날 둘러싼다.


 부끄러움. 내가 교사로서 아이와 마주하여 몸소 체험하며 느끼게 된 "어른"의 가장 중요한 자질이다. 부끄러움을 알면 어른이고 모른다면 꼰대다. 부끄러움을 안다면 뉘우칠 기회가 있는 것이고 부끄러움을 모른다면 그 이는 전망이 없다. 일본 식의 어떤, "민폐를 끼치지 말아라."라는 도덕선이 아니다. 부끄러움으로부터 시작하여 스스로를 타인의 시각에서 돌아볼 수 있는 자기객관화. 실수로부터 달아나려는 합리화의 심리적 기재에 대한 경계. 남탓보다는 내탓을 할 줄 아는 것이 부끄러움이고, 하나 하나의 언행과 행동을 타인의 감정을 고려하여 결정하는 것 또한 부끄러움 속에 담겨 나의 인식에 차곡차곡 자리했다. 


 역시 나의 경험을 토대로,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이 감히 가르칠 자격이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특히 말로써 전달되는 지식이 곧 개인의 권위를 형성하는 지식계층의 직군. 교수나 강사, 박사나 석사, 교사 그리고 여러 지식노동자들. 간디는 평생 성욕을 벗어나지 못했던 것에 대한 참담한 수치심을 스스로 안고 살았다고 한다. 절대적 지식의 권위가 사라지고 또 다시 모든 진리를 상대적으로 바라볼 관점이 열려있는 포스트모던의 시대에 지식인으로서 스스로 부끄러움을 인지할 수 있는 능력은 지식인이 책으로 둘러싸인 고성이 아니라 사람들의 숲 속에서 살아갈 수 토대가 된다. 평생 쌓은 지식조차 새로운 학설에, 새로운 증거와 관점에 의해서 무너질 수 있다는 오늘날의 지식생태계의 현실을 인지할 수 있는 능력과, 자신의 오류를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에 의해서 교정당하게 되었을 때 느끼게 될 부끄러움. 스스로의 실수를 즉각 인식하고 타인에게 인정하며, 기꺼이 고칠 수 있는 능력. 나는 부끄러움을 아는 자가 지식인의 사표師表라고 생각한다. 


 어제 어떤 이가 사표辭表를 썼다고 한다. 자살위험군의 한 여성이 남긴 트위터 멘션을 패러디 멘션으로 조롱하고서는, 그녀의 사망 이후에 한마디 사과 없었던 사람이다. 한 결백한 시민이 검찰의 거대 권력에 의하여 살아온 과정의 모든 순간을 조각조각 난도질 당하고 양심에 흙탕물이 끼얹어진 채 검찰에 온 가족과 함께 끌려가는 현장에 마치 홍위병처럼 들고 일어서 죄인을 단죄하자 소리친 이다. 정작 비판해야 할 거대 권력에 대하여서는 말하지 않고, 스스로의 밥줄을 쥔 비리 고용주의 허물에 대해선 기꺼이 입을 다문 이다. 그런 이가 파렴치의 광풍이 잦아들 조짐이 보일 때 쯤 사표를 한장 대중 앞에 내밀어 자신의 떳떳함을 알리고 있다. 


 사표에 쓰여진 날짜 두가지, 그 사표를 게시한 것까지 세 날짜의 일관되지 않음이 스스로 부끄럽지 않다는 것일까. 9월에 쓴 사표를 왜 지금까지는 스스로의 떳떳함의 근거로 제시해오지 않았던 것일까. 사표를 쓴 지금은 어째서 고통받았던 시민의 부도덕에 대하여 더 말하고 있지 않을까. 그 시민을 웅호하던, 사표를 쓴 이의 관점에선 "비양심적" 지식인과는, 어째서 더 다투고 있지 않은 것일까. 그리고 어째서 지금까지도 딱히, 비리 고용주에 대해선 말을 하고 있지 않은 것일까. 흩어진 날짜의 사표로써 떳떳하고자 하는 그의 욕망은 과연 부끄러움을 아는 지식인의 사표에 얼마나 근접할까. 


 부끄러움을 알지 못하는 자는 감히 지식인이라 불릴 자격이 없다. 남을 가르칠 자격이야 말해 무엇할까. 사표師表와 가장 먼 어떤 지식노동자의 사표辭表를 보며 세태의 헛헛함에 새삼 옷깃을 추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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