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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 민 DAW MIN Nov 01. 2022

#10 금광에서 돌아온 사나이 앙앙

미얀마 호코 커피농장

그해 겨울 한파가 몰아닥친 핀우린은 차갑고 을씨년스러웠다.


해가 일찍 뜨는 핀우린은 아침 여섯 시면 숙소 맞은편 가게 나인 스타에서 빵을 굽고 밀크티를 끓인다.


난방장치를 따로 만들 필요가 없는 아열대 기후이지만 고산지대는 건기의 추위를 혹독하게 견뎌야 한다.


아침에 일어나면 집안은 춥고, 등과 어깨가 잔뜩 움츠러들고 입김이 새어 나온다.


차가운 타일 바닥을 디디고 현관문을 열면 안갯속에서 새까만 앙앙이 비질을 하고 있다.


한국에서 온 우리를 보고 남한이냐 북한이냐를 묻던 20살배기 청년.


아스날의 열혈팬인 앙앙의 크고 까만 맨발이 눈에 들어온다.


앙앙, 굿모닝,

앙앙 콜드 콜드, 콜드!!!라고 외치면  

앙앙은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으며 머리를 가로젓는다. 춥지 않다고.


제일 먼저 일어나 마당을 쓸고 밥을 먹을 때면 누군가가 앙앙의 숟가락에 반찬을 올려주지 않으면 맨밥만 먹는 순수 사내 앙앙.


 돈을 벌면 무엇을 하고 싶냐 물으니 고향에 계신 부모님께 땅을 사 드리고 싶다는 효자 아들.


일거리가 없는 농촌에서 핀우린으로 와 웨이터, 생수 배달일을 하고 우리와 만났다. 반짝반짝 빛나는 큰 눈을 가진 어여쁜 18살 각시 나유와 함께.


월급을 받은 다음 날에는 시장에서 산 닭 2조각을 튀기고 강황을 넣은 노오란 밥을 싸서 스테인리스 3단 도시락에 담아온다.


 나유가 밥 위에 고기를 얹어주기 전에는 오직 밥만 먹을 뿐.


한 번은 시장에서 사 온 닭을 조리하다가 눈 감은 닭머리가 나와 깜짝 놀라 닭머리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얼른 뒤돌아섰는데 나유가 그 쓰레기통에서 내가 버린 닭머리를 집어가는 것이 아닌가.


먹는 것을 왜 버리냐 하는 표정으로 나유는 닭머리를 집어다 다음날 앙앙과 먹을 도시락 반찬을 만들었다. 앙앙의 숟가락에 올라가 있던 눈 감은 닭머리.


앙앙은 아주 조심스럽게 닭머리를 쪼아 먹는다.


그다음부터 닭고기를 먹을 때면 사람들에게 질문을 하곤 한다. 닭머리를 버린 내 행동에 대한 죄책감을 좀 덜어내기 위함인지, 계속 질문하게 된다.


우리 어릴 때 닭머리 먹었어요?

시장에서 닭머리도 팔았어요?

그러면 한국 사람들 대부분은 말한다.

머리는 안 먹지 않았나요? 모가지는 먹어두.


그런 앙앙이 농장에서 부책임자로 일을 할 때였다.


물이 부족한 건기를 대비해서 요한은 농장에 관개시설을 준비했다.


물이 부족한 건기에 커피나무가 말라죽을 것을 대비해서 구글어스에서 우리 농장에서 해발고도가 가장 높은 지점(1038미터)에 물탱크를 설치하고 파이프를 설치하여 가장 낮은 지점(1023미터)까지 동력 없이 물을 보낼 수 있는 시설을 만들었다.


앙앙은 전화와 문자로 요한의 설계와 지시를 잘 숙지하고 따랐다.


그러던 어느 날 호스를 옮겨야 하는 상황이 있었는데 연락이 없어서 재차 전화해보니 앙앙이 울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앙앙은 말했다. 머리 쓰는 일은 이제 못하겠다.


나는 그런 머리가 못 된다. 힘쓰는 일만 하고 싶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앙앙은 호스를 옮기는 과정에 호스에 들어있는 물을 빼지 않고 그 호스를 들어 어깨에 메고 그 넓은 농장을 이리저리 들고 다니다 지쳐서 울음이 터진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앙앙은 떠났다.


우리는 절망적이었다. 가장 신뢰한 직원이었는데 마음이 아프고 안타까웠다.


앙앙이 없다면 우리는 농장 일을 하는 데 있어 여러 어려움이 생길 것이 불 보듯 훤했다.


그리고 동고동락한 사이로서 요한과 내가 깊은 신뢰를 주지 못했다는 것이 슬프고 안타까웠다.


앙앙은 금광에 갔다고 했다. 금광 일은 힘들고 위험하지만 돈을 많이 벌 수 있어서 선택했다고 했다.


앙앙은 금광에 가서 일하면서도 이따금 내게 연락을 해왔다. 금광에서 찍은 자신의 사진과 딸아이의 사진을 보내왔다. 그리고 우리 농장이 그립다는 말도 꼭 덧붙였다.

I miss hokho farm.


그리고 얼마 후 앙앙은 돌아왔다.


외동아들인 앙앙이 위험한 일을 하는 것보다 한국 농장에 가서 계속 일하라는 아버지의 권유도 있었지만 앙앙은 농사짓는 일이 훨씬 좋은 농촌 청년이었다.


미얀마의 금광은 매우 열악하고 힘든 노동을 견디는 사람들은 마약의 유혹에도 쉽게 빠지고 1000짯하는 주사를 맞으며 일을 한다고도 했다. 앙앙은 그런 삶을 살아서는 안된다고 했다.


한국 나이로 이제 서른.


미얀마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앙앙 같은 수많은 미얀마 청년들이 거리에 나가 피흘렸고 투옥되었고 고문으로 죽어갔다.


미얀마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묻는다. 한국은 어떻게 그런 민주화를 성공시킬 수 있었느냐고.

그러면 요한과 나는 말하곤 했다.


한국도 미얀마처럼 많은 사람들이 죽고 투옥되고 고문받고 사라졌다. 그들의 희생 때문에 한국의 민주화는 가능했다고


그리고 나는 그다음으로 이런 질문을 많이 받았다. 한국 같은 나라에서 배가 침몰했는데 왜 구하지 못해요?


 그리고 나는 또다시 질문을 받을 것이다. 서울 한복판에서 어떻게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죽을 수가 있어요?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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