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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셔레이드 걸 Jul 21. 2020

키오스크 잔혹사

아이스크림과 늙은 내 아버지

처음 키오스크 기계와 마주했을 때의 충격을 기억한다.


사실 엄밀히 따지자그 소박한 기계를 키오스크라고 부를 수는 없다.

그것은 일본 여행에서 무심코 들어간 소바집에서 접한 자판기였다.

결제 대용 정도의 간단한 기능인지라 그저 신기하고 재미난 이국적인 경험담으로 남았다.

이후 몇 년이 흘렀을까 퇴근 후 종종 들러서 저녁을 때우곤 하던 M버거 매장에 갑자기 무인 주문 기계가 들어섰다.

당혹스러움은 둘째치고 주문을 할수록 미궁에 빠져 결국은 중도 포기한 채 매장 직원에게 주문을 부탁했던 것이 내 첫 키오스크의 경험이자 실패담이다.

이후 어찌어찌 음식 주문에는 적응했지만 이번엔 편의점 무인 계산대가 등장했다.

뭐지? 2020년 대비 트레이닝인가?

당연하게도 나는 또다시 실패했고 직원이 무료하게 서있는 계산대를 향해 커피를 집어 들고 달려갔다.


몇 년 뒤 별 감흥 없는 2020년이 열렸고 우리 모두가 마스크와 여름이라는 어울리지 않는 아이템 콤비로 지쳐가고 있었다.

그런 중에 요즘 핫하다는 무인 아이스크림 매장이 우리 단지 상가에도 입성했다.

신이 나서 한 개 400원, 500원짜리 아이스크림을 마구 담았다.

봉지가 빵빵할 정도로 채웠는데 총합 7,900원ㅡ

편의점에서 뭐가 2+1이고 뭐는 1+1이고 눈을 부라리며 찾아대던 수고를 생각하니 더욱 감격스러웠다.

그날 이후 우리 집 냉동실에는 늘 아이스크림이 5개 이상 쟁여져 있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터졌다.

동네의 단골 돈가스집에서 식사를 마치고 나오던 아버지의 눈에 이웃 가게에 새로 오픈한 무인 아이스크림 매장이 들어온 것이다.

갖가지 종류에, 슈퍼에서 사는 것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의 아이스크림이 냉동고마다 그득그득 채워져 있었다.

플라스틱 바구니를 집어 이것저것 골라 담은 아버지. 이건 애엄마 좋아하는 거니까, 이건 달지 않은 거니까 종류별로 살뜰히 채워 계산대로 보이는 기계 앞으로 가져가셨다.

불편한 손가락으로 한참 동안 기계를 눌러가며 끙끙댔지만 결국 아버지는 늘 가던 농협으로 아이스크림을 사러 갔다고 멋쩍게 웃으셨는데 나는 속에서 열불이 났다.

돈도 카드도 있었지만 바구니에 담았던 색색깔의 아이스크림을 제자리에 돌려놓으며 아버지가 느꼈을 감정ㅡ좌절과 허무, 무력감 등등 떠올리고 곱씹자니 이번엔 차가운 분노가 치밀었다.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의 한 장면처럼 한석규에 빙의하여 결제 과정을 하나하나 알려드렸다. 어렵겠지만 여러 번 연습하 충분히 하실 수 있다고. 이거 할 줄 모르면 밖에 나갔다가 허기질 때(아버지는 당뇨를 오래 앓으셨다) 분식집이든 햄버거집이든 들어가서 끼니도 못 때우실  있다고,  있어도 배곯는 그런 미래가 오고 있다고. 그따위 말을 하는 내내 화가 났다.

멀쩡한 사람도 기계치로 만드는 저 밉살스러운 기계가 스마트폰은커녕 은행 ATM에서 출금만 겨우 할 줄 아우리 아버지에게 익숙해지려면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릴지.


얼마 전에는 퇴근길에 다이소에 들러 펫밀크를 비롯해 이것저것 생필품을 골라 계산대로 갔더니 떡하니 무인 계산기가 놓여있었다.

아이스크림 가게 덕분에 자신감이 붙어 이 정도야 껌이지! 하고 호기롭게 바코드를 찍어내려 갔으나 이내 등록되지 않은 상품이라는 앙칼진 안내음이 울려 퍼졌다.

당황하는 사이 안내 직원이 재빨리 다가와 그 상품은 자체 QR코드를 찍어야 한다고 알려주었다.

3만 원어치 물건을 사기 위해 3분 이상의 시간을 바코드 입력기와 씨름한 뒤 터덜거리며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그렇게 나는 오늘도  지고 말았다.

그래, 키오스크 네가 대세다. 짱먹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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