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만 잘하는 프로 시작러, 작심삼일의 본보기.
일을 처음부터 시작해서 진득하니 끝까지 해내는 사람이 있고,
항상 늘 새로운 판을짜서 새로운 일을 벌이는 사람이 있다. 나는 후자다.
병렬적인 사고방식을 가졌고, 멀티태스킹에 능숙한 사람이다.
그래서 새로운 판을 짜고 새로운 일을 벌이는 걸 좋아한다.
남들이 하는 '100일 챌린지'처럼 지속해서 뭔가를 하거나, 오랫동안 끈질기게 하나의 기술을 연마하는 것은 잘 못한다.
대신에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이 많고 동시에 여러 가지를 처리하는 데 익숙하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연구도 마찬가지다.
뭔가 한 가지 테마를 진득하게 오랫동안 파고들기보다는, 새로운 개념을 시작하고 새로운 판을 까는 것을 좋아한다.
예전에 새로운 재료를 이용한 에너지 분야를 새롭게 시작했을 때도 그랬다.
그 이후로 우리나라의 많은 연구자가 그 분야에 뛰어들었다.
지금 또 새로운 연구 과제를 시작하려고 하는데, 그것 역시 내가 새로운 개념의 판을 짜보려고 한다.
이미 있는 것의 성능을 높이거나 엄청나게 우수한 연구 결과를 내는 것에는 재주가 없지만, 새로운 개념을 시작하고 판을 까는 건 살짝 자신 있다.
한때는 내가 진득하게 뭔가를 하지 못하는 것, 꾸준하게 성실하게 못하는 것에 대해 약간의 열등감을 가진 적도 있었다.
하지만 내가 잘하는 건 그게 아니었다.
나는 컴퓨터로 일을 할 때도 화면을 몇 개씩 띄워놓고 하는 걸 좋아하고, 또 그게 익숙하다.
나는 원래 병렬적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었던 거다.
이렇게 또 나를 하나 알아간다.
남은 나의 인생에서도 억지로 하나를 진득하게 하려고 애쓰기보다,
내 기질대로 병렬적으로 살아봐야지.
호기심 많은 천성을 바탕으로 여러 가지를 시도해 보고 배워야겠다.
그게 바로 나니까.
최근 이순재 배우가 돌아가시고 나서 많은 사람의 추모가 따르는 것을 보았다.
그분이 훌륭한 인품을 지녔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 오랫동안 '현역'에 계셨기 때문인 것 같다.
현역에서 일하면서 젊은 사람들과 경쟁하려 하기보다, 자기만의 노하우를 끊임없이 나눠주고 모범을 보였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 분야에도 70이 넘으셨는데도 굉장히 열심히 일하시는 분이 있다.
늘 학회에 가면 맨 앞자리에 앉아서 열심히 질문하시고, 끊임없이 과제 제안서를 내고 계신다. 어떤 사람들은 "이제 젊은 사람들이 과제를 하게끔 그만 좀 하시라"고 얘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그 모습이 너무나 보기 좋다. 그렇게 끊임없이 자기 일에 열정을 가진 것도, 그분이 뿌리는 많은 씨앗도 좋다.
지금 당장이라도 일을 그만두고 싶은 생각이 많이 들다가도,
어쩔 때는 할 수 있을 만큼 일을 하는 게 맞지 않나 싶기도 하다.
힘이 있어야 남도 도와주는 거다.
다음 세대에게 도움을 주려면 내가 힘이 있어야 한다는 걸 예전엔 잘 몰랐다.
(그런데, 도움을 준다는 것도 오만한 생각같기도 하다)
그런 생각을 하면 옛날에 일류대를 가고 의사가 되었어야 싶다.
그랬다면 더 효과적으로 도와줄 수 있었을 테니까.
그래도 나는 지금 내가 가진 경험으로 다음 세대 사람들을 많이 도와주고 싶다.
내가 일하면서 힘들었던 순간들이 많았다. 여자라고. 어리다고.
당장은 내가 속한 조직에서 만연한 술 먹는 문화를 바꾸고 싶다.
러닝이나 스포츠 스폰서를 유치해서 분위기를 한번 건강하게 바꿔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다행히 내 직업은 여러 가지를 시도해 볼 수 있는 플렉서블함이 있다.
많은 걸 시도해 보기에 얼마나 감사하고 좋은 직업인가.
그렇지만, 가끔 다른 사람들 (특히 후배 등)에게도 너무 엄격하게 대하지 말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대해야 하는데, 아이들에게 프로 의식이 부족해 보일 때는 안타깝기도 하다.
하지만 나의 감정은 온전히 나의 몫이라는 것을 잊지 말자.
내 감정을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쏟아내는 건, 정말 정말 아니다.
다른 사람을 도와주려하기 보단, 내 자리에서 나의 몫을 나의 방식대로 해내면 된다.
그게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지 아닌지는, 내 몫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