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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 민 DAW MIN Oct 04. 2022

#3 호코에서 어린 날을 마주하다.

미얀마 호코 커피농장

돈을 많이 번 어느 사장님이 한국 사무실에 놀러 왔다.

우리가 미얀마에서 커피농장을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미얀마에서 뭐 할 것이 없을까 물으러 온 게다. 사장님은 나와 요한에게 몇 가지를 질문하고 바로 정리를 한다.


"그걸 왜 했어요?"


나와 요한도 지금 시작해야 한다면 아마 안 할 것이다. 그리고 못 할 것이다.

출근길에 사용하는 한국의 봉고트럭

2013년 겨울, 서울에서 직선거리로 3,300km 떨어진 미얀마 호코마을에 우리는 땅을 샀다.

핀우린에서 정북 방향으로 54km.


아침이면 사무실 마당에 모여 덜컹이는 한국 봉고트럭에 직원들을 태우고 시내에 나가 필요한 물건들을 챙겨서 농장부지로 향했다.

제일 먼저 한 일은 지하수를 파는 것.


 인부들은 고산의 평원에서 불어오는 건기의 마르고 추운 바람을 피하려 나무와 나무 사이를 연결한 비닐 텐트를 치고 노숙을 하며 몇 날 며칠 우물을 팠다. 건기로 접어든 평원은 추수가 끝나 마른 잡풀들만이 바람에 뒹굴었고 흙먼지는 입안을 돌아다니며 우적거렸다.


인부들의 머리칼은 먼지와 바람으로 묘하게 세팅이 돼서 헤어스프레이를 뿌린 듯 인상적이었으며 노숙으로 씻지 못했을 텐데도 전혀 더럽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우물이 없어 우물을 파는 사람들에게 물이 넉넉할 리는 만무한데 말이다.

지하수를 파는 시추기

 끝도 없이 펼쳐진 평원 끝에는 아주 작은 금빛 파고다만 반짝일 뿐 마을 사람들도 추수를 다 마치고 마당에는 노란 옥수수를 말리고 있었다. 집집마다 마당에는 노란 옥수수와 아무렇게나 뒹구는 양은그릇과 아랫도리를 벗은 아이들이 많았다.


봉고트럭이 지나가면 담장 너머로 얼굴을 내밀고 누구나 인사를 한다. 나와 요한은 그들을 모르지만 그들은 우리를 다 아는 눈치다.


요한과 나는 도시에서 자랐지만 우리의 어린 시절도 호코마을의 마당에서 노는 아이들과 다를 게 없었다. 집안에 텔레비전이 있는 것도 아니고 컴퓨터가 있는 것도 아니고 전화도 동네의 부잣집 몇 집만 가지고 있어서 급한 용무가 있으면 전화를 쓰기 위해 불편을 무릅쓰고 이웃집을 찾아가야 했다.


부모들과 손잡고 외식을 한다는 건 언감생심, 소풍날 하루가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출구였으니 그날을 학수고대하며 기다리는데 무슨 이상한 학교괴담은 그때도 돌고 돌아서 학교에서 죽은 누구누구 때문에 원한이 맺혀서 소풍날에는 비가 온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소풍 전날이면 일기예보 하나 변변하지 않아 비가 오면 어쩔까 비가 오면 어쩔까 노심초사했던 기억이 난다.


집집마다 아이들은 많고 일자리는 많지 않아서 우물을 팔 수 없는 미얀마의 가난한 농부처럼 집 앞에서 손 놓고 맥없이 앉아있는 모습이 영락없이 똑같다. 왜 아버지들은 돈을 벌러 가지 않는지, 돈을 벌지 않으면서 소주는 무슨 돈으로 마시는지 나와 형제들은 묻고 싶었지만 묻지 않았다.


호코마을의 점방에서 나는 나의 아버지를 본다.


무료한 흙마당에서 나와 내 형제들을 본다.


요한은 가끔 말했다. 왜 우리 가족이 왜 아버지를 받아줬는지. 요한이 바라보는 나의 가족들은 그랬나 보다.

요한의 말대로 생각해본다. 돌아온 아버지를 받아주지 않았다면 우리는 좀 더 편안했을까...

하지만 난 한 번도 그 생각을 마무리하지 못했다.


내가 요한처럼 딱 부러지는 성격이 못 되고 엄마를 비롯한 나의 형제들도 마음이 약하고 측은한 것을 보고 못 본 체하는 성정이다 보니 우리는 아버지를 내치지 못했을지 모른다. 그리고 우리가 아버지를 요한의 말대로 내쳤다면 우리는 행복했을까.


그 생각도 마무리하지 못했다.


대중가요의 노랫말처럼 운명이 나를 안고 산 것인지 내가 운명을 안고 산 것인지 우리는 주변머리 없이 산꼭대기 옥탑방에서 살았다.


 전쟁으로 졸지에 고아가 돼버린 엄마는 친척들이 떠넘기듯 아버지와의 만남을 주선해서 결혼을 했다. 외조부와 외조모 그리고 외삼촌까지 모두 연달아 돌아가시고 50년대 초반 온 동네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한다. 천도교를 믿어서 점쟁이 말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외갓집이 망해버린 거라고…


엄마는 종종 입버릇처럼 중요한 일은 점쟁이에게 한번 들어볼 만하다고 말하곤 했다.


마당에 있는 변소에 가면 구렁이가 천장에서 꼬리를 축 늘어뜨리고 있거나 건너 마을에서 바라다보이는 엄마 집 지붕에는 구렁이가 뻔쩍뻔쩍 낮에도 앉아있었다고, 엄마는 망조를 무시해버려서 엄마의 집안이 망한 것이라고 그리고 자신의 운명이 친척들에 의해 하루아침에 변해버린 일에 대해 평생 벗을 수 없는 엄청난 충격을 받은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건 엄마를 지배하는 거대한 어두움이 되어 버렸다. 엄마는 늘 무섭다고 했고 위험하다 말했다.


그리고 선명한 어느 오후.

엄마가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사람들의 부축을 받으며 시민아파트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나는 아파트 현관 계단에 앉아 혼자 놀고 있었는데 엄마의 일행 중 누군가가 내 손을 밟았다.


"아야!!"하고 고개를 들었을 때 뒤를 돌아보던 엄마의 얼굴은 피범벅이 되어 있었고 엄마는 손을 잡고 울고 섰는 나를 계속 돌아보며 걸어갔다. 사람들의 부축을 받고 걸어가던 엄마와 사라져 버린 아버지. 아버지를 데려간 마르고 키 큰 아줌마.


엄마는 마른 아줌마를 따라간 아버지에게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엄마는 코피가 터졌고 엄마의 코피는 멈추질 않았다. 하루 종일 코피는 멈추지 않고 그래도 아버지는 오지 않았다.


 손에 끼는 목장갑 한 장 구할 수 없고, 손잡이가 없는 삽에, 흙을 퍼담을 양동이 하나 구하기 어려워 대나무 바구니에 흙을 퍼 옮기다가 점심시간에 자리를 깔고 앉아 도시락을 펼쳐 놓는다.


스물 안팎의 젊은 직원들은 바간, 메틸라 근처에서 살던 메뚜와 민찌가 핀우린으로 와서 벽돌공장에서 일을 하다 우리 사무실 문간방에 세 들어 살게 된 인연으로 우리의 직원이 되었고, 메뚜와 민찌가 고향집에 전화를 걸어 사촌 누나인 딴딴이 오고, 딴딴이 나유와 앙앙을, 나유와 앙앙이 쪼모와 말라이 부부를 데리고 와서 직원 숙소도 방을 점점 늘리게 됐다.


 대부분의 커피농장의 숙소는 관리자급이 머무는 숙소랑 일당 노동자들이 머무는 숙소가 달랐다. 겨울 건기 고산지대의 추위를 피하기에는 형편없었다. 우리가 땅을 구하러 다니는 동안 여러 가지 주선을 한 우앙나잉이 날씨가 추운 곳이니 기왕이면 벽돌로 잘 지어주라고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요한과 나는 맨손으로 벽돌을 날라 숙소를 지었다.

우앙나잉의 조언대로 벽돌로 집을 지었다.

40년 전으로 돌아가 집짓기.

우리에겐 속아서 산 중고 트랙터가 한 대 있었다.


자신이 아는 집이 있다고 주선을 하는 통역의 말을 믿고 만달레이에 가서 거금을 들여 인도 트랙터를 샀다. 하지만 농장으로 배달된 트랙터는 새 트랙터가 아니었다. 무려 4천만짯을 주고 산 트랙터는 허구한 날 말썽을 피워댔다. (4천만짯은 대략 한화로 4천만원 정도이다.) 요한과 나 그리고 저민이 다시 만달레이에 가서 사장 앞에서 난리를 치고 나서 우리는 몇 개의 부품을 얻었을 뿐 분은 풀리지 않았다.


이미 통역은 잠적하고 통역의 아는 사람인 사장 아들은 그 통역을 알지 못한다고 발뺌을 한다. 여사장은 화가 나는지 손에 쥐가 나는지 손바닥을 폈다 오므렸다 얼굴을 일그러뜨리지만 우리는 교환을 받지도 환불을 받지도 못했다.

낯선 땅에서 바가지 한번 제대로 썼으니 이제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지 뭐. 어쩔 것인가.

새 트랙터로 속아서 산 4천만짯 짜리 트랙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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