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한 인간 -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 <호밀밭의 파수꾼>
순수한 인간
영화 <박하사탕>의 주인공 김영호는 사회에 찌든 중년이다. 철로 위에 무릎을 꿇은 남자가 "나 돌아갈래!"라고 절규하는 장면을 시작으로, 영화는 이 남자의 인생의 궤적을 거슬러 올라간다. 영화는 단계별로 남자 인생의 기(期)를 보여주며, 순수했던 한 인간이 어떻게 변질되어가는지 보여준다. 첫사랑이 건네준 박하사탕 하나에 세상에서 최고로 맛있다고 기뻐했던 순박한 영호는 점차 폭력적인 형사로, 바람을 피우는 남편으로 변해간다.
영화는 순수했던 영호가 때 묻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관객들로 하여금 공감을 이끌어낸다. 영호는 보통의 인간이다. 일반적으로 아이가 어른이 되는 과정에서 순수는 희석된다. 모든 어른들은 내면에 순수한 아이를 키우고 있는데, 살면서 받는 크고 작은 상처들로 인해 아이는 마음의 동굴 속에서 좀처럼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어른들은 아이를 꼭꼭 감추고 살아가는 것에 익숙해지지만, 누구나 마음 한편에 순수를 보존하고 있다. 더러는 이 사실을 까맣게 잊고 사는 경우도 있지만 말이다.
<어린 왕자>의 생택쥐페리는 어른들이 숫자를 좋아한다고 했다. 내가 볼 때는, “어른들은 기호를 좋아한다”는 표현이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어른들을 설명하는데 보다 적합해 보인다. 온갖 기호에 노출돼 자란 사람들은 대상의 본질보다는 그것에 투사된 상징적 표식에 주목하는 경향이 있다. 가령, 아주 어린아이에게 신발은 단지 발을 보호하는 사용가치를 지닌 물건이다. 하지만 어느 정도 나이를 먹으면서 사람은 기호의 우열을 학습하고 (미국산 나이키는 좋고 중국산 나이스는 나쁘다), 이들이 신발의 브랜드를 구별할 수 있게 될 때, 신발은 더 이상 단순한 신발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타인과 자신을 구분 짓는 기호인 것이다.
이때, 기호는 상품뿐만 아니라, 직업, 사는 곳, 취향 등에도 부여되며 (처음 보는 사람에게 "무슨 일 하세요?" 혹은 "어디 사세요?"라고 물으면서 이 사람의 지위를 가늠하는 것은 현대인들 사이 만연한 수법이다), 기호는 곧 사회적 지위로 해석된다. 순수한 본질보다는 껍데기에 주목하게 되는 것은 일종의 질서이자 규범이고,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결코 이러한 기호 체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일반적으로 한 사람이 보존하는 순수의 정도는, 기호에 대한 집착 수준과 반비례한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마주치는 어른들은 대개 본받고 싶지 않은 부류다. 이런 어른들은 내면에 잠재된 순수한 아이 (한 때는 본인의 모습이었던)를 완전히 잊고 사는데 이들은 보통 다음의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지나치게 물질적 가치에 집착하는 속물적인 어른, 나이를 앞세워 위계적 권위를 강요하는 어른, 자신의 인생 목적을 자식에게 투사해 조종하려는 보상심리 가득한 어른, 회사와 집을 반복하며 여가시간에 TV만 보는 무기력한 어른, ‘요즘 젊은것들은’을 입에 달고 사는 어른, 그리고 다른 것을 틀렸다고 단정 짓는 어른.
반면 정말로 본받고 싶은, 자발적 경외감이 우러나오는 어른들을 만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이들은 이따금씩 내면의 순수한 아이를 유감없이 드러내는데 다음과 같은 유형의 어른들이다. 다름에 대한 관용을 지닌 어른, 아이 같은 미소가 입가에 나비처럼 번지는 어른, 확고한 자시만의 세계관이 있는 어른, 사회 경제적 지위를 쉽게 가늠할 수 없는 어른, 삶의 여백과 멋을 즐길 줄 아는 어른, 긍정적인 영감을 주는 어른, 그리고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는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어른.
어른의 사전적 의미는 다음과 같다. “다 자란 사람, 나이나 지위나 항렬이 높은 사람, 결혼을 한 사람” 그러나 이는 어른의 실질적 의미와는 거리가 멀다. 어른이 된다는 것. 그것은 단순히 일정한 수준의 나이를 먹었다는 뜻이 아니다. 내면의 순수한 어린아이를 감추는 것에 익숙해질 때, 상징적 기호로 사람을 판단할 때, 숫자에 연연할 때, 차오르는 눈물을 의연하게 삼킬 수 있을 때, 거리의 꽃과 밤하늘의 별을 마지막으로 바라본 적이 생각나지 않을 때, 사랑하는 대상에 애정과 더불어 무거운 책임감을 느낄 때, 그리고 변하는 모든 것에 무뎌질 때. 이때 비로소 아이는 어른이 되는데, 이 시기는 사람마다 다르다.
<호밀밭의 파수꾼>은 유명인들을 살해한 테러범들이 애독했던 책이다. 특히 비틀스의 멤버 존 레논을 저격한 마크 채프먼은 "모든 사람은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어야 한다" 고 말해 사람들에게 충격을 줬고, 이 책은 더욱 유명세를 떨치게 됐다. 이처럼 자극적이고 반사회적인 내용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이 책에 열광하는 이유는 '순수'에 대한 갈망 때문이 아닐까. 어른들의 세계를 삐딱하게 바라보는 치기 어린 주인공 홀든은 곧 한때 순수했던 우리의 과거 자아상이기도 하다. 우리가 어른이 되는 과정에서 상실한 것이 무엇인지, 이 책을 통해 느끼는 바가 있을 것이다.
<호밀밭의 파수꾼> 소개
주인공 홀든 콜필드는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 명문 사립학교를 다니는 10대 소년이다. 소설은 크리스마스 즈음 퇴학을 당한 홀든이 겪은 일들을 다룬다. 홀든은 거짓, 가식, 위선으로 가득 찬 어른들의 세계에 지독한 환멸과 구토를 느낀다. 작가는 매사에 삐딱하게 세상을 바라보는 주인공의 심정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원작에서 "goddamn"이라는 다소 파격적인 표현을 거침없이 사용한다. 홀든은 기성세대가 만든 질서를 따르기를 거부하고 자신을 가르치려 드는 어른들을 비웃는다.
홀든은 차마 부모에게 퇴학 사실을 알리지 못한 채 뉴욕을 홀로 방황하기로 결심한다. 방황하던 홀든은 어떤 남자의 꾐에 넘어가 방으로 창녀를 부르게 된다. 그는 육체적 쾌락을 해소할 대상보다는 단지 대화 상대가 필요한 것뿐이다. 홀든의 방으로 들어온 창녀는 한눈에 보아도 홀든보다 훨씬 나이가 많아 보인다. 홀든은 그녀가 어떤 사연이 있어 이런 일을 하는지, 몇 살인 지 등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어 하지만 그녀가 개인적인 신상을 밝히는 것을 반길 리 없다. 너무나 능숙하게 옷을 벗는 창녀의 모습을 보며 홀든은 괜스레 우울함을 느낀다.
홀든은 여자 친구 샐리를 만나 데이트를 한다. 극장에서 연극을 보고 스케이트를 탄 홀든과 샐리. 홀든은 뉴욕에 있기 싫다고 말하며 이 지긋지긋한 곳을 떠나자고 샐리에게 제안한다. 홀든의 눈에 대부분의 뉴요커들은 명품이나 고급 자동차 따위에 환장하는 속물들이다. 그는 이런 부류의 인간들과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이 끔찍할 정도로 싫다. 하지만 샐리는 매사에 부정적인 홀든이 이해가 되질 않는다. 그녀는 홀든의 계획이 너무나 무모하기 때문에 나중에 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홀든은 시간이 지나 어른이 되면 지금 이야기하는 장밋빛 계획들이 실현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어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다. 홀든은 샐리와 대화하며 답답함을 느낀다.
“농담하는 거 아니야. 한 180달러쯤 저축해 놓은 돈이 있어. 그러니까 내일 아침에 은행 문 여는 대로 돈을 찾아다가, 그 친구한테 가서 차를 빌리는 거야. 농담이 아니고 정말이야. 오두막집 같은 데서 돈이 떨어질 때까지 지내다가, 돈이 다 떨어지면, 내가 일자리를 구하는 거지. 그러고는 냇물 같은 게 흐르는 곳에서 사는 거야. 그러다 보면 나중에 결혼 같은 것도 할 수 있을 테지. 겨울이면 내가 장작도 베어 오고, 둘이서 그렇게 사는 거야. 정말 끝내주는 생활이 될 거야. 어떻게 생각해? 같이 가자. 네 생각을 말해봐! (중략) “싫다는 건 아니야. 그렇지 않아” 샐리가 말했다. 난 그 애가 미워지기 시작했다. “그런 일을 할 시간은 앞으로 있을 거야. 자기가 대학에 가고 나서도 얼마든지 말이야. 그런 다음에 우리도 결혼할 수도 있고. 좋은 곳에 얼마든지 갈 수 있어. 자긴 그저……” “아니 그렇지 않아. 갈 수 있는 곳이 얼마든지 있는 건 아니라고. 모든 게 변할 테니까” 난 다시 우울해지고 있었다. “뭐라고 말했어? 무슨 소린지 못 들었어. 조금 전에만 해도 소리소리 지르더니, 이번에는……” “아무 데도 가지 못할 거라고 말했어. 내가 대학을 가고 난 후에는 말이야. 내 말 똑똑히 들어봐. 그땐 모든 게 달라질 거야.”
한편, 매사에 반항적이고 까칠한 홀든도 애정을 느끼는 대상이 있으니 바로 순수한 아이들이다. 홀든에겐 원래 아끼던 남동생 앨리가 있었다. 앨리가 백혈병에 걸려 사망하자 홀든은 크게 상심한다. 앨리가 죽은 날 분에 못 이겨 차고 유리창을 주먹으로 깨부수는 바람에 그는 주먹을 잘 쥐지 못할 정도로 큰 상처를 입는다. 홀든은 앨리를 그리워하고 그의 죽음을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한다.
비록 남동생 앨리를 다시 볼 순 없지만 홀든에게는 여동생 피비가 있다. 홀든은 피비를 끔찍이 아낀다. 피비에 대한 홀든의 정다운 관심과 배려는 그가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와 사뭇 다르다. 피비는 어른들의 세계에 아직 오염되지 않은 순수의 상징이다. 어느 날 피비와 외출한 홀든은 그녀가 회전목마를 타는 것을 흐뭇하게 지켜본다.
소설의 제목 <호밀밭의 파수꾼>은 홀든의 장래희망이다. 그는 순수한 아이들이 때 묻은 어른으로 변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이를 막고 싶어 한다. 홀든은 우연히 들은 노래에서 영감을 얻고 순수를 지키는 호밀밭의 파수꾼을 자처한다.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자 하는 그의 바람은 순수한 아이들에 대한 애틋함을 드러낸다.
그건 그렇다 치고, 나는 늘 넓은 호밀밭에서 꼬마들이 재미있게 놀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곤 했어. 어린애들만 수천 명이 있을 뿐 주위에 어른이라고는 나밖에 없는 거야. 그리고 난 아득한 절벽 옆에 서 있어. 내가 할 일은 아이들이 절벽으로 떨어질 것 같으면, 재빨리 붙잡아 주는 거야. 애들이란 앞뒤 생각 없이 마구 달리는 법이니까 말이야. 그럴 때 어딘가에서 내가 나타나서는 꼬마가 떨어지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거지. 온종일 그 일만 하는 거야. 말하자면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다고나 할까. 바보 같은 얘기라는 건 알고 있어. 하지만 정말 내가 되고 싶은 건 그거야. 바보 같겠지만 말이야.
소설이 출판된 1950년대 미국은 전쟁과 대공황을 거친 후, 유례없는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중산층의 황금기'로 불리는 이 시기에, 평범한 사람들도 열심히 노력하면 집과 차를 사고 안락한 삶을 누릴 수 있었다. 경제적 여건이 나아지면서, 사람들은 사치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속물 및 물질주의가 만연하게 되었다. 기존의 사치품은 대중화됐고 사람들은 사치를 부릴 새로운 사치품을 만들어냈다. 홀든이 풍자하는 허영 가득한 사람들은 이 시기 일반적인 중산층의 모습이었다. 사람들은 존재보다는 소유에 열렬한 관심을 기울인 채 어떻게 하면 더 많은 것을 가지고 뽐낼 수 있을 지에 골몰했다.
변호사는 괜찮지만.... 그렇게 썩 끌리는 건 아니야. 그러니까 죄 없는 사람들의 생명을 구해준다거나 하는 일만 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변호사가 되면 그럴 수만은 없게 되거든. 일단은 돈을 많이 벌어야 하고, 몰려다니면서 골프를 치거나, 브리지를 해야만 해. 좋은 차를 사거나, 마티니를 마시면서 명사인 척하는 그런 짓들을 해야 한다는 거야. 그러다 보면, 정말 사람의 목숨을 구해주고 싶어서 그런 일을 하는 건지, 아니면 굉장한 변호사가 되겠다고 그 일을 하는 건지 모르게 된다는 거지. 말하자면, 재판이 끝나고 법정에서 나올 때 신문기자니 뭐니 하는 사람들한테 잔뜩 둘러싸여 환호를 받는 삼류 영화의 주인공처럼 되는 거 말이야. 그렇게 되면 자기가 엉터리라는 걸 어떻게 알 수 있겠니? 그게 문제라는 거지.
결국 홀든은 위선자들이 넘치는 뉴욕을 떠나 서부로 도망치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그는 현실의 벽에 부딪쳐 집으로 돌아가고 '사회 부적응자' 낙인이 찍힌 채 정신병원으로 보내진다. 그가 남긴 여운 있는 말을 마지막으로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누구에게든 아무 말하지 않는 것이 좋다. 말을 하면 모든 인간이 그리워지기 시작하니까
맺음말
흥미로운 것은 작가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 자신이 홀든과 같은 삶을 살았다는 점이다. 그는 사회에 반향을 일으킨 이 책 덕분에 일약 유명 작가가 됐지만 은둔생활을 하며 세인과 거리를 두고 살았다. 심지어 <호밀밭의 파수꾼>을 영화화하고 싶다는 헐리우드의 제안에 샐린저가 "홀튼이 좋아할 것 같지 않다" 라며 단칼에 거절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독자들이 이 책을 통해 지금보다 순수했던 그때 그 시절을 이따금씩 회상해보기를 바란다. 그러다 보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들이 내면에 차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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