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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해 Jan 21. 2022

[k의 기록] 13. 종로에서 망원까지 1만 7천보

작은 모험


서울은 여기가 저기 같으면서 그곳이 또 이곳 같다. 쳇바퀴 돌듯 반복되는 서울생활이라 모든 게 다 비슷해 보이가. 그럴 땐 서울의 새로움을 찾아 미련 없이 떠난다. 가보지 않은 길을 찾아 '작은 모험'을 하는 게 나만의 '도심 속 산책'이 된 지 오래다.


오늘은 종로에 일정이 있어 들렀다가 망원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인사동을 지나 경복궁 쪽으로 갈까 하다가 지도가 알려주는 데로 시청을 지나 착실히 걸어가 보기로 했다. 이 길로는 안 가본 것 같아서.


전태일기념관에서 나온 게 18:00시가 조금 안된 시각. 전태일 기념관에서는 공연을 봤다. 1980년, 민주화 운동 시대에 동일방직공장 같은 사건을 풀어내며 인간다움에 대해 묻는 공연이었다. 장소가 장소이니만큼 배우들의 연기와 극이 울림 있게 다가왔다.


근로기준법 책을 안고 분신했던,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라고 외친 한 젊은이, 전태일. 전태일에 대한 내 기억은 중학생 때 학교에서 틀어준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였다. 홍경인 배우의 이미지가 전태일과 참 많이 닮아서 '근로기준법을 준수해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하고 외치던 그 눈빛이 더욱 잊히지 않는다.


그때와 지금은 많이 달라졌을까. 한국에서 가장 많은 일자리가 분포되어 있는 서울. 그에 따라 넘쳐나는 근로자 수. 새벽부터 새벽까지 불이 꺼지지 않는 도시. 우리는 제대로 된 노동을 하고 그 대가를 받으며 살고 있을까.


전태일 기념관을 나와 시청 쪽으로 차분히 어갔다. 겨울 해는 역시 짧다. 어느새 도로는 자동차의 붉은 등으로 물들고 있었다.






덕수궁 돌담길을 둘러보고 갈까 하다가 관뒀다. 백팩에 들어있는 전자기기가 꽤 무거운 데 갈 길은 멀다. 발 닿는 데로 걷는 것을 더 좋아하지만 늘의 모험엔 실한 지도가 들려있다.


그런데 아쉽게도 그 뒤로는 거의 직진이었다. 충정로를 넘어 아현 가구거리를 지나 이대, 신촌까지. 원만한 직진이었다. 굽이지고 여러 갈래가 있어야 탐험할 맛이 나는데 오늘의 작은 모험은 평탄하려나보다.


그런 나를 중간중간 나타나는 골목길들이 들어와보라며 유혹했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손에 들린 지도를 꺼버리고 기꺼이 몸을 던질까 고민했지만 골목길이 너무 어두워서 자제했다. 밤의 골목길은 무척이나 분위기가 있고 매혹적이지만 그만큼 위험할 수도 있다.


골목길은 참 매력적인 공간이다. 그래서 여행을 가면 꼭 마을 골목길로 정처 없이 돌아다닌다. 구비구비진 그 낯선 담벼락에 숨어 있는 동네 사람들의 이야기가 '야, 너두?' 하는 것 같다. 역시 사람 사는 곳 다 똑같지 뭐. 낯선 곳에서 발견한 익숙함에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아무튼 여기는 서울의 밤도시. 어둠 속에서 홀로 춤추고 있는 골목길을 뒤로한 채 나는 안전하고 원만한 직진 길로 나아갔다.  






아현역을 지나 한참 이대 쪽으로 가는데 아 맞다! 여기! 하는 생각이 스쳤다. 예전에 이사 갈 집을 보기 위해 발품 팔았던 곳 중 하나였다. 내가 본 은 그 자체로는 나쁘지 않았으나 꽤 높은 언덕 위 빌라였고 4층인가 5층의 높은 층임에도 엘리베이터가 없었다. 게다가 복도까지 너무 좁아 이사 자체가 힘들 것 같아 관뒀었다.


그게 여기쯤이었는데 하고 짐작으로 살펴본 그 장소에는 빌라들이 싹 사라지고 멋진 아파트들이 들어서 있었다.


언제 바뀌었대. 나만 그 기억 속에 머물러 친한 척한 것 같아 괜스레 머쓱했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지만 서울의 변화는 그보다 더 빠르다. 체감으로는 하루아침에도 휙휙 변하는 곳이다. 그 속도가 익숙하다가도 때로는 늘 새롭고 가끔은 거워 헐떡댄다.


서울은 계속 변할 것이다. 그 속에서 나는 늘 익숙함과 새로움의 표지판을 보고 망설이고 있다. 이 타이밍에는 어디로 가야 할까? 애석하게도 인생의 지도는 재하지 않는다. 그저 걸어가 보는 수밖에.


지도대로 걸으니 종로에서 망원까지 2시간 30분이 걸렸고 1만 7천보 걸었다. 백팩 때문인지 어깨가 아팠지만 마음은 계속 들떴다.


발 닿는대로 걸었다면 이보단 더 걸렸을 게 분명하다. 그래도 다음번엔 지도 없이 걸을 예정이다. 어차피 가고자 하는 목적지는 같으니까 과정을 어떻게 즐길는 내 선택이다.


서울은 여기가 저기 같으면서 그곳이 또 이곳 같다. 래도 이 익숙함 속에서 새로움을 발견할 수 있는 서울의 밤거리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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