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쁨의 파괴 #1
세균에도 몸에 좋은 것과 나쁜 것이 있듯이, 바쁨에도 질이 있다. 좋은 바쁨은 인간이 인간다움을 유지하는, 혹은 더 성숙한 인간으로 발아 (發芽) 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거쳐야 할 위대한 변화의 궤적이다. 좋은 바쁨은 곧 탄생의 시간이다. 반면 나쁜 바쁨은, 인간다움을 위협하며 빠르게 돌아가는 시간의 컨베이어 벨트 위로 인간을 몰아넣는다. 나쁜 바쁨은 죽음의 시간이다.
그렇다면 인간다움이란 무엇일까? 많은 철학자들이 고민한 주제이고 정답은 없지만, 나는 내가 무척 좋아하는 철학자들의 말을 인용하고 싶다. 우선,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라고 여러 번 강조한다. 그는 고독과 창조의 위대함을 설파하며, 인간에게 신과 같은 우상을 버리고 스스로 초인 (위버멘시)이 될 것을 주문한다. 인간은 초인이 되기 위해 ‘저 너머’의 세계로 건너가야 하며, 그러기 위해선 스스로 몰락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니체가 말한 스스로를 극복하는 초인은 결국 헤르만 헤세가 <데미안>에서 말한 알을 깨고 나오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는 자와 같다. 즉, 이들에게 인간다움이란 더 성숙한 존재가 되기를 갈망하며 현재의 자신을 극복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소위 성공한 사람들은 이 치열한 자기 파괴를 거쳤으며, 이들의 인생의 풍미는 대개 보통 사람들의 그것보다 깊다. 이런 발아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바쁨은, 단지 하나의 세계가 파괴되는 위대한 변화의 궤적이며, 이것은 장려할 만한 좋은 바쁨이다.
한편, 존 스튜어트 밀은 <자유론>에서 인간다움의 조건으로 개별성에 주목했다. 밀은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그 본성상 모형대로 찍어내고, 그것이 시키는 대로 따라 하는 기계가 아니다. 그보다는 생명을 불어넣어 주는 내면의 힘에 따라 온 사방으로 스스로 자라고 발전하려 하는 나무와 같은 존재이다.” 따라서 인간이 개별성을 유지하기 위한 행위, 즉 예술을 위한 바쁨은 바람직하다. 예술은 인간을 더욱 인간답게 만드는데, 나는 전문가들이 하는 공연 혹은 작품만 예술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예술은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를 발현하는 모든 종류의 행위이며, 무척 개별적인 특성을 가진다. 평범한 사람들이 음악을 듣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것, 그림 수업을 듣는 것, 일기를 쓰는 것 등은 전부 예술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현대 사회를 지배하는 것은 좋은 바쁨인가? 안타깝게도 현대인들이 시달리는 것은 대개 나쁜 바쁨이며, 이에 만성적으로 노출된 현대인들은 인간다움을 잃고 기계화되고 있다. 가령, 맹목적인 자기계발, 공부, 일, 깊은 심심함을 견디지 못하고 무언가 할 것을 끊임없이 찾는 것 등이 나쁜 바쁨이다. 이들은 나쁜 바쁨을 통해 불안한 현실에서 도피하려 하고, 자신의 존재를 망각한다.
정신없이 바쁘게 지내본 사람들 중, ‘근데 내가 여기서 뭐 하는 거지?’라는 생각이 든 경험이 아마 누구나 있을 텐데, 이처럼 나쁜 바쁨은 그 주체가 망각의 동물이 되게끔 한다. 나쁜 바쁨이 만성화되면, 가속화되는 바쁨의 파도에 휩쓸려 삶의 중심을 잃을 수밖에 없다. 나쁜 바쁨은 위대한 변화의 궤적을 남기지 않고 단지 소멸할 뿐이다. 이는 바쁨의 주체가 시간의 추격을 받고, 늘 쫓기듯 끌려 다니는 삶을 살게 할 뿐이다.
어떤 이들은 미래에 성공한 삶을 위해, 현재를 치열하게 바쁘게 사는 것이 좋은 바쁨이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다. 하지만 뚜렷한 삶의 목표를 가지고 위대한 변화를 향해 바쁘게 전진하는 사람과, 단지 세속적인 성공을 목표로 삼으며 맹목적으로 바쁘게 사는 것은 분명히 구분되어야 한다. 돈, 명예 따위의 세속적이고 지극히 개인적인 삶의 목표는 위대한 변화가 될 수 없다. 특히나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는 체, 남들이 정한 정형화된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바쁜 것은 최악의 바쁨이다.
위대한 변화는 근본적으로 “사명감”이 전제가 돼야 하는데, 이는 공감과 측은함 및 창조욕에서 비롯된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의지다. 가령, 글을 모르는 백성들을 위해 업무 외 남는 시간에 한글을 만든 세종대왕의 바쁨. 세상에 없던 제품을 내놓기 위해 애플에서 수 없이 야근했을 스티브 잡스의 바쁨. 감동을 주는 책을 내기 위해, 생계 활동하며 시간을 쪼개 글을 쓴 무라카미 하루키의 바쁨. 이것은 분명 크고 작게 세상을 바꾼 위대한 변화의 궤적이지만, 뚜렷한 사명감 없이는 견뎌낼 수 없을 수준의 강도 높은 바쁨이었을 것이다. 이들에게 주어진 부와 명예는 위대한 변화에 따른 결과지 결코 목적이 아니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파괴해야 할 것은 나쁜 바쁨이다. 좋은 바쁨은 인간다움을 유지하고 위대한 변화를 야기하는 반면, 나쁜 바쁨은 인간다움을 잃게 한다. 좋은 바쁨은 무언가를 창조하는 탄생의 시간인 반면, 나쁜 바쁨은 죽음의 시간이다. 현대 사회에 만성적으로 침투해 있는 나쁜 바쁨의 파괴는, 몰아치는 바쁨의 풍랑 속에서 우리를 중심 잡게 해줄 것이다. 시간관의 조절, 권태, 사색, 놀이, 잠 등은 나쁜 바쁨을 파괴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