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 호코 커피농장
숙소가 있던 핀우린은 영국 식민지 시절 영국군의 휴양지로 이용된 곳이다.
더운 나라 같지 않은 서늘한 날씨로 1887년 영국의 식민지 시절에 임시 부임한 영국 사령관의 성과 도시라는 뜻의 미얀마어 묘가 합쳐져 메묘라고 부르기도 하는 곳이다.
핀우린은 군사 도시면서 교육도시인데 사립학교가 많고 학원이 많아 전국에서 유학을 많이 온다.
숙소 앞에는 사설학원이 있었다. 초록색 론지와 하얀 와이셔츠를 입은 남학생들이 오전에 트럭( 핀우린 버스)을 타고 학교에 갔다가 오후가 되면 트럭을 타고 다시 숙소에 내린다.
학교에 가기 전 이른 아침이면 영어 문장을 소리 내어 외운다. 그 소리가 어찌나 우렁찬지 길 건너에 있던 숙소까지 다 들린다. 핀우린에는 사립학교뿐 아니라 공립학교도 있는데 점심시간이면 자녀들에게 따뜻한 밥을 먹이기 위해 3단 도시락을 들고 섰는 학부모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부모들은 학교 앞 공터나 풀밭에 앉아 흐뭇한 표정으로 자녀들이 오물거리며 밥알을 씹는 모습을 쳐다본다.
한국이나 미얀마나 자녀사랑은 대단하다.
농장이 있는 호코 시골마을도 마찬가지다.
집안에는 대학에 다니는 자녀의 학사모를 쓴 사진이나 학위증이 거실에서 가장 잘 보이는 장소에 붙여져 있다. 우리 어릴 때 학교에서 받은 상장을 벽에다 늘어놓은 모습과 흡사하다.
간사하게도 아이들이 다 자라고 난 뒤 미얀마에서 그런 풍경을 보게 되니 지난날 내 모습이 떠올라 얼굴이 화끈거린다.
젊은 엄마인 나 또한 저러지 않았겠나.
그해 겨울 나는 제주에 있었다.
서귀포의 포구에서 겨울이지만 따뜻한 바닷바람과 축축한 공기와 검은 돌과 젖은 돌담 너머 손에 잡힐 듯 가까이에 얼굴을 내밀고 있는 감귤밭을 지나 매일 같은 길을 걸었다.
때로 보온병이나 쇼핑백 같은 물건을 손에 쥐고 다녀서 올레길 코스로 관광을 온 사람들은 나에게 길을 물어오기도 했다.
큰아이는 축구를 했고 학교 총무를 맡던 나는 아이들을 따라 동계훈련장인 그곳에 있었다.
40여 명의 남자아이들과 버스를 타고 이동하고 숙식했다.
아이들의 부모들이 낸 교육비로 아이들을 케어해주는 학부모의 대표 같은 것이었는데 하루에도 몇 번씩 나는 서울이 어느 쪽인가 깊고 검은 바다를 보며 섬이 주는 답답함을 처음 느꼈다.
수영을 못한 탓도 있었겠지만 기상의 영향을 많이 받는 섬 지역의 고립된 외로움이랄까.
선망했던 제주 살기는 실망감을 많이 안겨주었으나 다시 숙소를 돌아와 의욕 없이 앉아 있거나 풀이 죽은 아이들에게 어른이자 엄마인 내가 차마 나의 고민을 티 낼 수가 없어서 아이들과 따뜻한 차 한잔을 나눠 마시며 끝이 없을 것 같던 두 달간의 동계훈련을 힘들게 버티고 있었다.
그 아이들이나 나나 그냥 견뎌야 하니까 견디고 있었던 거 같다.
그 후 나는 오랫동안 제주를 가지 않았다.
아주 어릴 때부터 동적인 활동을 아주 좋아했다. 큰아이는.
그리고 특히 공을 좋아해서 아장아장 걸어 다닐 무렵부터 공을 항상 지니고 다녔다.
공을 던지고 발로 차고 잠자는 시간 외에는 오로지 공을 갖고 놀았다.
그리고 2002년 월드컵이 우리나라에서 열리게 됐을 때 공에 대한 큰아이의 열망은 너무나도 뜨거워져서 축구선수가 되고 싶다고 우리 부부를 졸라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비록 우리 부부가 전문가는 아니지만 초등학생인 아들아이의 실력이 그다지 뛰어나지는 않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또한 한국사회에서 운동선수가 되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대략은 짐작하는 일이라 설득을 하고 반대를 했다.
하지만 아들은 축구를 하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에 사로잡혀 틈만 나면 밖에 나가 볼을 찼다. 하도 많이 볼을 차서 3학년 여름방학에는 하루 세 차례씩 축구를 하고 들어와서 대상포진에 걸려 입원을 한 적도 있었다.
아이는 그렇게 우리에게 불만을 드러내지 못하고 혼자 속에서 곪고 있었던 거 같다.
방과 후 축구교실에서 볼을 차고 집에 와서 놀이터에 동생들을 세워놓고 그날 배운 것을 가르쳐주고 다음날 학교 가서 또 차고.
그 무렵 남편이 새로 시작한 사업이 어려움을 겪고 있어서 나는 집에서 짬짬이 아이들을 가르쳤다.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주변에 사는 조카들까지 돌보아야 했는데 그 일은 나에게 꽤 벅찬 일이었는데 나는 책임감과 의무감으로 무리하게 이겨내려고 했던 것일까.
내가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무리한 양육으로 지쳐서 고스란히 짜증과 화는 큰아이에게 향했다. 아이들끼리 싸워도 큰아이가 혼나고 아이들이 떠들어도 큰아이가 혼나고 큰아이에게 바이올린 연습을 하라고 해놓고선 시끄럽다고 야단을 쳤다.
나는 그때 나를 좀 돌아봤어야 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지원해주지도 않으면서 억압하고 제지하는 엄마가 얼마나 미웠을까. 하지만 나는 큰아이가 겪는 괴로움과 슬픔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어린 아들에게 나는 온갖 짜증과 야단과 체벌을 가했다.
아이는 그저 참고 있었던 거 같다.
그리고 중학생이 된 큰아이는 딴 사람이 되었다.
아들은 내 말에 반기를 들었고 화를 냈고 소리를 질렀다. 문을 쾅쾅 닫고 밖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나를 쳐다보는 눈빛은 싸늘하고 적의가 가득했다.
그럼에도 아들아이는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은 어기지 않고 해내었다. 학교를 가는 일, 공부를 하는 일 모두 잘 해내었다.
우리 두 사람만 어긋나고 싸우고 밀어내면서 사춘기의 터널을 통과해야 했다.
아이를 잃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두렵고 아프면서 중학교 1학년 무렵에 나는 아이를 기다리고 찾으러 다녔다.
하지만 착한 나의 아이는 늦더라도 집에 들어와 주었다.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싫다고 말하던 우리 아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미운 엄마에게 돌아와 주곤 했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온 아들이 교복 와이셔츠를 자기가 빨겠다고 세면대에 물을 받았다.
아들아이의 마른 뒷모습을 보며 왠지 하고 싶은 것을 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좀 늦었지만 어쩌면 많이 돌아가는 것일 수도 있지만 늘 우울한 아들아이의 웃는 얼굴을 보고 싶어서 나는 욕실에 들어가 말했다.
축구 아직도 하고 싶니?
세면대 앞 거울을 통해 본 아들아이의 환한 웃음을 얼마 만에 보는 것인지 아직도 나는 그 저녁 욕실의 따뜻한 백열등과 하얀 와이셔츠를 잊지 못한다.
그리고 비 오던 4월의 어느 날 테스트를 보러 갔던 운동장에서 비를 맞고 온 힘을 다해 뛰고 있는 아들아이를 보며 함께 간 언니와 나는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테스트에 합격한 후 아들아이는 축구선수가 되었다. 하지만 스포츠의 세계는 냉정했고 아들은 스스로 알게 되었다고 한다. 브라질 골목길에서 축구화도 없이 볼을 차는 빈민가의 아이들을 보면서 난 축구할 실력이 아니구나 라는 것을.
제주의 동계훈련을 끝으로 축구가 아닌 또 다른 진로를 찾아 도전했고 이제는 새로운 가정의 어여쁜 가장도 되었다.
그리고 10년 후 작은 아이가 다시 제주에 갔다.
늘 미안했던 작은 아이.
형이랑 엄마가 싸우고 다시 형이랑 아빠가 싸우고 …. 일찍 철이 든 작은 아이는 언제나 내 곁을 떠나지 않는 소중한 친구였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요구하지 않고 언제나 자신의 할 일을 묵묵히 했던 작은 아이.
‘엄마 어디야’라는 말을 제일 많이 한 마음 아픈 아이.
엄마로서 내가 작은 애에게 가장 많이 한 말은 ‘집에 갈 때까지’ 기다려였다.
알파벳을 쓴 영어 노트와 자석 필통을 손에 쥐고 늦은 저녁 아파트 현관문 앞에서 기다린 어린 아들이 이제 조종장학생이 되어 제주로 떠났다.
형과 엄마를 기다린 후미진 서귀포의 모텔이 아니라 하늘을 날기 위해 떠났던 작은 아이.
어둡고 차가운 거리에서 엄마를 기다려준 나의 아이들.
춥고 용기를 잃었을 때도 따스한 별빛처럼 아이들은 나를 이끌어주었다.
집에 갈 때까지 기다린 건 아이들이 아니라 어쩌면 나 자신이 아니었을까.
아이들이 모두 떠나고 텅 빈 집에는 아이들의 냄새가 배인 이불과 옷가지와 귀여운 글씨로 적은 노트 몇 권이 덩그러니 남아 있겠지만 창문을 열면 멀리서 반짝이는 별빛 두 개가 나를 보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언제나 엄마는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너무 많이 사랑해서 너무 많이 상처를 주었다.
이제는 편안하다. 아이들도 그러하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