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늘 설레는 법이다. 이성 간의 사랑은 더 그러하다. 마음이 설레면 사랑의 마법에 걸린 것이다.
유령들은 지금 내 마음이 설레었던가를 묻고 있었다.
"연예 함도 못해봤어? 푸어박. 사랑 얘기도 해줘. 어서!" 아이샤와 파티마가 졸랐다.
"동방예의지국의 불타는 사랑이야기라 기대되네"
"그러게 말이야. 우리야 끌리면 연애하지만 쟤네들은 이리 빼고 저리 빼고 먼 지랄 하는지 통 모르겠단 말이야"
제니도, 마르코도 듣고 싶은 눈치가 역력했다.
"아니야 쟤네들도 요즘엔 원나잇하는 애들은 잘 내지른다고 하더라고. 제 멋에 갈기는 똥갈보 자유주의자들 말이야. 아무튼 들어나 보자. 한번 풀어봐" 라비의 말에 나는 연이 닿은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내 인생에 설레는 3명의 여자가 있었다. 요코, 코델리아, 아내 펑샤오휘 이들 3명이 내 인생의 세 여인이다.
첫 번째 여인,
요코의 집은 홋카이도 나카시베츠 근처에서 소를 키우는 목장을 하고 있었다. 1983년 여름, 국제민간교류의 일환으로 홍콩, 대만, 한국의 학생들이 '일본 가정집 한 달 살기'로 초청받아 홋카이도에 장기 여행을 갔다.
우리는 하네다 공항에서 내려 도쿄 우에노역에서 밤 기차를 타고 아오모리까지 갔다. 거기 아오모리에서 다시 페리를 타고 홋카이도 하코다테에서 내렸다.
하코다테의 아름다운 야경을 구경한 뒤, 미리 준비되어 있는 버스로 삿포로에 갔다. 거기서부터 나카시베츠까지도 대절 버스로 갔었다. 내 나이 20살 때였다.
먼 길을 가는 도중, 기차간에서 대만 대학원생에게, 만다린- 표준 중국어- 노래를 배웠다.
그는 대만가수 덩리쥔(鄧麗君)이 일본에서 현재 유명하다며 그녀가 부른 작은 마을 이야기 "小城故事" (샤오청구스)와 "당신, 두 밤 자면 온다더니 일 년이 가도, 2년이 가도 소식 없는데, 그때 당신 내게 머라고 약속하셨나요" 이런 가사를 담고 있는 "니전머숴 (你怎么说) 당신 머라고 하시는 거예요"를 우리에게 가르쳐주었다.
내가 배정된 집은 목장을 하는 요코네 집이었다. 요코는 나보다 2살 많았다.
당시, 우리나라는 지지리도 못 살아서, 일본에 가면 으레 일산 코끼리밥솥이나 소니 워크맨을 사 올 때였으니 그때는 참 배고픈 시절이었다.
반면에 그때 일본은 최대의 풍요로운 황금기를 맞았기에 그녀의 오빠는 존디어(John Deere) 트랙터 여러 대로 목축업을 자동화시키고 있었다.
나보다 2년 연상인 요코는 간호사였다. 그날 밤, 우리는 굵은 통나무 위에 나란히 앉았다.
그녀가 살포시 기대 와서 나는 순간 기절할 뻔했다. 눈썹 위에서 일자로 가지런히 자른 일본 여자애들의 앞머리 팟츤 스타일의 히메컷을 한 요코는 귀여운 요정이었다.
나는 요코의 가슴을 꺼냈다. 내가 너무 떨었던 탓이었을까, 아니면 저항하는 자연 가슴의 탄력성 때문이었을까 그녀의 복숭아는 착 달라붙어 잘 꺼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녀의 가슴이 작았던 까닭은 결코 아니었다. 요코의 가슴에서는 아기 같은 풋풋한 냄새가 났다.
조몰락거리면서 가슴을 가지고 놀았는데, 무슨 짓을 해도 그녀는 나를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대신 내 머리를 두 손으로 쓰다듬어 주었다. 편안하고, 따스하고, 포근하였다.
그런데 잠시 후, 달려드는 모기떼에 그녀의 가슴도, 내 손도 융단폭격을 맞은 듯이 따가웠고 여기저기 퉁퉁 부어올랐다.
고통스러웠다. 그래서, 서둘러 요코의 가슴을 브래지어에게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
그 달밤에 요코가 나에게 키스를 했다. 오랫동안 서로 포옹을 하고 키스를 하였다. 심장이 쿵쾅거리며 널뛰기하였다. 만약에 달려드는 모기만 없었더라면 우리는 일 저지를 뻔하였다.
그녀에게서 어렴풋이 담배 냄새가 났다. 그렇지만 그녀는 품성이 착하고, 대단히 적극적이며 매력적인 누나였다. 헤어질 때 요코도 하염없이 울었고 나도 울었다. 그때가 대학 2학년 때였다.
상냥하고, 친절하고, 늘 배려하여 어머니나 누나와 같이 너무나 편안한 요코, 그녀와 결혼했다면, 비록 돈을 쥐꼬리만큼 벌어온다 할지라도 가정에서만큼은 나는 왕이 되어 중전인 요코와 아이들과 행복하게 잘 살고 있을 터였다.
만약 스마트 폰의 시대였다면 요코와 나는 국제결혼을 할 뻔했었다. 한번 이별하면 인연이 영원히 끝나는 시절, 지금도 생각하면 가슴 시린 애달픈 시절이었다.
두 번째 여인은,
나보다 10년이나 어린 코델리아(Cordelia)였다. 나는 그녀를 코딜리아로 불렀다.
그녀의 조부는 중국 본토 푸젠성 (福建省)에서 이민 와 말레이시아에서 일가를 이뤘다.
그녀는 이른 나이에, 큰 호텔과 쇼핑센터를 하는 30년 차이가 나는 중국계 남편, 마이클에게 시집보내져 죤이라는 아들을 한 명 두었다.
코딜리아는 거뜬히 C컵+를 받칠 수 있는 탄력 있는 내추럴브라의 가슴과 엉덩이가 달덩이 같은 정말 한창때의 여자였다.
게다가 자연 쌍꺼풀진 눈이 말하듯 상냥하고, 느긋하여 도무지 화라곤 낼 줄 모르는 여자였다.
당시 나는 그녀의 남편이 운영하는 호텔에 투숙했고 호텔바에서 대형 쇼핑센터를 운영하는 코딜리아를 만났다.
우리는 처음부터 척척 죽이 잘 맞았다. 그녀의 목소리는 청량하여, 듣고 있으면 사방이 영롱하고, 하늘이 빙빙 돌아 현기증이 났다. 우리는 감정을 억누르고 좋은 남녀사친 친구로 사귀고 있었다.
어느 날, 그녀가 자기 쇼핑센터에 여성 의류를 배치하고 싶다는 말을 했고 나는 한국산 여성의류가 어떻냐고 제안하였다.
당시는 1990년대였기에 동대문에서는 그때까지도 OEM 방식으로 미국에 의류를 수출하고 있던 시대였다.
나는 동대문에서 태그를 뗀, 빅토리아시크릿이라는 유명한 브랜드 여성의류를 20피트 한 컨테이너를 가져다 그녀의 쇼핑센터에 진열하였다.
우리는 KLCC 공원에 누워 당시 세계에서 최고로 높은 페트로나스 쌍둥이 빌딩을 보았다. 우리 옆에는 많은 외국 젊은 배낭족들이 누워, 시카고의 시어스타워를 누르고 세계에서 제일 높은 건물로 등극한 이 쌍둥이 빌딩을 바라보고 있었다.
쌍둥이 빌딩은, 동쪽은 삼성물산과 극동건설 컨소시엄이, 서쪽 하나는 일본의 하자마가 1998년 완공하였다. 코델리아도 젊었고 나도 젊었다.
나는 당시 세계에서 제일 높은 빌딩인 시카고의 시어스타워에 이어 쿠알라룸푸르 페트로나스 쌍둥이 빌딩을 연거푸 체험한 것이었다.
포트클랭에 머드크랩 찜 먹으러 간 날 밤, 우리는 불륜을 저질렀다. 그 후 우리 둘은 쿠알라룸푸르, 암팡포인트며, 호텔방이며, 그녀의 벤츠를 타고 나가 해변가 차 속에서도, 밖에서도 안에서도 열렬히 사랑을 나누었다. 우리는 거칠 것이 없었으며, 꽁꽁 싸매어 놓은 서로의 감정이 이성을 해방시켰다.
그녀의 아들이 커서 중학생이 될 무렵 코딜리아는 아들을 영국에 유학 보냈고, 뒷바라지하러 영국으로 떠났다.
물론, 영국으로 떠날 때, 그녀는 내가 사랑했던 탐스런 가슴과 엉덩이도 함께 가져갔다. 코델리아는 아주 상냥하고, 기품 있는, 뜨거운 여자였다.
3번째 여인,
내가 아내를 만난 것은 수많은 우연 중 하늘이 안배한 필연의 결과였다. 밀레니엄의 기대가 꺼져갈 무렵, 어느 날 산동성 칭다오 GS칼텍스- 현지회사명 青岛丽东化工有限公司, 칭다오 리동 화공- 에서 파견 근무하고 있는 깨복장이 친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잘 있냐? 여자애 소개해 줄게 칭다오 와라"
"몇 살인데? 예쁘냐?"
"스물셋! 기똥차다니까! 요가 강사인데 한번 만나볼래?"
"그래? 나는 원래 여름엔 중국하고 일본은 절대 안 가는데. 암튼 갈게. 술이나 한잔 하자"
이렇게 해서 아내를 만났다.
아내는 하얀 원피스를 입고 칭다오 자오동 공항에 나타났다. 그녀의 옷자락이 바람에 하늘거렸다. 무척 앳되고 건강해 보이는, 한입 베어 물고픈 젊은 애플녀였다.
우리는 통성명이 끝나기가 무섭게 공항에서 곧장 한국인들이 제법 모여 산다는 황다오의 한식당으로 향했다. 역시 중국 여름은 찐득찐득하고 무더웠다. 내가 여름엔 중국이나 일본을 안 가는 이유다.
추울 정도 에어컨을 가동하는 한정식 식당에서 삼겹살에 칭피(青啤:칭다오피저우 )에 참이슬을 섞어 소맥을 제조해 짠! 하고 잔을 부딪혔다.
"이거 진짜 맛있다. 맥주 하면 칭다오피저우- 칭다오맥주-아니냐!"
라고 하며 친구가 칭피와 참이슬 조합의 소맥을 권했다.
"여기 칭다오에서는 칭피, 하얼빈에서 하피라고, 중국 맥주 엄청 유명하고 맛있어"
"야! 무슨 소리! 말은 똑바로 해야지! 맥주는 독일이지 안 그래? 그리고 무슨 술을 맛으로 마시냐! 이거 한잔만 하고, 뻬갈(백주, 증류주, 고량주) 한번 먹어보자"
술 술 잘 넘어가는 칭피 소맥에 이야기가 쏟아졌다.
"나 요즘 공 친다. 드라이브도 샀는데 정말 재밌다"
"그딴 걸 왜 쳐? 시간 아깝게. 리똥(GS칼텍스 중국현지합작법인) 할만 한갑다"
"말 마라 죽을 맛이다. 세상 사는 게 다 그렇지 머"
"무슨 죽을 맛? 얼굴이 번질번질 하구만." 친구 옆에 앉은 젊은 여자를 가리키며 내가 물었다.
"야! 애는 누구냐?"
"묻지 마 있어. 그런 게 있다고!"
"머가 있는데? 네놈 마눌님?"
그런 게 있단다. 친구는 곤란한 질문을 대충 얼버무리면서 "자 자 술이나 마셔" 하며 빼갈을 맥주잔에 가득 따라 내게 권했다. 순간 아내가 손을 뻗어 그 잔을 받아 자기 앞에 모셔 두었다.
친구의 현지 여자친구와 내 아내는 술을 전혀 입에 대지도 않았다. 둘이서 주거니 받거니 하는 가운데 얼큰해지자, 근처 호텔에 가서 체크인을 했다.
아내는 말수가 적은 여자는 아니지만 낯선 사람 앞에서는 말을 아꼈다. 주로 이야기를 들어주는 타입이었다.
친구 커플이 돌아가고 아내와 나는 잠자리에 들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홀려서 첫 만남부터 잠부터 잤다. 속궁합부터 맞춰 본 것이다.
"아니 무슨 여자가 그렇게 빨리 씻어?" 중얼거리며 아내가 금방 나온 화장실로 들어갔다. 아내는 목욕이나 세안 후, 늘 간단한 로션녀 아기아기였다.
아내는 굴곡이 선명한 여자였다. 요가로 단련된 몸은 구석구석 탄력성이 있었다. 그녀는 균형 잡히고 안정감 있는, 허벅지가 튼실한 체조 선수 같았다.
아내의 몸은 벽에 닿은 공처럼 이리 튀고 저리 튀다가 제자리로 돌아가곤 하였다. 꿈결처럼 감미롭고, 신선하였다. 그녀는 퍼득이는 잉어였다.
아침에 눈을 뜨자, 그녀는 여전히 내 품 안에 있었다. 내가 깰까 봐 고양이처럼 움직이지 않고 눈만 말똥말똥 뜨고 있었다.
눈을 마주치자 그녀는 배시시 웃으면서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는 무엇이 부끄러운지 내 품속으로 꼭꼭 숨어들었다.
그날 이후, 그녀는 울보가 되었다. 그래서 나는 아내로부터 도망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만났고, 훗날 2009년 2월 16일, 아내는 나를 만나러 오다 어느 역 근처에서 강도에게 살해당했다.
경찰에 따르면 그녀는 두 손을 허공에 허우적거렸고 입가에는 선혈이 흘러 하얀 옷을 적셨다고 했다.
그때도 아내는 나를 위해 눈부신 흰 옷을 입고 있었다. 그 흰 옷 안에 숨겨진 뱃속에서는 우리의 불쌍한 아이가 자라고 있었다.
우주로 돌아가기에는 그들은 너무나 어렸다. 원통하고, 원통하고, 또 원통한 일이었다.
늘 후회하지만, 그녀가 나를 만나지만 않았으면 지금쯤 누군가의 아내로, 엄마로 행복하게 살고 있을 것이다.
너무나도 가엾은 아내를 어찌 잊을까. 중국에서 우리는 결혼을 했으니 내 아내가 분명한 것이다.
나는 그녀를 한국의 내 호적에 아내로 올리고 사망신고를 했다. 그리고는 혼자 살았다. 나는 해남에 완전히 낙향해 혼자되신 어머니께 7년간 밥을 지어 드렸다. 이제 어머니도 떠나셨다.
그들의 빈자리를 지키면서 40대를 홀로 보내고, 50대를 보내고, 이제 60대를 보내고 있다.
그렇다고 내가 과거만을 산다는 것은 아니다. 나는 현재를 살지만, 동시에 아내의 과거를 살고, 내가 소멸될 미래를 살고 있는 것이다.
아내가 죽던 그 순간 우주가 멈추었다. 나와 아내의 육신이 우주로부터 와서 쌍을 이루었는데, 나를 남겨두고, 아내만 우주로 돌아갔다. 나는 지금 그 억겁의 시간을 살고 있는 것이다.
조대병원 중환자실에서 다들 이만하니 다행이라고, 그 큰 교통사고에서 목숨만이라도 무사하니 다행이라고 하였다.
이에 나는, 현장에서 죽었어야 했는데 살아났으니, 또 한 번 죽음의 공포를 어이 견딜 것인가! 그 유령의 길을 어떻게 다시 갈 것인가 하고 한탄했었다.
살아난 것도 무덤덤하였고 몸이 고통을 못 느끼니 어디가 다쳤는지도 별로 궁금하지도 않았다.
죽음은 인간이 느끼는 극한의 공포이다. 그 절대적 공포를 그 어린것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어린 아내가 혼자서 안고 가버렸다. 백설공주가 나를 두고 자기 별나라로 홀연히 떠나가 버린 것이다.
슬퍼서, 원통해서 애도를 멈출 수 없었던 내 영혼은 정신병원 폐쇄병동에서 6개월 동안 절규하면서 죽어 있었다.
그녀를 보내고, 영혼이 죽어 있던 동안, 나는 시간여행자처럼 이미 100세 이상을 산 것이다. 그러니 이제 무엇을 더 바란다는 말인가.
행복은 빛이다. 행복은 어린 아내가 나를 비추는 한줄기 빛이다. 그 행복이 빛처럼 찾아와서는 영겁의 암흑 속으로 사라져 갔다.
행복은 무질량의, 계량할 수 없는 광자의 에너지이다. 잠깐 내게 와 머물렀던 아내는 지금도 빛이다.
이것이 내가 부용꽃처럼 아름다웠던 아내와 함께 향유한 행복의 총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