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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

나의 데미안을 찾아서

by 커피우유

본가 서재 책장에는, 엄마의 이메일 주소에서 보았던 ‘데미안’이라는 제목의 책이 있었다. 부모님께 했던 작은 거짓말에 인생이 무너져 내릴 것 같았던 초등학생 시절, 호기심에 책을 들쳐 봤던 그때는 자신의 거짓말로 인해 고통받는 싱클레어의 모습에 마음 졸였었다. 그 이후의 이야기는 초등학생인 내가 공감하기에는 어렵고 지루했던 탓에 책을 덮었던 기억이 남아있다. 시간이 흘러 25살이 된 지금에서야 이 책을 완독하게 됐다. 물론 개인의 경험은 나이에 국한되지 않고, 사람에 따라 그 깊이를 달리 하지만 말이다. 가정에서의 요구, 유혹적인 다른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동경, 자아의식과 실현. 이와 같은 것들이 솔직하게 담긴 싱클레어의 일기장을 보며 나의 유년 시절과 미래를 엿볼 수 있었다.




나의 데미안

데미안 같은 존재가 내 곁에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사실 지금도 그렇다. 도저히 답을 내릴 수 없는 질문으로 가득 찬, 풀리지 않는 인생에 약간의 방향성이라도 제시하는 존재가 있다면 인생을 조금은 수월하게 살 수 있겠다는 짧은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데미안이 그랬듯, 싱클레어 인생의 모든 순간에 데미안이 함께 하지는 않았다. 일부 결정적인 순간에 나타나긴 했지만, 결론적으로 난관을 헤쳐 나가는 주체는 싱클레어 본인이었다. 이 지점에서 나는 데미안은 곧 싱클레어라는 것을 짐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는 싱클레어가 진정으로 자신의 자아를 의식하고 내면의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었기에, 데미안이 그를 떠났을 것이라는 결론으로 이어졌다.


<데미안>은 기존의 세계를 유지하고 허무는 일과 다른 세계로 이전하는 일은 고독하게, 즉 주체성을 갖고 행해져야만 함을 강조한다. ‘나를 도와준 사람도 아무도 없었어. 너 스스로 생각해 내려고 애써야 해, 그러고는 정말로 네 본질로부터 나오는 것, 그걸 하면 돼.’ 싱클레어가 데미안에게 그랬듯,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에 명확한 답을 갈구하는 크나우어에게, 데미안이 아닌 자신의 입으로 이 말을 뱉었다는 점은 이를 뒷받침해 준다. 요행을 바랐던 나는 싱클레어의 데미안이 아닌, 나의 데미안을 찾아야 하는 더 어려운 과제를 얻게 됐다.




폐허에서 또 다른 폐허로

싱클레어는 자신의 유년은 폐허가 되었다고 한다. 나는 이 폐허에 눈길이 갔다. 그에게 있어 폐허는 다음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라 생각된다. 첫째는 기존의 색과 생명이 부재하는 것이다. 부모의 세계를 벗어나며 오로지 ‘나’에 집중하게 된 싱클레어는, 더 이상 유년 시절의 성탄절은 즐거운 행사가 아니었으며 어머니의 다정한 입맞춤은 축복이 아니라 죄책감을 가져다주었다. 둘째는 타인에게 ‘나’를 억압받는 것이다. 데미안을 만나기 전까지 싱클레어는 타자의 세계에 속하며 그 외의 것을 부정해왔으나 그럼에도 ‘나’의 세계는 점점 더 커져만 갔다. 이 과정에서 발생한 그의 의식과 무의식 간 긴장에 고통받았으며, 그때마다 데미안이 앞에 나타나 이를 해결 혹은 해소해 주는 구도자 역할을 해주었다. 이렇게 폐허는 다시 돌아갈 곳도 못 되는 곳을 뜻하기도 한다.


이 폐허는 소설 말미에도 다시 등장하게 되는데, 이때는 초반부의 폐허와는 다른 감각을 주며 싱클레어에게 보인다. 그것은 전쟁 한가운데에 놓인 폐허다. 전쟁을 통해서 싱클레어는 그토록 원하던, 홀로 쫓아왔던 운명을 전 세계 사람들과 함께 겪게 된다.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대포에서 에바 부인의 모습을 보기도 한다. 전쟁이라는 행위에서 비롯되는 파괴, 거기서 파생되는 새로움을 기대하는 듯 보였다. 싱클레어에게 있어 전쟁은 에바 부인과 같이 자신을 온전하게 만들어 주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들기도 한다.


폐허의 조건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폐허 이전의 것이 의미 있는 것이 되어야만 한다. 싱클레어가 다른 세계를 접하고 형성하는 과정에서 폐허가 된 것들은, 의미를 상실했다기보다는 가치의 방점이 달라진 것이라 생각한다. 어느 꿈이든 새 꿈으로 교체되기에 그것에 집착하면 안 된다는 에바 부인의 말도 이와 맥을 같이 한다. 그렇기에 폐허라고 해서 과거의 것이라 배척하지 않고, 현재의 양분이 되어준 가치임을 인정하고, 폐허도 '나'의 일부임을 받아 들여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지점이었다.




온전한 '나'로 가는 길

밝은 세계와 어두운 세계. 작중 세계는 표면적으로는 이분법적 사고로 구분되는 듯 하나, 이는 의미 체계에서의 관점에서 생각했을 경우에 국한된다. 싱클레어는 가장 환한 세계였던 부모의 세계에서 하녀의 어두운 세계를 보고, 살아 있는 데미안에게서 죽음을 느끼고, 아니라고 부정했던 자신의 깊은 내면에 어두운 세계가 있음을 알게 된다. 또한 데미안의 모습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고 크로머의 악의 세계가 자신에 박혀 있음을 인지하기도 한다. 신이면서 악마이고, 재앙이면서 축복인 아브락사스처럼 쉽게 정의 내릴 수 없는 것들이다. 정리하자면 <데미안>은 구분이 아닌, 확장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 적합하다는 것이다. ‘나’의 세계를 보다 견고히 하고 확장시킬 수 있게 도움 주는 데미안을 만나면서, 싱클레어는 끊임없이 물음을 던지고, 의심하게 된다. 그렇게 그는 유년 시절의, 부모의, 밝은 세계를 벗어난다.


이렇게 싱클레어는 알을 깨려고 투쟁하는 과정에서, 데미안의 어머니 에바 부인에게 큰 영향을 받는다. 싱클레어의 에바 부인을 향한 사랑은 자신의 내면에 대한 집착과 같다. 작품 전반에 걸쳐 언급되는, 내 안에는 이미 모든 것이 담겨 있고 이를 인식하는 사람은 카인의 표식을 갖고 있다는 대목을 떠올려보자. 자신 내면의 여성상인 베아트리체, 그녀와 닮은 데미안, 어쩌면 싱클레어 본인의 모습까지. 이를 모두 담아낸듯한 에바 부인을 사랑이라는 감정을 통해 받아들이며 온전한 ‘나’로 가는 길에 가까워졌다고 생각한다.






싱클레어의 투쟁을 보며 앞으로도 어쩌면 죽을 때까지 이어질 초월의 과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세계를 구분 짓지 않고, 오로지 ‘나’의 세계를 확장시키고 이를 받아들이며 온전한 ‘나’가 되기 위해 걸어가야 할 길이 멀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그런 나에게 <데미안>은 아벨을 따르는 것이 마음 편하고 쉬웠던 나에게, 카인을 바라볼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 그 과정은 수월하지 않겠지만 ‘나’라는 목적지가 정해져 있음은 조금의 위안이 된다.


헤르만 헤세의 다른 작품 <싯다르타>에는 아들의 모습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싯다르타’라는 인물이 나온다. 이는 내가 떠나왔던 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 부모님도, 나와 같은 경험을 했으리라는 걸 짐작하게 해주었다. 엄마의 이메일 주소 속 ‘데미안’을 다시 떠올리며, 어렸을 적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대학을 가지 못한 엄마가 50대가 되어서 대학 진학을 준비하는 엄마가 겪었을 그리고 겪고 있는, 엄마 자신으로 가는 길을 잠시 생각해 보았다. 평균 기대 수명의 절반을 산 나이가 되어서도 그 길이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안타까움과 동시에 안도감이 든다. 그 길을 갈 수 있기에 짐승이 아닌 인간일 수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지금보다 더 나이가 들거나 ‘나’와 가까워지는 때, 그리고 다른 젊은 싱클레어들을 만나고 그들이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사람이 되었을 때, <데미안>을 다시 읽는다면 또 다른 갈증과 감각을 느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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