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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커피사유 Dec 30. 2021

무지(無知)

어디서부터 나 자신을 증명할 것인가

사유(思惟) 매거진은 저자 커피사유가 일상 속의 경험으로부터 얻은 느낌과 생각들을 기반으로 작성한 에세이를 자체 선별하여 연재하는 공간입니다.

 더 많은 생각들을 만나보고 싶으시다면, 저자의 블로그를 방문해주세요.


 대학(大學)에 들어오고 그래도 이제 비로소 학생 구실이라도 할 수 있게 된 나는 계속 무언가를 배워 나가면 배워 나갈수록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움만 느낀다.


 무지는 부끄러운 것이 아니고 오히려 새로운 가능성이 존재함을 보여주는 신호라는 말을 어디서 들었던 것 같기도 한데, 이제 나에게 무지란 더없이 부끄러운 것이며 한없이 부담스러운 것이고 동시에 스스로에 대한 끝없는 원망의 출발점이 되고야 말았다. 이 광적인 감정 또는 경우에 따라서는 포효라고도 표현할 수 있는 이러한 무지에 대한 나의 반응은 도대체 어디에서 기원하였는지 나로서는 알기가 어렵다. 그러나 이러한 반응이 분명히 최근 들어 나의 이성이 자주 지각할 정도로 증가하고 있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나는 어쩌면 이러한 나의 광적인 증상들은 대학 생활의 영향 하에 놓여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해보았다. 대학에서 나는 사람을 별로 만나지 않았다. 기껏해야 내가 했던 것이란 몇 평 남짓되는 작은 기숙사 방에서 그나마 고시원보다야 넓은 면적에 감사하면서 룸메이트와 1여 년을 동고동락하는 것이었다. 그 유명한 말대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아마도 사회적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었던 나는, 즉 타인을 대면할 수 없었던 혹은 대면하지 않았던 나는 유일하게 남은 것이었던 나 자신을 대면한 것이 아니었을까. 지난 1년 동안 대학에서 마주한 것은 지식도 타인도 그 어느 것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광적인 증상이 이제는 극심할 정도로 나를 괴롭히는 것인가.




 어느 글에서 나는 대학에 서 있는 것은 교수도 학생도 아닌 이념이라는 말을 본 적이 있었다. 그 말은 틀리지 않아서 대학에 들어간 나는 지난 1년 동안 이념이 대학의 땅에 서 있음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자아(ego)가 이념에 직면하기 전에 그 이념 앞에 나는 한 사람이 더 서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그 사람은 이상하게도 나와 똑 닮았었다. 아니, 그냥 나 자신이었다. 이념이 서 있는 대학의 땅 위에는 나 자신도 서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금 더 따지고 보면 비단 대학뿐만이 아니기는 했다. 어느 공동체든, 내가 그곳에 속한 한 그 땅 위에는 이념과 나 자신이 모두 거기에 서 있었다.


 하지만 대학이라는 기관은 고등교육기관이라는 이름 하에 지난 수십 년 동안 수많은 사상과 사람이 거쳐간 기관이라는 점에서, 앎의 최전선이라고 흔히 불리는 땅 위에 건재하는 기관이라는 점에서 어쩌면 이 대면을 그리는 무대의 배경으로서 가장 적절한 장소일 것이다. 수많은 사상과 사람이 거쳐갔으며 거쳐가고 있는 대학의 땅 위에서 그중 단지 하나에 불과한 나 자신에게 있어 점점 커져가는 이념과 나 자신이라는 두 거인을 마주하는 장소로 대학이라는 배경만큼 적절한 곳은 없을 것이다. 그러한 탁월한 배경을 가진 땅이기에, 나는 아마도 그 땅 위에 두발을 딛고 서서는 그들과 마주하고 있는 것을 그 어느 때보다도 가장 명료하게 지각할 수 있게 된 것은 아닐까. 이념과 사람들 앞에서, 그 기나긴 역사 앞에 서 있는 나 자신을 나는 본 것이 아닐까.




 비어 있다. 아무것도 모른다. 확실한 것 하나 없고 제대로 할 줄 아는 것도 하나 없으며, 스스로의 의미 하나도 찾기 어려운, 그러한 비어 있음이 여기에 있다. 거의 대부분의 명제에 대해서 내릴 수 있는 유일한 결정이란 오류를 피하기 위한 판단의 중지가 유일하며, 세상이 어떻게 굴러가는지도 모르겠는데 속으로는 이 세상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알고야 말겠노라고 욕구를 불태우는 내가 여기에 있다. 이뤄질 수 없는 꿈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구태여 남은 수명을 여기에 바치겠노라고 어리석게 선언하고 있는 자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나는 포기하는 것이 옳다는 거짓된 명제를 향하도록 나 자신을 설득하려는 것은 아니다.


 모르기 때문에 나는 아는 것 없는 나 자신을 대면하는 것이다. 나는 무지, 열려 있는 광활한 장, 끝없이 이어져야 할 겸손, 그리고 스스로의 무지에 잡아먹히고 스스로의 무능에 묶여 공포에 떨고 있는 알몸 상태의 나 자신을 대면하는 것이다. 자유는 자유이되, 어느 하나 의지할 것 없이 홀로 서 있기를 요구하는 저주스러운 자유의 한가운데에서 사상과 신체 모두가 서 있는 나 자신을 나는 대면하는 것이다. 그 저주스러운 자유의 손아귀에서 떨고 있는 나는 대학이라는 광야에서 스스로의 무능, 그리고 무지에 대한 전면적인 공포란 기우에 불과하다는 것을 애써 스스로에게 증명해 보이기 위해 나 자신을 대면하고 있는 것이다. 공포에 떨고 있기 때문에 방황하고, 방황해서 다시 공포에 떠는 순환 속에서도 나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가 인간이 아니던가.


 어디서부터 나 자신을 증명할 것인가. 무지와 무능 속에 나 자신은 누구이며 어디로 가야 하는가, 그리고 이 방황 속에서 다시 반복되는 공포의 포효 속에서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대답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바로 이 무지 때문에 나는 여기에 다시 서 있고 묻는 것이다. 수많은 이념과 사상가들이 거쳐간 대학의 땅에 서서 묻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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