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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 민 DAW MIN Sep 30. 2022

#2 도난의 묘목장

미얀마 호코 커피농장

핀우린의 새벽. 미얀마 스님들은 새벽이면 탁발에 나선다.

 요한과 나는 커피 농장을 찾아다니며 미얀마 커피 재배에 대해 조사를 하였다.


핀우린은 만달레이보다 1000미터 정도 해발고도가 높았고 영국 식민지 시절부터 커피를 재배해 왔다.

알고 있는 대로 커피 재배에 적합한 기온과 고도를 갖고 있어서 대부분의 커피 농장은 그늘나무를 심어 커피를 재배하였고 커피부 공무원들의 자문을 구하는 일도 어렵지 않았다.


영어가 자유롭지 못한 나와 요한과 미얀마 사람들은 간단한 수치나 길이, 넓이, 무게 등 기술적인 부분은 자유로왔으나 아주 섬세한 표현은 놓친 경우들이 많았다.


예를 들어 커피 한 주당 커피체리가 얼마나 달리는가, 체리에서 그린빈은 얼마나 나오는가 하는 질문은 각 농장마다 그리고 기술자마다 다 의견이 달랐다. 우리는 정확한 데이터가 필요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불분명했으므로.


 우리가 낯선 땅에서 시작해야 하는 일이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이었으므로 우리는 되도록이면 많이 묻고 많이 알고자 했다.


하지만 세상이 그렇게 호락호락하겠는가.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겠는가. 자신들이 수년간 혹은 몇십 년 간 축적해온 노하우를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에게 누가 제대로 알려 주겠는가 말이다. 애당초 그런 기대를 한 나와 요한이야말로 얼마나 웃기는 짬뽕 같은 모습이었을까.


 핀우린은 땅값이 엄청 비싼 곳이어서 (물론 30년 전에는 그렇지 않았겠지만) 핀우린의 커피 농장주라면 굉장한 자본력을 가진 사람들이다. 농장주들은 매니저들에게 농장을 맡기고 싱가포르나 양곤에 사는 경우가 많았으며 매니저들은 농장에서 오래 일한 경험이 많은 기술자들이 많았다.


 우리나라에는 생소했지만 미얀마는 오래전부터 커피를 재배해 왔고 유럽이나 일본으로 수출을 하고 있었다. 핀우린 교외 지역으로 퍼져 나가 만달레이 주를 벗어나 북부로 향하는 길에는 대형 커피 농장들이 많았다.


그리고 커피가 자라는 곳에는 오렌지, 레몬, 아보카도, 마카다미아, 파파야, 바나나도 함께 자라고 있었고 커피 농장에는 그런 나무들이 듬성듬성 심어져 있기도 했다.

고도가 높고 일교차가 크고 최저기온이 5도를 내려가지 않으며 연중 강우량이 풍부한 아열대 기후인 이곳은 다른 식물들에도 최적의 성장환경을 제공하였다.


석양이 진 핀우린의 모습.

 핀우린 외곽으로 진입하면 붉고 기름진 황토흙과 연신 흘러내리는 물줄기와 비가림을 하지 않았는데도 피어 있는 국화꽃과 양배추, 당근, 옥수수, 유채, 감자, 상치, 무, 양파를 재배하고 들에서 일하는 농부들과 물속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을 볼 수 있다.


 일을 마치는 해질녘이면 여인네들은 론지를 가슴께에 묶고 물을 끼얹어 물가에서 목욕을 하고 지나가는 낯선 이방인을 마주쳐도 당황하지 않는다.

그리고 원색의 노을이 이글거리는 우물가에서 물기를 머금은 새까만 뒷잔등은 아름다워서 피곤하게 가라앉아 있는 욕망을 살짝살짝 두드려준다.


 차선이 없는 아스팔트 도로에서는 모곡이나 라시오를 향해 가는 택시나 자가용을 한두 대 만날 뿐 그 길고 뜨거운 길에는 목욕바구니를 든 여인들과 아이들, 소를 모는 농부들, 덜덜거리는 오토바이뿐. 고산지대의 언덕은 단조로우나 평화롭다. 아침과 오후의 표정이 다르며 저녁과 밤은 또 다른 모습이다. 아마도 나는 그것이 태양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해가 막 뜨기 직전까지는 거짓말처럼 옷깃을 여며야 하는 만큼 서늘하며 한낮의 뜨거운 태양은 피부에 아주 가까이 다가와서 화끈거린다. 바로 겉옷을 벗어버려야 한다. 그러다 해가 기울면 두꺼운 철문이 닫혀버리듯 태양의 온기는 사라져 버린다.


요한과 나는 이곳이 마음에 들었다.



 한국에서 조용히 커피 공장을 운영하고 살아가려 했지만 하루가 다르게 커피숍과 공장은 늘어나 경쟁은 치열해졌고 커피를 볶는 마이너 로스터리들은 점점 설자리를 잃어갈 것이 분명했다. 한집 건너 한집 카페를 연다는 건 즐거운 일이 아니라 서로서로 제살 깎아먹기를 하게 될 것이라는 불길함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날이 많아졌다.


게다가 생두 가격은 치솟기 시작해서 과연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을 것인지 자신이 서지 않았다.

요한과 나는 변화를 시도해야 할 때가 되었다는 걸 알았다. 더 늦기 전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되기 전에 우리는 할 일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야 했다.



요한과 나는 핀우린 체리란에서 조금 더 들어간 야칸소 마을에 1에이커 땅을 빌렸다. 오랜 시간 남편의 병간호를 해온 도난과 그녀의 남편이 우리 묘목장 한켠에 대나무 집을 짓고 묘목에 물을 주고 살고 싶다 해서 그녀는 우리의 첫 직원이 되었다.


묘목장에는 졸졸 맑은 개울물이 흘렀다. 그 물을 받아 묘목에 물을 주고 한 항아리는 받아서 그녀와 그녀의 남편이 사용하였다. 그녀의 대나무 방 벽에는 숟가락 두 개가 꽂혀 있었다. 요한과 나는 그녀 부부에게 정수기와 텔레비전을 사주었다.


그늘나무 묘목을 정리하고 있는 그녀들

 버마 사람이 출근할 때 샨족은 퇴근을 한다는 미얀마 속담이 있다고 한다. 샨족의 근면함을 알려주는 이야기다.

샨족인 도난은 하나뿐인 하얀색 쪼리를 흙 위에서 하루 종일 신고 일하고 다음날 아침이면 다시 하얀 새 신으로 만들어서 짠하고 사무실로 나타나곤 했다.

나보다 다섯 살 연상인 그녀는 늘 정갈하고 깔끔했다. 그녀의 남편은 우리가 농장을 시작하고 그 농장에서 편안하게 눈을 감으셨다.


그리고 도난은 우리 커피 농장에서 젊고 건강한 연하의 남편을 만나 행복하게 살고 있다. 그녀의 재혼은 우리 모두를 깜짝 놀라게 했다.


아직도 미얀마에서는 결혼을 하게 되면 마을에도 신고를 해야 하는데. 마을 사람들과 모여 전통혼례를 치르고 축하를 하고 마을의 제일 어른들이 참석해서 그 결혼을 인정해 주어야 한다.


사람들은 모두 도난의 새 배우자가 너무 젊어서 도난이 상처받을까 걱정했지만 도난은 말했다.

“괜찮습니다. 살다가 그가 떠나도 괜찮아요. 나는 아무 문제 없습니다.”

얼마나 멋진 패기인가.


젊은 시절부터 간경화로 누워 살던 남편의 병수발을 한 도난은 남편의 약값과 병원비 때문에 월급날이면 가불해 간 돈 때문에 가져가야 할 월급이 얼마 되지 않았다. 사는 게 넉넉지 않은 자식들도 도울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의 삶은 고달팠다. 헐리우드 스타들처럼 스무 살 연하의 신랑을 당당하게 맞이한 그녀. 돌아가신 남편도 그녀의 새 출발을 기뻐해주지 않을까. 재미나게 남은 인생을 살아가길 바란다.


쟈스민 꽃을 머리에 꽂고 그녀는 오늘도 하얀 쪼리를 신고 농장으로 향할 것이다.

농장으로 향하는 도난의 모습 (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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