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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해 Feb 16. 2022

[k의 기록] 14. 스며들다.

이사와 초콜릿

조앤 해리스가 쓴 책 [초콜릿]을 어렸을 적 무척 재미있게 보았다. 굉장히 두꺼운 갱지에 인쇄되어 나온 책이라 어린 친구가 도전하기엔 쉽지 않았는데도 책에서 손을 뗄 수 없었다. 읽는 내내 초콜릿의 맛과 향에 취해있었다. 초콜릿이라면 환장하는 나이기에도 그랬지만 이 책에 나오는 초콜릿은 특별했다.


이국적인 이방인 비세 로셰와 그의 딸 아누크카 프랑스에 어느 작은 마을 교회 앞에 정착해 초콜릿 가게를 열게 된다. 마을 사람들은 굴러 들어온 돌인 그녀를 욕하면서도 그녀가 만드는 신비한 초콜릿 - 나를 홀린 그 초콜릿 즉 마음을 치유하는 힘이 담겨 있는 초콜릿 - 때문에 그녀의 가게에 한 번씩은 꼭 들려 고해성사 아닌 고해성사를 하곤 했다. 아무리 툴툴 대는 사람이라도 그녀의 초콜릿 앞에서는 순한 양이 되었다.


비세 로셰가 마을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가 굉장히 매력적이었다. 그녀는 마을 사람들 사이에 스며들기 위해 많은 노력을 들였지만 한 편으로는 자신만의 분명한 선을 지켰다. 어른스럽고 무척 세련된 방식이었기에 나는 그녀의 이야기에 푹 빠져들었다. 초콜릿을 만드는 그녀 옆에서 한 입만 달라는 아누크처럼 코를 벌름거리고 있는 나를 발견하곤 했고 한동안 내 꿈은 초콜릿 가게 사장이었다.








최근에 일산으로 이사를 왔다. 망원동과는 다른 낯선 공기를 코 속 가득 넣다가 문득 한동안 잊고 지냈던 [초콜릿]이 생각이 났다. 그녀와 그의 아이를 떠올리자마자 어디선가 익숙한 초콜릿 향이 풍겨져 왔다. 그녀의 신비한 초콜릿 덕분에 한결 나아진 기분으로 일산 주변을 살펴보았다.


망원동도 사람이 그득그득한 도시 느낌이 아니었는데 일산은 그보다도 더 도시 느낌이 없었다. 한적하고 고즈넉한 것이 마치 비세 로셰와 아누크가 자리 잡은 프랑스의 작은 시골 마을 같았다.


간단한 산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찐득하면서도 가벼운 초콜릿 향이 가득한 비세 로셰의 집과는 달리 막 이사 온 내 집은 텅 비어있었고 어딘가 달뜬 느낌이었다. 몇 년 간은 내 체취가 묻을 곳이니 정을 붙이려는데 왠지 쉽게 마음을 풀 수가 없었다.


새로운 시작.


이 단어를 주변에서 자꾸 나에게 갖다 붙였다. 누군가는 화사한 꽃을 선물했다. 그 꽃은 정갈하게 내 책상 위에 놓여졌지만 향기에 젖어들진 못했다. 주변인들의 감정을 좀처럼 따라갈 수가 없었다. 나는 아직 불안, 두려움, 기쁨, 설렘 그 어느 것에도 충분히 스며들지 못했는데 오히려 주변이 난리였다. 그들이 이사를 한 것 같았고 그들이 가게를 여는 것 같았다. 물론 지인들의 순수한 응원과 축하의 마음을 무시하는 건 절대로 아니다.


다만 비세 로셰가 만든 마음을 치유하는 초콜릿이 간절히 필요한 시기였다. 부드러운 미소로 이야기를 나누고 충분한 공감이 오고 간 뒤 녹여 먹는 초콜릿 하나. 거기에 따뜻한 밀크티나 커피까지 한 잔 곁들이면 금상 첨화겠다.







며칠 안 돼 일산에 꽤 적응이 되었다. 정확히는 생활 반경에 따라 반복적으로 가 본 길에는 익숙해졌다. 붕 떠 있는 것 같은 온갖 가구와 가전을 집어넣으니 쏟아부은 돈만큼은 확실이 정이 붙었다.


이 익숙함이 시간이 흐르면 편안함이 될 것이고 어쩌면 지루함으로 끝날지도 모른다. 그러면 그땐 또다시 떠나야지. 비세 로셰가 왜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며 이방인을 자청했는지는 책을 읽은 지 오래되어 기억이 나지를 않는다.


나는 왜 그녀처럼 오자마자 떠날 생각을 하고 있을까. [초콜릿]에서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 비셰 로셰는 특정인에게 초콜릿을 '녹여 먹으라'라고 권했다. 너무 맛있어서 금방이라도 씹어 먹고 싶겠지만 그걸 참고 녹여 먹다 보면 초콜릿 향이 천천히 입 안 가득 퍼질 거라고 했다.


나는 스스로에게 스며들 수 있는 시간을 주기로 했다. 천천히, 내 마음 깊숙한 곳에서 새로운 시작이라는 즐거운 향이 퍼져 나갈 수 있도록 지금은 마음을 녹이는 시간이라 명했다. 단숨에 꿀꺽 삼켜 끝내기에는 지금 시작을 오랜 시간, 음미해야 하는 때인가 보다.





발렌타인데이라고 누군가 직접 만든 수제 초콜릿을 선물해주었다. 동글동글하게 말린 초콜릿 네 알이 앙증맞게 포장되어 있었다. 작지만 묵직한 그놈을 입에 넣는 순간... 미간이 찡그려졌다. 가루약을 뭉쳐 만든 맛이 났다. 진한 다크의 쌉쌀함을 그가 넣었다는 생크림과 우유가 하나도 잡아주지 못했다. 이 초콜릿은 한약방에서 줬던 소화 안 될 때 먹는 환 맛이 났다.


좋아. 입에 쓴 게 약이여.  


나는 초콜릿 네 알을 천천히 음미하며 먹었다. 놀랍도록 텁텁하고 씁쓸한 초콜릿 맛에 연신 웃어 제꼈다. 나의 시작을 축하하기 위해 야무지게 포장한 사각 틀도, 유산지도 그냥 웃겼다. 역시 초콜릿은 치유하는 힘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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