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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커피난다 May 01. 2018

자극이 필요할 때

커피, 이야기가 되다.

얼마 전 양평에서 커피 공장을 운영하는 은가비가 2018 T.O.H 1, 2, 3위 커피를 모두 들고 카페를 방문했다. T.O.H는 Top of Harvest의 약자로 동아프리카를 중심으로 그해 생산된 커피의 품질과 맛을 평가하는 대회이다. 생두 수출입을 위해 에티오피아에서 2주간 머무는 동안 샘플을 구했다는데 덕분에 생두 업체에서 정식으로 수입이 되기 이전에 T.O.H 수상 커피를 맛보는 영광을 누렸다. 

중남미를 중심으로 하는 C.O.E나 동아프리카의 T.O.H는 명품 커피가 되기 위한 등용문이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던 농장의 커피가 품평회를 거쳐 좋은 성적을 거두면 그때부터 커피 애호가들의 관심을 받게 된다. 각종 음악 경연대회에서 수상했다고 해서 모두 유명 가수가 되는 것은 아닌 것처럼 무수히 많은 품평과 비판을 거쳐 성장해야 비로소 명품이 되는 것이다. 

산지의 커피 생두가 국내에 유통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린다. 주로 배를 통해 수송을 하고 검역, 통관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업계에서는 진공 포장을 하거나 비닐포대로 몇 겹을 싸는 그레인 프로(Grain Pro) 포장을 하여 생두의 품질이 손상되지 않도록 각별히 노력한다. 

은가비가 가져온 생두는 품질이 우수할 뿐만 아니라 현지에서 생산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런지 향미가 굉장히 강했다. 커피 향기의 풍부한 정도(Fullness)와 세기(Strong)가 가장 뛰어날 때 ‘리치(Rich)하다.’라고 하는데 그 표현이 정말 아깝지 않았다. 


샘플 중에서 두리안이나 잭 프룻과 같은 동남아에서 맛볼 수 있는 과일의 향기가 나는 커피가 특별히 인상적이었는데 그 향기가 얼마나 강했던지 커핑을 하고 나서 한참이 지난 후에도 카페를 방문하는 손님들이 과일향기를 물어볼 정도였다. 

오랜만에 아프리카 커피 산지의 새로운 소식들을 듣게 되었고 게다가 신선한 커피를 맛볼 수 있어서 좋았지만 나는 은가비가 떠난 후에 어깨가 축 처졌다. 카페에서 판매하고 있는 예가체프 내추럴과 은가비가 가져온 샘플을 비교해 보았기 때문이다. 은가비가 방문하기 전까지는 카페에서 판매 중인 예가체프의 향미가 뛰어나다 생각했고 손님들에게도 자부심을 갖고 소개를 했다. 하지만 이제 그런 판단의 기준이 몹쓸 것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커피든 사람이든 서로 비교하지 말자고 늘 되뇌면서도 나는 또 이렇게 비교를 하고 말았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내가 반성하고, 또 혼란스러웠던 것의 본질은 스스로 얼마나 나태해졌는지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처음 로스터리를 열었을 때에는 매일 아침 커핑을 했고, 한 농장의 커피를 오랜 기간 동안 판매하지 않았다. 새로운 지역, 경험해 보지 못한 향미를 가진 생두를 찾는 일상이 무척 즐거웠다. 그런데 요즘은 그 주기가 매우 길어졌다. 판매하던 생두를 교체하면 쇼핑몰 상세페이지나 카페 메뉴판을 수정해야 하는데 그 일이 귀찮고 번거롭게 느껴져서 언제부턴가 괜찮은 생두를 찾으면 몇 달치를 잔뜩 창고에 들여놓고 있다. 

나태함, 귀차니즘으로 커피 향미를 평가하는 나의 감각들이 녹이 슬 즈음 은가비가 나타난 것이다. 은가비가 잠시 머물다가 간 이후로 나는 여러 생두 업체에서 10종류가 넘는 예가체프를 구입하여 미친 듯이 샘플 로스팅과 커핑을 했다. 

뜨거운 열기와 함께 뿜어져 나오는 커피 향기를 맡으며 커피라는 세계에 처음 발을 디딜 때의 설렘을 다시 느꼈고 손님을 대하는 내 모습도 훨씬 활기차게 변했다. 고정적으로 판매되던 10여 종의 커피가 놓여 있던 매대에는 매주 꼭 한 두 가지 새로운 농장의 커피가 놓였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일이든 오래되고 반복되면 익숙하고 편안해진다. 그때부터 남아도는 에너지를 어떻게 사용해야 할까? 새로운 무언가를 찾아 나서거나 또는 자신에게 닿아 있던 것들을 다시 돌이켜 보는 일은 삶을 흥미롭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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