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공존 Nov 17. 2019

조국과 진중권의 앙가주망

지식인의 사회적책무는 무엇인가

 조국 전 장관은 자신에게 쏟아진 공격들 중, 폴리페서 논란에 대하여 “앙가주망”을 인용해 반론한 바 있다. Engagement 참여, 즉 지식인의 사회적 책무에 따라서 자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행동과 발언을 해 왔다는 것이다. “행동하지 않은 양심은 악의 편이다.”라는 경구처럼 민중에 비하여 보다 정확한 정보에 접근할 수 있고 그에 따라 더 발전된 행위를 취할 수 있는 지식인의 사회참여는 민주사회 발전의 중요한 동력이다. 정보취득-행위가 개인의 사적 이익을 위하여 행사될 경우 지식은 권력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기재가 되며 그에 따라 사회의 민주성은 현격히 감소한다. 폴리페서들의 부역으로 막대한 국가자본이 손실된 4대강 정비사업이 가장 훌륭한 사례일 것이다.

 

 “조국은 앙가주망을 충실히 실천해왔는가”라는 문제에 대해, 나는 상당히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는 2000년부터 참여연대에서 사법감시센터 부소장과 소장, 운영위원회 부의원장을 역임했고 국제엠네스티 법률가위원회 이사로도 활동했다. NGO활동 이외에 숱한 정부산하 위원회에서 활동하며 대체적으로 민주화와 검찰개혁 문제를 위해 노력해왔다. 정치참여에 있어서도 특정 정당에 머물기보단 민노총 후보, 진보정당 후보를 두루 후원회장으로서 도우며 정치 일선에 나서기보단 충실하게 시민의 자리에서 자신의 책무를 다했다. 그와 동시에 지식인으로 자신의 본업인 법학자로서는 아주 높은 성과를 내 왔고 말이다. 권력영합적 지식인인 폴리페서와는 거리가 먼 경력들이다.


 최근 조국 비판에 나서며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진중권 교수를 보며, 나는 지식인의 앙가주망을 떠올린다. 유명세라면 진중권이 90년대말기부터 비평활동에 나서며 친구인 조국보다 먼저 알렸지만, 과연 진중권의 활동은 지식인의 앙가주망에 충실한가? 나는 이 질문에는, 다분히 부정적이다.


 비평과 저술활동은 지식인의 본업이니 조국과 진중권이 이 문제에서 우열을 가릴 필요는 없어보인다. 정당활동을 비교해야 할까? 진보신당 홍보대사와 팟캐스트 노유진의 정치카페 이외의 행적은 보이지 않는다. 사회참여활동은 진중권이 비평을 통해 꽤나 오래 해 왔다. 그가 뚜렷하게 NGO를 통해 사회참여를 해 온 것은 아니고 사회적 문제에 자주 발언해왔기 때문에 지식인으로서 사회적 참여를 해 왔다고 간주할 수 있는 부분이지만 그러나, 나는 그의 사회참여활동에서 보다 큰 문제점을 발견한다.


 진중권에게 발견되는 일관성은 반대중적 경향과 엘리트주의다. 어쩌면 포퓰리스트에 근접한 반포퓰리스트다. 2007년 심형래 감독의 디워가 대중과 평단의 논쟁의 주제로 떠올랐을 때, 진중권은 미학적 이론에 충실하게 디워를 비판하는 한편, 대중의 비이성을 맹공한다. 황우석 사태 때의 대중의 반응을 빗대며, 디워를 혹평하는 평론가들을 비판하는 대중에 직접 칼날을 휘두른 것이다. 당시의 과열된 상황에서 대중에게 잘못된 점이 있지만, 딱 거기서 진중권의 사회참여는 끝난다. 원인을 규명하려 하지도 않고, 대중에게 제대로 된 정보를 제공하려하지도 않고, 열탕이 되어버린 공론장을 순치하지도 않았다. 그저 그는 지식인의 고성에서 대중을 향해 마음껏 침을 뱉고 돌아섰다. 지식인이 대중과 불화할 수는 있지만, 종국에는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참여민주주의에 다다르도록 대중의 지식수준을 향상시키는 것을 지향해야할 터인데 말이다.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집회 때는 이번엔 대중의 편에 섰다. 그러나 그것이 앙가주망적인 것인지는 의문이다. 현장을 생중계하여 인지도를 높인 뒤에, 각 언론에서 많은 지면을 얻어 자신의 이익에 기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쇠고기 수입 반대집회 자체가 단발적 사건이었고, 그 뒤에 사회적운동으로의 진화가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이 과정에서 진중권의 행적은 지식인보다는 셀러브리티적이다. 노유진의 정치카페 방송과 홍보대사 역시 대동소이하다. 미학자이자 사회평론가인 진중권일 필요가 없는 자리들이다. 셀러브리티의 유명세와 약간의 언변이 그 활동에서 드러난 진중권의 영향력이다.


 진중권이 진중권 다울 때는 다시, <나도 메갈리안이다>라며 여성혐오 전선에서 남성을 비판할 때다. 이때 역시도, 디워 논쟁 때 보인 그의 반대중적 엘리티즘은 고스란히 복제된다. 왜 이 갈등이 시작되었고 왜 적대적 공생주의가 태어나고 유지되는지, 남성과 여성의 갈등을 해소할 방법은 없는지 전혀 관심이 없다. 깨어난 남성 페미니스트로서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하며 마음껏 남성대중을 비방했다.


 작가 장정일은 <공부>라는 책에서, “지식인이라는 게 별 것 아니다. 남들 일해서 돈 벌 시간에 책 읽을 여유가 있었던 사람들이다”라고 말했다.(정확한 인용은 아니나 대체로 이런 말) 나는 이 말만큼 지식인의 엘리티시즘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본 적이 없고, 진중권처럼 주제 모르는 지식인도 본 적이 없다. 진중권이 책 읽고 글 쓰고 카메라에서 발언을 하는 동안 장삼이사씨들은 술이나 마시고 여자 따먹을 궁리만 하고 있을까, 아니면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자존감을 찾기 위해 국가주의에라도 기대기도 하고, 촛불에 뒤섞이기도 하며 하루하루 아둥바둥, 살기 위해 애쓰고 있을까?


 사회적 책무를 어물쩡 흉내만 내다 말고 대중의 시선을 즐기며 사는 진중권이 조국 논란에 나서서 그에 대한 비판을 하는 것까지는, 그래 이해할 수 있다. 누구나 자신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고 그에 근거해서 싸울 수 있다. 진중권이 말하는대로 무죄라는 증거가 없으니 유죄일수도 있고 말이다. 그러나, 나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대중의 환상에, 비이성이라느니 진보에 독이라느니...앙가주망과는 명확히 선을 긋고 서서는 대중을 향해 쏟아내는 그의 발언들이 참으로 가소롭다. 아인슈타인은 우정국 책상에서 우주의 물리적 법칙을 관통하는 이론을 완성해냈다지만 그렇다고 우주와 물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아니었잖은가. 염치가 있다면 “못배운” 대중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발언은 거두고 그저 제대로 혐의 입증이나 하는 것이 진중권에게 적합한 일이라고 보인다.


 서울대 정교수와 동양대 부교수...법학박사와 미학 석사...조국과 진중권 사이에는 사회적 권력의 격차가 존재하고, 그에 따라 두 사람의 앙가주망의 형태에 차이가 존재할 수 있다. 그로 인해, 진중권의 앙가주망에는 조국보다 많은 제약이 있을 수 있다는 반론의 전제다.


 내 말이 그거다.


 

매거진의 이전글 <문재인, 김인회의 검찰을 생각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