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시피의 행간 읽기
라우라 에스키벨의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을 읽고
사람이 죽고, 태어나고, 먹고, 사랑하는 일로 가득 찬 소설이었다. 모두 원초적 차원의 인간사들, 음식을 둘러싼 이야기는 특별히 다뤄지고 있었다. 먹는 행위의 핵심은 먹어지는 대상이 먹는 이의 일부로 흡수된다는 데 있다. 요리는 타인의 먹는 행위에 나의 일부가 개입하는 일이다. 요리는 매개의 역할을 하며, 그 과정에서 감정의 전이가 일어난다. 그렇게 요리는 자기표현의 수단일 수 있는 것이다. 책 속에서는 만드는 사람의 감정 상태가 음식을 통해 먹는 사람에게 전달되는 모습이 유머 섞인 판타지의 형태로 그려지고 있었다.
여성들에게 요리는 언제나 누군가를 대접하는 일이었다. 레시피는 여성에게 씌워진 굴레, 따라야만 하는 남성 중심의 질서를 뜻하는 슬픈 단어로 쓰이고 있었다. 요리가 자기표현의 한 방편이라면 그들은 어떤 마음으로 부엌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을까. 어떤 이야기가 하고 싶었을까. 각자 안타까운 사연이 있는 나차와 티타, 그리고 마마 엘레나는 울분을 삭이고, 상처의 기억을 곱씹으며 한 단계, 한 단계 진행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책 속에 쓰여있던 건 단순한 요리법만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속에는 아픔과 설움의 역사가 숨겨져 있었다. 뒷얘기는 대개 드러나지 않고, 여성들은 이해받지 못한다. 양파 때문에 우는 것인지, 슬퍼서 우는 것인지 보는 사람은 알 수 없다.
어려움의 극복은 혁명을 통해 이루어진다. 일상과 상식을 뒤엎는 변칙적 요소가 필요하다. 티타에게는 이런 요소들이 숨 막히는 삶에서의 탈출구가 되어 주었다. 예를 들어, 6월의 성냥 반죽은 먹을 수 없는 이상한 메뉴였고, 이 책이 단순한 요리 테마의 소설이 아닌 것을 확인해 주었다. 게다가 성냥 반죽은 처음으로 '남성'인 존이 티타에게 해주는 요리라는 점에서 특별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요리는 티타 자신의 내면으로 그녀의 시선이 향하도록 만들었다는 사실이 매우 중요했다.
헤르트루디스는 욕망에 솔직한, 주체적으로 앞날을 개척해 나갔던 변칙적 인물이었다. 그녀는 크림 튀김이라는 간단한 요리도 부하에게 시켜버리는 다른 인물들과 뚜렷이 구별되는 여성이었다. 그녀는 내면에 타오르는 불씨를 품고 있었고 그래서 알몸이 되어서도 추위를 타지 않았다. 늘 한기를 느끼는 티타와는 반대였다. 이런 언니의 존재가 티타에게는 각성의 계기가 되었고,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 티타는 말했다. 피임법을 가르쳐주며 떠나는 언니의 모습이 티타에게는 아마 당당하고 멋지게 보였을 것이다. 닮아야겠다 마음먹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마 엘레나의 망령은 계속해서 티타를 옭아매었고 또 다른 언니 로사우라는 막내딸 에스페란사에게 억압을 대물림하려 하고 있었다. 티타가 결국 용기 있게 마마 엘레나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축하할 일이라 하겠지만 다음 세대는 여전히 비슷한 삶을 살아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소설은 크리스마스 파이에서 시작해서 크리스마스 파이로 끝이 나는 수미상관의 구조였고, 여성의 삶은 변함없이 늘 고단할 뿐이란 걸 암시한다. 그래도 세대를 거치며 조금의 진전은 있었을 것이라 믿는다. 헤르투르디스는 물론이고, 티타와 같은 보통의 여성들이 저항하며 이끌어 낸 변화, 그 긍정적 유산에 대해 티타의 손녀는 마지막 페이지에서 자랑스럽게 말하고 있다.
결말이 마음에 들었다. 그것은 존과의 순탄한 결혼도, 페드로와의 행복한 결합도 아니었다. 그랬다면 독자의 마음이야 편했겠지만 결국 남성에게 의존해야만 행복을 성취할 수 있다는 메시지가 되는 까닭에 티타의 문제의식에 들어맞는 마무리는 아니었을 듯. 성냥에 불이 붙고, 이를 하나씩 삼키며 티타가 불꽃과 함께 산화하는 장면은 정말 인상적이었다. 책에선 여성이 짊어져야만 하는 굴레가 마치 식당의 차림표를 보듯 다양하게 등장했는데 결말은 이 모든 구속에서의 해방을 상징하는 장쾌한 끝맺음이었다. 성냥을 먹는다는 행위 '먹는 대상을 흡수한다'는 먹기의 본연의 의미에만 (극단적이지만) 능동적으로 집중하겠다는 맹세다. 불이 붙어 빛과 열을 발산하는 것은 남녀 구분 없는, 불합리한 구속이 없는 생의 근원적 무대로 돌아가겠다는 선언이다.
100여 년 전 먼 나라의 서글픈 이야기였구나 하고 책을 덮기엔 어딘가 개운치 않은 구석이 있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도 티타가 겪었던 것과 종류는 조금 다를 수 있을지언정 여성에 대한 억압이 엄연히 존재한다는데 생각이 미쳤기 때문이다. 매우 자연스럽게 최근의 페미니즘 이슈에 대해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드러나지 않음'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고, 때로 모르는 것조차 누군가에게는 무심함으로 비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누군가는 상처를 받았을지 모른다. 행간을 좀 더 의식적으로 살펴봐야 하지 않을까. 자신의 둔감함을 반성하는 기회가 되었음을 고백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