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기록] 12. 커피 잘 사주는 할머니

이렇게나 복잡하다.

by 겨울해

"언제 커피나 한 잔 하자."


어느샌가 이 말은 '밥 한 번 먹자.' 만큼이나 익숙한 인사치레가 되었다. 가볍게 건네는 커피 한잔의 인사에도 수 많은 인간관계와 사회적 언어가 담겨 있다.


우리는 얽히고 설킨 이해관계 속에서 사회적 지위를 얻기 위해 무언가를 상대방에게 대접할 때가 있는데 그럴 때 '커피 쏘기'는 꽤 괜찮은 기회비용이 된다. 커피 한 잔을 대략 3~4천원 꼴로 친다면 밥 한 번 사는데 드는 몇 만원 많게는 몇십만원 보다 훨씬 적게 든다. 그럼에도 내가 너를 대접했다고 생색내기에도 무난하다.


그러니까 살다보면 언젠가 한 번 쯤 사게 되는 커피 한 잔 값에는 적절한 사회적 지위와 품위 유지비까지 담겨 있는 것이다.


우리 가게에는 거의 매일같이 남들에게 커피를 쏨으로써 좋은 평판을 유지하는 한 할머니가 계셨다. 그녀는 특유의 오지랖으로 동네 아이들에게까지 아이스크림을 종종 사주곤 하는 좋은 할머니였다. 그리고 나에게는....


차라리 오지 않는 것이 맘 편한 손님이었다.



1. 그녀의 첫 인상

할머니는 어느 날, 우리 가게에 나타났다.


"저기- 아메리카노 두 잔 줘요. 한 잔은 좀 달게 해서. 그리고 내가 허리가 아파서 그런데 혹시 저기까지 배달 될까?"


그녀의 첫인상은 꽤 근사했다. 세상 모든 것을 용서하게 될 것만 같은 특유의 인자한 표정이 꼭 부처님 같았다. 인생을 통달한 것 같은 넓은 표정과는 달리 왜소한 체구로 지팡이를 짚은 할머니가 가리킨 곳은 카페 앞 작은 공원 벤치였다. 거기엔 할머니들이 띄엄 띄엄 앉아 계셨다. '뭐, 이 정도 거리야 어려울 게 있나.' 생각하며 '네, 갖다 드릴게요.'하고 웃으며 답 해드렸다. 할머니는 부처의 미소를 잃지 않으며 '고마워요, 수고좀 해줘요.' 하고 나갔고 그렇게 우리의 인연은 시작되었다.





2. 부처에서 왕으로.

어느날, 밖에서 무언가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나는 길게 올라선 메뉴판 사이로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공원에 높게 올라선 풀들 사이로 할머니가 근엄하게 입을 앙 다문 채 나를 향해 손짓하는 게 보였다. 키가 작으신 편이라 풀 사이로 얼굴만 둥둥 뜬 채였다. 할머니의 알록달록한 분홍옷을 겨우 발견한 나는 문을 열고 물어봤다.


"무슨 일이세요?"


"저기- 아메리카노 두 잔 좀 갖다 줘요. 한 잔은 이 할머니가 먹을거라 좀 달게~ 미안해요. 허리가 아파서 내가 거기까지 가는게 힘드네."


작은 교통사고가 난 이후로 허리 거동이 불편해졌다는 그녀에게 아메리카노 두 잔을 직접 대령해드리면서 '얼른 쾌차하세요.' 하고 안부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할머니는 인자한 목소리로 '수고했어요.' 라고 답했다.


그 뒤로도 할머니는 계속 밖에서, 수풀 사이에서 나를 불렀다. 그녀의 근엄한 손짓을 보지 못하고 간혹 내가 다른 일을 하고 있으면 가게 안에 있던 손님이 조심스레 나에게 말을 걸었다.


"사장님, 저 할머니가 자꾸 부르시는데요?"


몇 번은, 공원과 우리 가게 사이를 지나가던 바깥 행인분들이 친히 가게 안으로 들어와 나를 불러주시기까지 했다.


"사장님, 할머니가 할 말 있으시대요."


가게문을 닫으면 바깥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아 할머니가 나를 어떻게 부르는지 알수는 없었으나 손님들의 반응을 미루어 보아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손님들은 왕처럼 권위적인 태도로 나를 부르는 할머니의 목소리에 내가 무언가 잘못 한 줄 알았던 모양이다. '뭐야, 무슨 일 생긴거 아냐?' 하며 어떤 손님은 벌떡 일어나기까지 했다.


나는 참 오묘한 느낌을 받으며 그녀의 원거리 주문을 접수한 뒤, 꼬박꼬박 배달을 해드렸다. 할머니는 아메리카노를 받아들며 주문할 때와는 달리 부처님처럼 우아하게 웃으며 말했다. '고생했네요. 하나는 저 할머니 갖다 줘요.' 그러면 다른 할머니들은 매번 '아이고, 뭐 이런 걸 자꾸 사줘~ 괜찮은데.' 하며 아메리카노를 받아들였다. 나는 할머니에 대한 경계 레이더를 슬슬 작동 시켰다.




3. 가면을 벗은 그녀의 맨얼굴

그래도 늘 아메리카노 몇 잔씩 사 드시는 할머니를 위해 어느 날은 작게 만든 수제 쿠키 두 개를 서비스로 챙겨갔다. 내가 기대했던 반응은 언젠가 보여주신 어린아이처럼 해맑은 표정으로 '아니, 뭐 이런걸 다. 고마워요~' 하는 거였다. 싱긋하며 부처님처럼 웃는 것보다 오히려 주름이 쫙쫙 펴진 채 웃던 그녀의 얼굴이 보기 좋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아주 확실하게 내 예상은 빗나갔다.


"그거는 저 할머니 갖다 줘."


그녀는 내 손에 들린 아메리카노 한 잔을 보며 옆 벤치에 있는 할머니를 가리켰다. 한 손으로는 내가 건넨 수제쿠키가 무엇인지 확인도 하지 않고 우악스럽게 낚아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누가 보면 내가 그 쿠키를 빼앗으려는 줄 알았을 정도였다. 주고도 도둑놈이 된 색다른 기분에 잠시 벙쪄 어버버 거렸다.


"하나 더 갖다주지. 이것만 갖고 왔어?"


할머니는 근엄한 왕이 되어 불려온 신하를 흘겨보았다. 그녀는 하나 건너 뛴 벤치에 앉아 있는 할머니가 혹여라도 서비스 쿠키에 대해 알게 될까봐 살짝 긴장한 상태로 속삭였다. 순식간에 펼쳐진 '호의가 둘리!' 상황에 나는 그저 허허 웃으며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그 뒤에도 순수한 호의의 표시로 몇 번 더 갖다 준 적이 있는데 돌아오는 반응은 똑같았다. 쿠키를 낚아채듯 바로 주머니로 가져가는 그녀의 거친 손길과 하나 더 안준다고 언짢아 하는 그녀의 눈빛을 느끼며 '아, 이제 더 이상의 서비스는 없다.' 하고 황색불이던 경계 레이더를 빨간 불로 바꾸며 가게로 돌아왔다.


할머니는 서비스 쿠키를 옆에 계신 할머니와 나눠 드실 마음이 없는 듯 했다. 커피를 사준 다른 할머니가 건너 벤치가 아니라 옆자리에 있을때 내가 서비스를 드리면 '자네가 하나만 줘서 나눠 먹을 수가 없네.' 하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대접받은 할머니가 조금 떨어져 있으면 그녀는 금세 왕이 되어 '하나 더 가져와.' 라고 했다.


그런데 나는 이게 참 아이러니했다. 진정으로 베푸는 마음에서 커피를 쐈다면 공짜로 얻게 된 쿠키 또한 나누지 않는가? 오히려 커피보다 그게 더 훨씬 적은 비용으로 좋은 평판을 얻을 수 있는 괜찮은 기회비용이 아닌가? 무엇보다 포장이 하나로 되어 있을 뿐, 내가 드린 봉투 안에는 다른 종류의 쿠키가 하나씩 들어있었다. 그러니까 포장을 뜯어서 너 하나, 나 하나 하고 나눠 먹으면 되는 것이었다.


마치 제 사료는 남들에게 내어주고 코딱지 만한 제 간식을 빼앗길까 으르렁 거리는 작은 치와와 같은 그녀의 모습을 볼 때마다 그녀가 주변인들에게 커피를 계속 쏘는 본질적인 마음에 대해 자꾸만 의심이 갔다. 보통 누군가를 대접하는 이유는 고마워서 혹은 부탁할 것이 있어서 또는 원래 베풀기 좋아하는 사람이어서가 보편적인데 그녀는 이런 연유가 아닌 듯 했다.


부처님 같았던 첫인상과 달리 어쩌면 그녀는 무리 내에서 자신의 지위와 위치를 지켜내기 위해 부던히도 노력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왜냐면, 돈이 없어서 자기는 못 먹는다 하면서 남을 위한 커피를 사갈때가 종종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공원에 할머니들이 나오는 시간은 다들 제각각인지라 그녀는 하루에도 몇 번씩 커피 주문을 하기 위해 아픈 허리를 끌고다니며 에너지를 썼다. 매번 본인이 사면서 매번 본인이 직접 주문을 넣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뭔가 애잔했다. 물론, 그녀가 어떤 연유로 무리내에서 '커피 잘 사주는 언니 할머니'를 자처하는지는 밖에 있는 사람으로써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제 3자 입장에서 좋게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 나를 대할 때는 사회적 가면조차 벗는 그녀의 이중적인 태도에 이미 적신호를 올렸기 때문이었기에 그녀를 이해하고자 노력하고 싶지 않았다.




4. 그녀의 변검기술

어느 날, 할머니가 우리 가게에 몸소 행차하셨다. 인자한 미소를 띈 채 그녀는 나에게 말을 걸었다.


"내가 하나만 물어볼 게 있어."


그녀가 궁금함을 못 이겨 친히 오신 연고는, '아메리카노 500원 할인해줄 수 있느냐.'였다.


"저기 앞에 있는 카페를 내가 갈 수도 있어. 그런데 자네 노는 것 같아서 팔아주려고 굳이 여기서 사 먹는거야. 내가 도와주려고."


나는 말없이 할머니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녀가 말을 이어갔다.


"내가 여기 저기 할머니들 많이 사주잖아. 그러니까 500원 할인해서 맞춰 줘. 그래 줄 수 있는지 먼저 물어보는거야~"


나는 할머니의 희끗희끗한 흰 머리를 보면서 백번 양보하는 심정으로 '알겠어요. 대신 다른 사람들한테는 절대적인 비밀이예요.'하고 그녀의 어명을 받아들였다. 그리고는 바로 후회했는데, 그 이유는-


"그리고 서비스 좀 줘. 아유."


중국 가면극 중 '변검'이라고 아는가? 가면을 순식간에 훽훽 바꾸는 그 기술을 눈 앞에서 보는 것 같았다. 그녀의 표정 변화는 0.001초였다. 부처님이었던 할머니는 갑자기 매서운 눈으로 살기 어리게 나를 노려보면서 진열장에 놓인 르뱅쿠키를 손으로 가리켰다. 마피아처럼 정말 죽일 듯이 노려보는 그녀가 가리킨 쿠키는 하나에 3600~3900원 선으로 판매하는 거였다. 저 말인 즉슨 쿠키보다 저렴한 아메리카노- 게다가 500원을 할인받은 아메리카노를 사면서 배보다 더 큰 배꼽을 달라는 격이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그녀가 이 커다란 쿠키를 받으면 혼자 먹을까, 아니면 주변에 나눠줄까 궁금해졌다. 하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어쨌든, 말도 안되는 서비스를 요구하는 할머니를 보며 나는 말없이 고개를 냉정하게 저었다. 그녀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올리고자 자꾸 나를 달달 볶아대는 것이 내심 불쾌하기도 했다.


"아메리카노 500원 할인, 그 이상은 안돼요. 안 드릴거예요."


그러나 그녀 역시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응? 내가 나이 먹어서 귀가 잘 안 들려."


어이가 없어서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여태까지 나랑 조곤 조곤 대화를 한껏 나눴던 분은 누구였단 말인가. 나는 귀가 갑자기 안들린다는 할머니를 향해 두 손으로 커다란 엑스자를 정확하게 그어서 단호하게 보여드렸다.


"그거 얼마한다고 서비스 좀 팍팍 주지. 내 참."


그녀는 할인 받은 아메리카노 두 잔값을 보여주며 '그럼 이거 맞지?' 하고 나가셨다. 나는 아메리카노를 배달해드리면서 마지막 남은 서비스 정신을 끌어모으고 끌어모아 '맛있게 드세요~' 라는 인사를 겨우 건넸다.





5. 야.

"야! 야!"


날이 조금 선선해졌길래 에어컨을 끄고 가게 문을 활짝 열어뒀다. 열어둔 문 사이로 날카로운 목소리가 앞다투어 들어왔다. 나는 뭔 소리인가 싶어 하던 일을 멈추고 빼꼼 고개를 내밀어 밖을 바라보았다.


"야! 아이스티 가져와!"


몇 번을 부르는데도 못 듣냐는 듯한 퉁명스러운 표정의 왕언니였다. 나는 굳은 표정으로 몇 잔인지를 물어보았다. 그녀는 아메리카노보다 저렴하게 행사중인 아이스티를 대체품으로 택한 모양이었다. 아이스티 두 잔과 아메리카노 한 잔의 주문을 받아들이는데 귀에서는 그녀의 '야! 야!'가 자꾸 맴돌았다.


그녀에게 나는 굳이 사회적 지위를 높여야 하는, 한 마디로 잘 보여야 하는 상대방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미 나는 그녀에게 한 단계 낮은 사람이었다. 아마도 직접 코 앞까지 배달을 해주던 그 시점부터 그녀는 우리 둘 사이에서 자신의 포지션을 확신했을 것이다. 게다가 그녀 자신은, 굳이 옛날 말을 끌어오자면 왕같은 손님의 입장이었다.


단 돈 몇 천원에 그녀는 주변에서 '커피 잘 사주는 언니'로 좋은 평판을 유지했고 게다가 나 같은 하인까지 만들었으니 그녀 입장에서는 얼마나 좋겠는가. 커피 한 잔이 이렇게 위대하다.


나는 이젠 그녀의 발길이 끊어져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면서 아이스티를 들고 공터로 나아갔다. 저 멀리 앉아있는 그녀의 표정도 썩 좋진 않았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 정색을 하면서 말했다.


"할머니, 호칭이 '야'는 아닌 것 같아요."


내 싸늘한 말투를 들은 그녀는 이게 무슨 소리인고 잠시 파악을 하더니 이내 큰 소리로 되물었다.


"아니, 그럼 뭐라고 그래? 나보다 나이 어리면 '야'지, 뭐라 그래?"


그녀는 예상치 못한 하극상을 받게된 왕처럼 목소리가 급격하게 커졌다. 내가 다시 할머니를 싸늘하게 쳐다보자- 강아지를 꼭 안고 있는 젊은 할머니가 아이스티를 받아들며 상황을 무마하려 했다.


"언니도 있고- 이모도 있잖아~"


썩 좋은 중재는 아니라 생각했지만 더이상 이 무리 속에 있고 싶지 않아 '맛있게 드세요.' 하고 돌아왔다.


그리고 그 날 이후 그녀의 발길이 끊겼다. 나는 오랜만에 스트레스를 받지 않아 기분이 아주, 아주, 아주 상쾌했다.





6. 그녀의 속내

또 다시 할머니가 가게로 행차했다.


"안사줄라 그랬는데 저 할머니가 오잖아. 아메리카노 한 잔은 달게, 한 잔은 안 달게."


나는 건조하게 "네 하고 돈을 받아 들었다. 할머니는 잠시 고민하는 듯 하더니


"아이스티도 한 잔 더 해줘."


나는 또 "네" 하고 돈을 받아들었다. 그녀가 계속 말을 이었다.


"근데 아이스티가 너무 싱겁대. 그래서 맛 없다고 안 먹겠다는거 내가 여기 맛있게 해줄거니까 먹으라고 그랬어. 신경 좀 써줘요~ 맨날 손님 없어서 자네 노는 것 같아서 하나라도 팔아줄라고 하니까."


내가 할머니의 친손녀였던가 하고 잠시 내 핏줄을 의심했다. 이렇게까지 나를 신경써주고 걱정해준다고? 물론 상권이 썩 좋지 않은 곳인지라 손님수가 많지는 않지만서도 객단가가 높은 편이라 매출에는 그럭 저럭 만족하고 있는데, 왜 내가 단 한 번도 요구한 적 없는 동정심을 구태여 받아야 할까?


"저희 집은 아이스티를 꽤 진하게 타서 싱거울리가 없어요~"


진짜였다. 맹물맛 나는 음료들을 싫어하는 내 취향을 적극 반영한 음료들이었다. 내가 길게 대꾸하니 할머니가 덥썩 내 말을 물면서 인자하게 웃었다.


"그래~ 나도 그렇게 말했어. 여기 맛있게 한다고. 근데도 안 먹겠다잖아. 그래도 내가 하나 더 팔아줄라고 왔어. 자네 맨날 놀잖아."


할머니의 저 말 속에 숨은 뜻을 대놓고 무시했다. 나는 그녀에게 감사함을 느껴야 하는 무리 중 하나가 되고 싶지 않았기에 또 다시 건조하게 '네' 하고 넘겼다. 서비스 쿠키는 커녕 내게서 좋은 평판을 듣지 못한 그녀는 털레 털레 가게 밖을 나갔다.





7. 그녀는 다 계획이 있었다.

어느 날, 할머니가 또 다시 물어볼 것이 있다며 들어왔다.


"나~ 하나만 물어보려고. 혹시 아메리카노 500원 깎아줄 수 있나?"


나는 데자뷰를 느끼며 너털 웃음을 지었다.


"할머니, 제가 지금도 500원 깎아 드리는 거 알고 말씀하시는 거지요?"


"알아~ 내가 그동안 여기 안왔잖아? 저쪽 카페 갔어. 아니, 내가 저 쪽 카페 가면 집앞에서 전화하면 바로 갖다 줘. 근데 내가 여기 도와주려고 여기서 자주 먹으려고. 내가 다른 할매들것까지 사주려고 하는데 500원 더 깎아줄 수 있나 해서. 내가 많이 사잖아."


그러니까 그녀는 저쪽 카페에서 파는 아메리카노 가격과 똑같이 맞추려는 셈이었다. 그녀가 말하는 저쪽 카페는 숭늉같은 원두커피였다. 원두량을 대폭 줄였거나 원두값이 꽤 저렴하거나 혹은 머신이 좋은 것은 아니거나 싶은 그런 아메리카노.(그 카페 사장님이 잘못했다는 말은 아니다. 결과적으로 커피는 기호식품인 것이고, 장사라는 타이틀 속에서 여러가지 현실적인 여건을 맞춰야 하니까.)


"할머니. 할머니가 저쪽 카페에 가셔도 저는 괜찮아요."


내가 무미건조하게 얘기하자 할머니는 매같은 눈으로 죽일듯이 노려보았다.


"자네 노는 것 같아서 내가 도와주려고 하잖아."


"안 그러셔도 괜찮아요."


"도와준다니까?"


"괜찮아요."


할머니는 잠시 지팡이에 몸을 기대더니 허리춤에서 지갑을 꺼냈다.


"억지로 해달라고는 안해. 그냥 물어본거야. 해줄 수 있는지. 아메리카노 한 잔이랑, 아이스티 두 잔."


그녀는 모든 걸 해탈한 노인의 평범한 표정을 짓더니 의외로 순순히 물러섰다. 그대로 그녀가 커피를 안 사고 나갈 줄 알았던 나는 순간적으로 마음이 약해져 서비스 쿠키를 손에 쥐어 드렸다. 하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곤 재차 당부했다.


"이번만 드리는 서비스예요. 앞으로는 없어요."




8. 애증의 그녀

다음 날, 할머니는 원거리 주문 대신 직접 와서 주문을 했다. 돈이 없다고 자기가 먹을 건 안 먹고 남들이 먹을 아메리카노와 아이스티를 주문하고는 나지막히 나에게 말했다.


"서비스 없어?"


...역시는 역신가?




이후로 할머니는 나를 '이모! 혹은 아가씨!'라 불렀고 나는 적당한 기준을 지키며 서비스를 챙겨드리고 있다. 할머니가 아메리카노와 아이스티를 매일같이 사신다 해도 나한테 남는게 많지는 않다. 아이스티는 거의 마진 없는 가격이고 아메리카노도 할머니들이 드시는 시럽만 해도 서비스고 뭐고 없어야 한다. 오히려 할머니한테 더이상 여기 오지 마시고 매일같이 말씀하셨던 저짝 카페로 가시라고 해야한다.


그런데도 내가 이 애증의 할머니를 손님으로 받는 이유가 있다.


이제는 공터 내 주변인 뿐 아니라 그 앞에 있는 순대국집 사장님에게까지 커피를 쏘기 시작한 할머니였다. 할머니의 어명을 받아 커피 배달을 하러 갔는데 사장님이 난처하다는 듯이 내게 말했다.


"아유, 부담스러워. 내가 달라고도 안했는데 왜 자꾸 사주는거야."


나는 조금 놀랐다. 그녀의 커피 대접을 받는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하는 줄 몰랐다. 또 한 번은 그녀가 쏜 커피를 받아들인 다른 할머니의 중얼거림을 들었는데 이랬다.


"다 못 먹는데 왜 자꾸 사주는 거야. 힘들게."


뭐랄까, 그 말을 듣는 순간, '커피 잘 사주는 언니 할머니'가 값을 내고서라도 관계 속에서 억지로 지켜내려는 그 위치가 참 애잔하고 또 애잔했다.


할머니는 남들 눈에 좋은 사람으로 계속 비춰지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그 가면마저 벗겨지면 스스로가 무너질 것 같았을까? 문득 내가 건네드린 서비스 쿠키를 행여 누가 보고 달라고 할까봐 숨기던 할머니의 맨얼굴이 아른 거렸다.


그녀의 짙은 속내와 삶의 전부를 헤아릴 순 없지만 나는 그녀가 지키고자 하는 사회적 지위를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는 같이 지켜주었다.


이후 나는 '커피 잘 사주는 할머니'만 볼 수 있도록 거스름돈 사이로 쿠키를 숨겨서 건네곤 했다. 굳이 사람들 앞에서 우악스럽게 뺏어서 그 좋은 사회적 가면이 벗겨지지 않도록 나름 배려한 것이다. 또 할머니가 다른 할머니에게 쏜 커피를 배달 할 때는 꼬박 꼬박 '저 할머니가 사 주셨어요.'를 붙여서 생색내는데 조금 힘을 실어주었다.


물론 대접받은 할머니들이 '커피 잘 사주는 할머니'의 호의를 부담스러워 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거기까지 커피 파는 가게 사장이 감히 어떻게 건드리랴. 주문을 받았으니 값에 맞는 음료를 내어 드리는 것이 내가 할 일이지.


하지만 '커피 잘 사주는 할머니'가 가게로 와서 서비스를 더 달라고 할 때마다 절대 내어주진 않았다는 웃픈 사실. 나도 당신과의 관계 속에서 지켜내야 하는 내 사회적 지위가 있음을 확인했습니다요, 손님.


어쨌든 인간관계는 참 복잡하다.

커피 한 잔이 이렇게나 복잡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